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심리학책이 유행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알고 싶어 한다.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다.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더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무엇보다 심리학은 생각과 관련이 있다. 심리학책을 읽으면 나의 과거와 현재가 대입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틀린 답을 찾는다. 사실, 대부분 틀렸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더 나은 관계와 미래를 위해 심리학에 매몰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연구팀에서 커플들을 대상으로 관계에 관한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인터뷰에 앞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인터뷰하고 난 커플은 상대방 혹은 관계에 대한 생각이 인터뷰 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생각은 생각할수록 바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말고 살아야 할까.
나는 관계에 종속된 젊은 날을 보냈다. 버림받은 게 싫었고 이별에 두려움이 있었다. 스스로 을의 처지가 되었다. 을이 되어서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다. 친구나 애인이었던 사람들은 점점 갑이 되어갔다. 내가 그들을 갑의 위치에 두었으니 그들은 죄책감 없이 관계에서 권력을 누렸다.
관계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아예 세속을 버렸던 8년. 그 시절이 나를 살렸다. 인간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세상이 다시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보였다. 수십 년 방치되어 꼬질꼬질한 내가 삶의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애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웠다. 책을 읽어주고 글을 쓰게 했다. 갑을이 없는 세상에서 지낸 8년 동안 그 애는 성장해서 작가가 되었다.
현재는 냉정하다는 말을 곧잘 듣곤 한다. 소위 말하는 ‘손절’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 어떤 관계도 나를 무너뜨릴 만큼 소중하지는 않다. 하나의 관계가 사라져도 내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경험도 했다.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고 살아도 나쁠 것 없었다. 그러니 관계가 주는 압박이나 두려움이 이제는 없다. 특히, 관계의 흐름이 갑을처럼 느껴진다면 손절의 속도는 빨라진다.
대신 손절할 때 나름의 절차가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손절하는 이유나 그 사람이 나를 대한 태도 등에 관한 증거를 남겨둔다. 증거재판주의? 법정에서만 증거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경험들은 다 쓰지도 못하겠다.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피해자를 역으로 궁지에 몰아 벼랑 끝에 세우는 게 일도 아니었다. 다시는 억울한 사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절 전에 증거를 마련해 둔다. 손절 증거 파일이 따로 있을 정도다. 메시지 캡처나 통화 녹음은 기본이다. 물론 그것들은 비상용으로 보관한다. 상대방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면 쓸 일이 없다.
증거 보관 후 손절하고 나면 돌아보지 않는다. 미련, 후회 따위 없다. 물론 떠나간 관계를 애도하는 시간은 갖지만, 빠르게 내 일상을 찾는 편이다. 그리고 다른 관계에 집중한다. 아무 문제 없다.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진다. 모든 관계는 그저 일시적이다. 백 년을 산다고 백 년짜리 관계가 있을까. 다 시절 인연일 뿐이다. 인간관계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심리학을 꽤 오래 공부했었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주, 팔자, 관상까지. 세속을 버린 8년 동안 했던 공부들이다. 이후에는 그 책들을 보지 않는다. 많은 도움을 받기는 했다.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깨달음은 ‘생각하지 말자’였다. 심리학은 질문을 던진다. 생각을 부추긴다. 회귀하게 한다. 내가 다시 세상에 나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유영하는 한 그것들은 방해가 된다. 손절에도 영향을 준다.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멈칫하게 한다. 사람을 흔든다. 결국 나는 예전의 내가 될 것이다. 싫다. 그래서 심리학을 버렸다.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한 관계라면 애초에 부정적이다.
인간의 뇌는 두 가지로 작동한다. 자동적, 의식적. 음식을 입에 넣으면 자동으로 턱관절이 움직이면서 저작 활동을 하는 것, 지하철을 탈 때 당연하게 요금을 지불하는 것, 엄마한테는 반말하지만 비슷한 나이의 타인에게는 높임말이 나오는 것, 사랑스러운 아가를 보면 미소가 생기는 것들은 다 자동화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의식적인 작동이다. 특정한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나 행동,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과 식단 등은 의식적인 작동으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이것을 인간관계에 접목하면 간단하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많다면 그때부터 골치 아픈 관계가 된다. 전화기가 울리고 번호를 확인했을 때 받을까 말까 고민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손절의 이유가 생긴다.
어떤 사람의 가치관이나 인생 항로를 무작정 따라가는 건 위험하다. 손절하면서 아프지 않은 지금의 상태가 되기까지 나는 뼈아픈 시기를 보냈다. 뼈까지는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체득한 경험이 선택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나와 달라서 모든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축하하고 존경한다. 그 사람은 문제없으니 계속 그렇게 살면 된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노파심에, 손절이 답이라고 생각할까 봐 덧붙여 말해 본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만나면 자동으로 미소부터 나오는 사람. 잦은 연락이 없어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대상. 그런 관계만 유지해도, 억지 관계에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만 줄여도 일상이 더 풍요로워진다. 언제나 부족한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계속 부족한 사람으로 남는다면, 누구든 나를 손절해도 무방하다. 나는 손절할 준비, 손절 당할 준비가 되어있다. 인생도 사람도 떠나봐야 보이는 것들이 많은 법이다.
"한 인간을 알기 위해서 때로는
그를 떠나볼 필요가 있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
(오스트리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