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살아 있음’에 서명하는 마음으로
‘사용자인 주식회사 ○○와 “고강훈”은 아래 근로조건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정하고 근로계약을 체결합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첫 직장에서 받은 근로계약서였다. 그 당시 나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날의 설렘과 취업 성공의 감격이 떠올랐다. 흰 A4지에 또렷이 새겨진 내 이름과 서명. 나는 매일 계약서 첫 문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곤 했다.
“내가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이 계약은 정년까지 유효할 것이다.”
정년까지 유효할 거라 믿었던 계약서를 바라보며, 나는 마치 영원한 자리를 약속받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때의 나는, 앞으로의 삶이 어떤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직 몰랐다. 계약서를 들여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언제, 인생이라는 계약에 서명했을까?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자동으로 성립된 것일까? 태어남은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살아냄은 스스로 서명해 가는 계약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엔 계약서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눈앞에 펼쳐졌고, 내일은 아무 조건 없이 덤처럼 주어졌다. 밥을 먹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뛰놀다가, 배가 고프면 집으로 돌아가고, 졸리면 잠을 잤다. 아침이 오면 또 새로운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그 시절엔 세상의 무게를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삶은 조용히 나를 어떤 구조 안으로 데려다 놓았다.
어느새 내 하루에는 규칙이 스며들고, 어깨에는 역할이 얹혔으며, 발걸음마다 책임이 따라붙었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무언가와 계약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이라는 학업 계약. 학교는 계약서를 쓰지 않았지만, 우리는 무조건적 순응을 통해 묵묵히 동의해 왔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어른이 되기 위해. 해마다 편성된 반교실 안의 지정된 책상에 앉아 있는 것조차 하나의 동의였고, 나도 모르게 하루하루 계약의 조항을 늘려갔다. 그리고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사람이라는 조건부 미래가 암묵적으로 제시되었다. 출석, 과제, 시험. 그것을 지키며 성장했고, 나는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군가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 곧 내 삶의 방향이었고, 나는 그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는 사이, 나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무수한 계약 속에서 살아간다. 매일 아침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는 것도 하나의 계약, 지하철 시간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회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뛰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말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약속, 연인에게 “변하지 않을게”라고 말하는 조용한 서약. 그러나 이 모든 계약에는 만료일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초조해하고, 동시에 더욱 절실해한다.
종료일이 정해진 계약은 오히려 마음이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계약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사랑도, 우정도, 건강도. 끝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더 치열하게 살아간다.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역시 반복되는 무언의 동의를 요구한다. “오늘도 나를 좋아해 줄까?” 우리는 사랑은 계약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 사랑만큼 조건이 많은 것도 없다. “널 지킬게”, “변하지 않을게”라는 말은 모두 영원히 계속되는 조항이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10년을 함께한 우정이, 단 한 번의 서운함에 차가운 메시지 한 통으로 끊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관계에도 일방적인 해지 조항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에도 몇 번이고 그 대화창을 열어보았다. ‘미안해’라는 한마디면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마저도 이제는 늦어버린 것 같았다. 관계가 끊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남겨진 고요가 무게로 내려앉을 뿐이다. 그것은 인생이 내게 건넨 한 장의 해지 통보였다. “이 관계는 여기까지입니다.” 그 말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를 흔들어 놓았다. 누군가가 떠나고, 어떤 계절이 끝나고, 사랑이 사라지는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계약이 종료되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계약이 끝났다는 것은, 그 기간 동안 분명히 함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닌 관계는 종료조차 되지 않는다. 헤어짐이 있다는 것은, 그전에 우리가 분명히 함께였다는 뜻이다.
삶은 정규직이 아니다. 누구도 완벽히 안정된 위치에 있지 않다. 언제든지 계약은 해지될 수 있다. 직장이 정규직이어도 마음은 늘 계약직처럼 불안하다. 건강과 젊음이라는 조건도,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나는 계약직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매 순간을 성실하게, 그러나 너무 집착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서. 내가 내어주는 시간만큼 삶은 나에게 새로운 사람, 새로운 감정, 새로운 깨달음을 건넨다. 계약이라는 전제는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멈출 수 있으며,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이 자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택의 무게를 알기에 나는 하루를 소중히 살고, 관계에 진심을 다하며, 언젠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는 용기를 품는다. 붙잡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과 계약을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계약은 어느 날 조용히 종료될 것이다. 계약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이 웃고, 더 깊이 사랑하자. 아직 계약이 유효한 오늘, 나는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삶은 나에게 매일 새로운 계약서를 내민다. 나는 매일 서명한다. ‘오늘’이라는 이름의 문서에. 그리고 조용히, 묵묵히 살아간다. 언젠가 종료될 그날까지, 이 계약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사용자인 주식회사 나의 인생과 “고강훈”은 아래 계약조건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정하고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계약서의 마지막 날에 적히는 한 줄.
“이 삶은 진심이었습니다.”라는 말이 남길 바랄 뿐이다. 오늘도 ‘삶’이라는 계약서에 조용히 서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