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흔이 되기 전까지 영양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건강하기도 했고 돈도 없었다. 영양제 살 돈이 있으면 쌀이나 반려견 사료를 샀지. 아니면 소주를 샀을까. 어쨌든 영양제를 한 움큼씩 먹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종류도 너무 많고 말 그대로 건강보조제이므로 어떤 효과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꾸 먹는다. 먹어야 안심이 된단다.
엄마가 계속 영양제를 권했지만 사양했었다. 선물이 들어오면 다시 선물했다. 먹기 싫었다. 밥 잘 먹으면 되지. 그런데 나는 밥도 잘 안 먹는다. 그게 문제였다. 엄마는 늙어서 후회한다고 협박했다. 자신도 마흔이 되기 전까지 생생했다고. 슬슬 영양제에 손이 간 건 최근이었다.
이틀 정도는 밤샘 작업을 해도 거뜬했던 내가 하루 밤새웠다고 체력이 바닥났다. 소주 한 병은 우습게 마시던 내가 소주 반병에 숙취를 겪고는 소주에 항복했다. 타이핑을 많이 해서 그런지 손가락이 자주 결렸다. 손가락 마디마다 파스를 붙이거나 테이핑을 했다. 딱히 운동하지 않아도 전반적으로 불만 없는 신체였다. 그런데 마흔, 그 선을 딱 넘으니 몸이 흐트러진 게 느껴졌다.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다. 비타민, 오메가3, 칼슘, 마그네슘, 철분, 홍삼…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잊어버리는 날도 있지만, 눈에 보이면 무조건 먹고 본다. 밥을 안 먹어도 뭔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소주 세 병은 먹을 것 같다. 마라톤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묘한 가스라이팅은 뭘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가 반찬을 보냈다고 연락했다.
“무슨 반찬?”
“뭐, 김치하고 파무침하고 갈치 조림하고. 잘 먹어야지.”
“요즘 잘 먹고 있어. 걱정하지 마.”
“니가? 별일이네. 음식을 해 먹는다고?”
“아니. 영양제로 연명하는 중.”
“염병하네.”
“영양제로 연명하는 게 염병하는 거야? 언제는 영양제 좀 먹으라며.”
“밥을 우선 잘 먹고 그걸 먹어야지. 후식처럼.”
“그럼 배가 너무 불러. 안돼.”
“염병.”
엄마는 비속어나 은어 같은 말들을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다. 진짜 화가 날 때는 못 하고 유머가 필요한 순간에 부려놓는다. 내가 하면 욕 같이 들릴 말들인데 엄마가 하면 웃기다. 그래서 엄마의 염병이 좋다. 그 말에는 ‘영양제를 먹는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라는 뜻이 담겼다. 그 정도는 파악하는 게 부모 자식 간이지. 그게 바로 혈연어.
엄마의 기똥 찬 해석으로, 나는 ‘영양제로 연명하는 염병’ 중이다. 사람이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한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난 건강해. 난 괜찮아. 내겐 영양제가 있어. 영양제를 먹고 물을 먹으면 내 위는 이미 부르다. 한참 뒤에 위가 가벼워지면 밥을 먹는다. 물론 나도 알지.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거. 그런데, 답 알고 사는 사람 어딨어. 겪어봐야 알지.
타이핑을 많이 해서 손가락이 아픈 줄 알았는데, 인바디 결과에 골밀도가 떨어졌다고 나왔다. 왜 이렇지? 나 칼슘 먹는 여잔데? 라고 말했더니 사람 현혹하는 말을 들었다. 일반적인 권장량은 건강한 사람 기준이고요, 특정한 곳이 안 좋은 사람은 권장량보다 더 먹어야죠. 음, 물론 의심스러웠다. 뭐든 지나쳐서 좋은 거 못 봤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건강관리사였다. 어디서 주는 자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신뢰는 갔다.
나는 당장 칼슘제를 두 알씩 먹기 시작했다. 안돼. 벌써 늙을 순 없어. 열심히 먹었다. 놀랍게도 손가락이 안 아프다. 어머, 신기해! 근데 왼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골밀도가 손가락은 올라가고 무릎만 떨어질 수 있나? 그 관리사한테 물어보면 세 알씩 먹으라고 하겠지? 약국에 가서 물었다. 칼슘제 복용에 관해. 그랬더니 그 관리사처럼 말했다. 두 알씩 드시라고. 오, 사기꾼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던 찰나 건강 관련 책을 보게 되었다. 모 한의사는 영양제를 먹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 내 성격대로 아무도 믿지 말자. 직접 부딪혀서 알아내자.
일단 심리적 안정에는 효과가 있다. 그건 아마 밥을 골고루 잘 먹어도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내가 영양제를 먹고 있다는 게 안심이 되곤 한다. 지속해서 먹고 있지만 몸에 효과가 있는 건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도 끊을 수는 없다. 대신에 영양제와 적당히 합의했다. 지금은 커피를 줄이고 식후에 칼슘제 한 알만 먹는다. 오메가3는 저녁에 먹는다. 피와 뼈. 그것만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슬슬 어디가 아파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겠지. 그 나이에도 영양제로 연명하는 염병을 하고 있을까 봐,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조율하고 있다. 밥을 규칙적으로 먹고 매일 산책하고 좋은 생각하는 걸 첫 번째 루틴으로 정했다. 눈가에 주름은 이미 졌는데, 사십 년 넘게 쓴 내장기관이라고 안 늙겠나. 늙으면 늙는 대로 더디게 살면 되지.
엄마가 또 반찬을 보냈다.
“엄마, 이번에는 왜 생선이 없어?”
“너무 비싸고 물건도 안 좋더라고. 왜, 생선이 먹고 싶나?”
“아니. 골고루 먹으라며.”
“괜히 미안해지네. 다음에 꼭 보낼게.”
“응. 그럼 그때까지 영양제로 연명하고 있을게.”
“염병하네.”
그렇게 말한 엄마는 눈 영양제 때문에 시력이 좋아진 것 같다는 말을 내놓았다. 엄마가 먹고 있는 영양제는 뭐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만만치 않았다. 엄마도 영양제로 연명하고 있는 걸까? 엄마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건강을 챙기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싫어하는 화법이다. 엄마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늘 말했거늘. 엄마, 엄마는 엄마 건강을 위해 영양제를 먹는 거야. 나는 내 건강을 위해 먹는 거고. 오케이? 잠잠 듣고 있던 엄마가 또 농담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니 말이 맞다.”
음…. 나는 엄마가 진지해지면 연민이 생긴다. 슬프다. 그래서 웃긴 엄마일 때가 좋다.
“엄마.”
“왜.”
“피차 늙어가는 처지에 영양제로 길게 연명해 봅시다.”
“염병하네.”
그래. 그렇게 끊어야지. 대화는 기분 좋게.
대화는 그렇게 끊었지만, 영양제는 이제 끊지 못할 것 같다. 이미 의지에 확신이 생겼고, 그걸 먹는 게 내 건강의 디폴트가 되었을 것이고, 끊으면 닥칠지도 모르는 증세에 공포마저 얻었다. 이제 나는 영양제 중독의 길에 들어섰다. 뭐든 처음 연결되는 게 어렵지, 중독은 쉽다. 그래도 술과 커피는 이별할 수 있을만큼 중독이 아니니까 괜찮은 길이라고 본다.
아직 최고의 소설을 쓰지 못한 것처럼, 아직 최악의 몸이 되어보지 못했다. 그 두 가지를 경험하는 데 필요한 건 영양제? 아니다. 악착같이 연명하는 것. 염병이면 어때. 살아있는 게 중요하지. 밥이든 영양제든 잇몸 성하고 소화 잘 될 때 먹어놓자. 똥이 될 지언정 남 주는 거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