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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가족 수첩

놓아지지 않는 것

by 두류산

‘이게 뭐지…?’

해가 막 지려던 오후 다섯 시 무렵. 퇴근 채비를 하던 중, 갑자기 명치끝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호흡조차 버거운, 불길한 통증. 낯선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온몸을 훑었다.


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며 루즈벨트 다리를 건너 버지니아주 맥클린 집으로 향했다. 포토맥강 위, 루즈벨트 섬이 석양빛에 젖어들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섬은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야 하는 운명을 보여주는 듯했다.

집에 도착해 넥타이를 풀고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갔다. 자료를 뒤적이다 침대에 누웠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사무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아놓은 자료가 생각났다. 내일은 금요일, 주말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하리라 다짐했다.


잠이 살짝 들었을까. 전화벨 소리가 귀를 때렸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수화기 너머, 익숙한 형님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배어 있었다. 병원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위독하니, 바로 비행기를 구해 타라."

목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형님이 전한 어머니께서 의식을 놓은 시각. 그 아득한 순간이 이곳에서는 9월 18일 오후 다섯 시, 내 가슴을 죄어왔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어머니 몸에서 빠져나온 혼이 태평양을 건너 이곳에 들른 것일까.

‘어머니, 막내를 보러 여기까지 오셨군요!’


새벽 네 시.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빠, 할머니는 아직 의식이 없어요. 큰아빠, 고모들, 모든 가족이 침대 옆에 모여 있어요.”

호흡이 가빠짐을 느꼈다. 곧 큰아이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듯하다는 절박한 전언이다.

“아빠, 전화로나마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요. 제가 할머니 귀에 전화를 댈게요.”

순간 눈앞이 흐릿한 안개처럼 변했다. 전화에 대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전화 너머에서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어머니, 막냅니다! 어머니~~~!”

여전히 대답도, 기척도 없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웅성거림이 들렸다.

"어머니가 깨어나신다!”

막내 누나가 전화를 받아 들고 급하게 외쳤다.

“맥박이 돌아오고 있으니, 계속 어머니를 불러! 비록 말은 못 하시지만, 아들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 같아!”

나는 힘을 다해 생명줄을 끌어당기듯, 전화에 대고 목이 터지라 외쳤다.

“어머니, 막냅니다! 어머니~~~!”

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싶었던 말,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마구 쏟아내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고의 어머니였어요!”

절박한 외침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전화 너머의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통곡으로 바뀌었다. 어머니가 이 세상과의 끈을 완전히 놓으신 것을 직감했다. 목이 메었다. 누나가 전화에 대고 울먹이며 말했다.

“막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곁에 있다고 믿으시고, 마음 놓고 떠나신 게야.”

어머니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힘들게 붙들고 있던 생명줄을, 내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놓으셨다.


어머니는 당뇨병에 심장이 약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곧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의 결혼은 물론, 손자의 대학 입학과 졸업식까지 참석하셨다. 92세까지, 기적처럼 힘껏 살아주셨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전했을까. 내가 중요한 순간을 맞을 때마다, 결혼할 때나 아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잘못에 너그러우시다가도, 큰 잘못을 저지르면 단호하게 혼을 내셨다. 사랑에 배신당한 마음으로 집이 떠나가도록 울면, 어머니는 늘 나를 품에 안아주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네 잘못 때문에 혼을 내지만, 내 마음은 더 아프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그 단단하고 곧은 훈육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요즘도 높은 계단을 오를 때면 문득 어머니가 생각난다. 촉석루 앞 공원의 계단을 함께 오르던 기억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한 칸씩 올라가 보아라.”

나는 쉽게 계단 하나를 올랐다.

“두 칸을 한꺼번에 올라가 보아라.”

나는 다리를 길게 뻗어 간신히 두 칸을 올랐다. 어머니는 이번엔 세 칸을 한꺼번에 올라가 보라고 하셨다. 나는 도저히 오를 수 없어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나직이 말씀하셨다.

“한 칸씩 오르면 쉽게 오를 수 있지만 한 칸을 빼면 힘들어지고, 두 칸을 빼면 오를 수가 없게 된다.”

어머니는 공부도,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소홀히 하여 한 계단, 두 계단을 빼먹으면 힘들어지고 결국 오르지 못하게 된다고. 빠트리지 않고 한 칸씩 오르는 꾸준함이 내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거라고 가르치셨다.


내 유아 시절, 우리는 남강 변에 새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첫돌 사진 나의 모습은 분유 광고 아기모델처럼 건강아였다. 하지만 새집증후군은 나의 기관지를 심각하게 상하게 하여, ‘곧 죽을 아이니 정을 떼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셨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의 아들을 살려내었다. 몸에 불덩이처럼 열이 나면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잠든 의사를 깨웠다. 백일 동안 기침한다는 백일해와 기관지 천식을 고치기 위해 동의보감에 효험이 있다는 약은 다 해 먹였다. 동네에서 제일 큰 병원에 다녀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도립병원이 있는 큰 도시에 기차를 태워 데려갔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이 세상에 살아남았겠는가. 내 병약했던 어린 시절, 거친 호흡으로 자는 모습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셨을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친다.

“어머니, 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장례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왔지만, 가슴은 계속 묵직한 돌덩이를 품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마음껏 목 놓아 울며 풀어야 했는데, 문상객 맞이한다고 대놓고 울지 못해서 그런가...?’

한국에 돌아가면, 두 분이 누운 산소를 찾아 마음껏 꺼이꺼이 울어 젖히리라 마음먹었다.


우리가 살면서 놓치기 싫은 것이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놓아야 한다. 그러나 놓아지지 않는 것도 있다. 어머니의 존재다. 돌아가셨다고 하나, 나의 삶 속에 스며든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은 내가 살아있는 한 어찌 놓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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