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2) / 에필로그

그림 소설

by 희원이

[목차: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

♬ 회사원 은주

♬ 퇴사

♬ 결혼

♬ 은희의 기억

♬ 이주와 이혼

♬ 은희와 여경

♬ 여경의 마지막 소설

♬ 예상치 못한 사건

♬ 동거

♬ 에필로그


[소개말]
-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는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그림 소설입니다.
- 또한 ‘가상 다큐 인터뷰 미편집본’의 형식, 또는 ‘다큐 인터뷰 문체를 적용한 에세이 소설’ 형식을 취했습니다. 감독에게 각 인터뷰 대상자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은희는 한 영혼에 조심스러운 작업을 지속할 계획이 있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연은 언제든 돕고 싶다고 한다. 어쩌면 영화연출 자체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것도 같다. 은주는 이 모든 상황이 온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은희의 행동도, 수연의 선택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건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자신이 미처 하지 못했던 어떤 일이 기억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은희는 언젠가 어른이 된 수연이에게 여경의 사연을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 한편 에필로그에서 수연은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독립적일 그 순간까지도 염두에 둔다. 당당해지는 길은 그것을 증명해보이는 지난한 시간과 함께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 과정을 위해 한국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게 되었고, 이를 듣는 엄마 은주는 반대할 수가 없다. 그건 수연이의 길이고, 아이가 선택한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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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75년생]
“아, 그 인터뷰는요, 그쪽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온 거였어요. 다큐 제작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냥 신청자에 한해서 녹화 자료를 법정에서 쓰든, 예상치 못한 다른 용도를 쓰든 기억할 수 있을 때 기록해 놓는 것이었죠.
당사자가 제일 힘든 작업이기 때문에 인터뷰 대상자가 원할 때까지 최대한 기다려주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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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날, 1시간 동안 말을 기다리고 3시간 가까이 녹화하며 경청했어요. 가끔은 녹화한다는 사실을 잊고 불쑥 질문을 던질 때도 있었죠. 대화처럼 되어버릴 때도 있었고요. 했던 말이 반복되기도 했고, 말이 먹히기도 했고, 말이 끊기기도 했어요. 핵심이 빠지기도 했고, 울기도 했어요. 그리고 잠시 쉬면서 잡담을 하면서 웃기도 했죠.


뜻밖에 원활히 인터뷰 영상을 확보한 덕분에, 그 다음날까지 진행할 필욘 없어 보였죠. 그런 인터뷰를 여분으로 확보하기 위해 학생에게 한 번 더 인터뷰하자고 말하긴 쉽지 않으니까요. 그날 충분히 분량이 확보되어서 다음날까지 작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어요.

단체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국가적 지원을 더 끌어내기 위해서 영상 자료를 제작할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가급적 시간을 내겠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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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와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화상으로 은주 언니는 제게 수연이를 굳이 데려가야 했느냐고 가볍게 힐난했지만, 앞으로 데려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수연이도 가끔 와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겠다고 했죠.

시간을 빼앗길 테니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수연이는 저의 작업 자체에 관심을 보였죠. 카메라 작업을 배우고 싶다더군요.


뭐든 시켜주세요.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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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 시스템에 낯설 아이가 갑자기 고등학교 과정을 소화해야 하는데 수연이는 천하태평하게 굴었죠. 외국어 실력을 믿고 그러나, 유학을 생각하나 싶었는데 뜻밖에 영화 연출이 멋있어 보인다니요?


휴게소에서 오뎅을 하나씩 먹었어요. 딱히 출출하지 않을 때라면 오뎅이나 떡볶이가 제격이었죠. 오뎅을 먹을 때면 언니랑 어렸을 적 학원을 다녀오다가 먹던 오뎅이 생각나는데, 그때는 김말이나 튀김류를 떡볶이 국물에 묻혀 먹곤 했어요. 그게 그렇게 맛있었는데, 수연이랑 오뎅을 먹다 보니 그때 생각이 잠깐 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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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빼곡한 차들은 휴게소에 정차해 있거나 떠나고 있었죠. 떠나가는 차들만큼 유입되는 차 때문인지 주차장은 여전히 차로 가득했어요.

“수연아, 네가 어른이 되면 그때 술 함께 마시자.”

지금 술이 살짝 당기는데 오늘은 캔콜라로 만족하자며 수연이와 건배를 했어요. 그때는 여경 씨에 관한 이야기를 수연이에게 하게 될까요? 수연이와 제게 공통된 경험으로 남은 오늘의 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숨어 있는 그 이야기를요.





IMG_2102.PNG → 서술자 수연, 04년생


♬ 에필로그


유학이요? 아니오. 지금으로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미국 유학은 언젠가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결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전에 제가 아빠의 도움 없이도 제 삶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렸을 적엔 아빠에 관해 좋은 기억이 많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엄마에게 상처를 줄 만큼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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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막상 그걸 겪는 사람은 변화가 좋지만은 않은 거 같아요.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필 이때 그런 슬픔이 몰아치는 건 싫어요. 아빠는 제게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어요.

엄마는 좀 답답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슬픔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저라면 그 정도로 참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 공감을 하다가도 엄마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면 너무 화가 나고 그랬어요.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죠.


“그 자리를 지키며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들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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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괜찮아요. 받아들이고 나니, 나름대로 적응도 되고, 원래 아빠가 그렇게 저에게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운 건지도 딱히 모르겠어요. 같이 살았다면 좋았겠지만요. 이대로 제가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아요. 미국에 가서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고요.

아빠는 늘 저를 돕고 싶다고 하는데 어쩌면 아빠는 아무도 돕지 못했다고, 그저 아빠를 위해 살았다고 말하고 싶죠.


너에겐 그저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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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전 아직 아빠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나약한 존재 같거든요. 그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제가 당당하게 독립할 수 있을 때 제가 이룩한 세계를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죠. 아빠 없이도 나는 엄마와 함께 잘 컸다고요. 잘 해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하려고요.


그러려면 우선 공부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헤헤, 맞아요, 한국 교육은 엄청 빡빡하네요. 솔직히 수능 국어영역에서 필요한 등급을 맞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수학은 늘 괜찮은 편이었고, 외국어로 영어와 독일어 소통에 문제없는 편인데, 국어가 문제네요. 한국어도 모국어에 가깝게 구사한다고 생각하는데, 독해는 왜 그렇죠? 시간이 모자라서 스트레스 받아요.


네, 한국어는 ‘거의’ 모국어죠. 진짜 모국어는 영어라고 생각하고요. 영어로 생각하는 게 더 편하거든요. 하지만 어렸을 적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 친구들과 왕래가 잦아서, 한국에서 생활한 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여기 와서도 친구들도 잘 사귀었고, 학교생활에도 비교적 빨리 적응했거든요.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 (웃음) 그런 표현도 알죠! 당연히. 어쨌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국에서 대학에 들어가려고요.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영화 연출이요. 처음부터 그쪽으로 진학하려면 수능 공부를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여러 가능성을 두겠지만, 그냥 처음부터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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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동안 제가 원하는 걸 하지는 못했거든요. 아버지의 길을 따라왔을 뿐이고, 아버지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과정을 지켜봐 왔거든요.

아버지가 마음대로 자신이 쌓은 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봤고요.





IMG_2108.PNG → 서술자 수연, 04년생


그런데 여기 와서 클라리넷을 놓고 우연히 이모를 좇아갔다가, 여성이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그 안에 있고, 어쩌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굴레나 축복 같은 것일 텐데, 전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걸 생각해보고 싶어요.

내가 있는 곳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알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카메라라는 거울을 통해서 저를 바라보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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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겪지는 않았어도 언젠가 겪을 수 있을 불행을 지켜보고,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어요.

엄마는 제 생각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이렇게 말해주었죠.


[은주, 71년생]
“이제 보니 이모를 닮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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