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의 밀레니엄 해가 시작된 지 벌써 25년이 지났다.
2000년이라는 숫자는 지금도 내게 특별하다. 전 세계가 새 천년의 해맞이를 준비하며 들떠 있던 그 시기, 나는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송림밭에 조성되는 국내 최초의 해양수족관 공사 현장에서 현장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내 숙소는 해운대 오션타워 오피스텔 20층.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밀리니엄 해맞이에 전국에서 밀려드는 인파로 하루 종일 북새통이었다.
온 가족이 모인 해운대, 100만 인파와 함께 맞이한 새해
1999년 12월 31일. 새해 해맞이 행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날만 해운대에 100만 인파가 모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도로는 이미 마비되어 걸어가는 편이 더 빠를 정도였고, 해운대 백사장은 사람들의 머리로 온통 검게 깔려 있었다.
부모님과 우리 형제 3남 3녀 가족도 모두 해운대 내 숙소에 모였다. 미국에 있는 큰 여동생 가족만 빠지고 부모님을 포함해 총 22명이 내 숙소에서 함께 새천년을 맞이하기로 했다. 오피스텔 20층에서 내려다본 해운대는 말 그대로 ‘사람의 물결’이었다.
2000년 1월 1일 아침. 흐린 날씨 탓에 일출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출 시각을 훌쩍 넘긴 시간, 수평선 위 구름 사이로 붉은햋빛이 잠시 스치듯 비쳐 올랐다. 그 순간 사람들은 환호했고, 새로운 천년을 향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었다.
그때 나 역시 소망을 간절히 빌었다.
부모님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기술사 시험 합격.
94년, 첫 도전을 결심하다.
기술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과장으로 승진하던 해, 향후 차장·부장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역량’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건축공학을 전공했고 국내외 현장 경험도 쌓아 응시 자격은 충분했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위기감도 있었다.
당시 나는 화학 플랜트 현장에서 건축과장으로 일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위해 퇴근 후 사무실에 남아 전공과목을 정리하고, 수험서의 예상 문제를 손으로 직접 풀어보며 공부했다. 몇 달이 지나자 공부 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퇴근 후 숙소에 가지 않고 사무실 소파에서 잠들어 새벽에 다시 책상에 앉는 날도 많았다.
회식 자리는 거의 빠졌다.
“야근을 해야 합니다.”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공부를 위해였다.
나는 첫 시험에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마음으로 10개월을 온전히 쏟아부었다.
첫 번째 시험, 그리고 예상치 못한 낙방
당시 기술사 시험은 서울에서만 치를 수 있었다.
시험 이틀 전, 동료와 함께 서초동 리버사이드호텔에 숙소를 잡고 최종 정리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험 전날 밤. 지나친 긴장 때문인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8시, 용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험이 시작됐다.
기술사 필기시험은 이공계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시험 중 하나다. 오전 시험 100분 2과목 오후에 200분 2과목 하루에 4과목에 용어 설명 100분의 시험 5과목에 500분 시험이다.
A4 용지 50매 분량의 답안을 손으로 시간 내 작성해야 한다
잠을 거의 못 잤지만 “공부한 만큼 나오겠지.”라는 자신감으로 온 힘을 쏟아 답안을 작성했다.
두 달 뒤 발표 날 불합격이었다.
그러나 내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합격 기준은 평균 60점인데 내 점수는 58.5점.
나중에 알았다. 기술사 시험을 열심히 한 수험생의 점수는 57.5~59.5점 사이에 가장 많은 낙방자가 몰린다는 것.
열심히 해도, 문제가 요구한 답안지 방식이 맞지 않으면 불합격이라는 현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실망감이 컸고, 그 후로 몇 년간은 공부할 의욕이 사라졌다.
그때 했던 공부로 두 번 더 응시했지만 역시 낙방했다.
노력과 결과의 간극은 한참 동안 괴로웠다.
새천년의 결심, 합격될 때까지 한다.
그러던 중 맞이한 2000년. 새천년의 해를 보며 다짐했다.
“올해 반드시 기술사 합격한다.”
당시 나는 해양수족관 현장소장 업무로 바빴다.
그럼에도 원칙을 세웠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공부하는 날로 정해서 퇴근 후 숙소에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였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던 시기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갔다.
현장에서 업무를 마친 뒤 다시 책을 펼치고, 반복해서 쓰고 외우고 또 정리했다.
회사의 기술사 응시자에게 제공되는 3개월 유급휴가도 받지 않았다.
나는 현장을 지키면서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드디어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았다.
현직 현장소장이 기술사에 합격한 것은 당시 회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 감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시험은 운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사람들은 종종 “운이 나빠서 떨어졌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과 실력의 차이는 결국 ‘준비의 깊이’다.
공부한 만큼 보이고, 준비한 만큼 쓸 수 있다.
기술사, 각종 고시, 고급 공무원 시험 모두 마찬가지다.
철저한 계획, 반복 학습, 실전 감각, 꾸준함. 이 네 가지가 합격의 절대조건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역시 필수다.
낙방을 겪지 않은 합격자는 거의 없다.
그 실패를 견디는 사람만이 결국 끝까지 합격의 길로 간다.
30년 전의 공부가 지금의 나를 만든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공을 위해 각종 시험의 합격이나 부의 증대를 위한 투자에서도 철저한 준비와 꾸준한 노력과 분석으로 오랜 준비와 반복된 학습을 통해 합격을 하고 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
나는 25년 전에 받은 기술사 자격으로 지금도 감리 실무에서 자격증으로 현역과 같은 전문가로 일을 하고 있다.
기술사는 단순한 자격증이 아니라 전문가로서의 신뢰, 사회적 인식, 금전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삶의 기반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형설야공'의 정신으로 공부했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값진 자산이었다.
내가 배운 것은 단 한 가지다.
"불투명한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늘의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새천년의 새벽, 해운대에서 잠시 비친 붉은 햇살처럼 간절함은 결국 길을 밝힌다. 그날 품었던 소망은 나의 오늘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