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과 선비의 유래와 신라 화랑, 그리고 재팬열도 사무라이에 대하여
조선왕조시대는 시대적으로 우리와 가까와서인지 많은 부분이 친숙하고 알고있다.
그 중 선비라고 하면 모두가 그 뜻을 알고있는 그 선비이다.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 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바ᆡ’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한자어 사(士)의 출발을 알아보면 그 원초적인 모습이 조선왕조의 선비에 와닿는다는 데 놀라움을 또 느낀다.
이하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임건순 저>에서 대부분 인용했음을 밝힌다. 필자의 인생서 중 하나로 이 책 하나만 있으면 차이나 사상인 유교, 도교, 법가 사상 등을 해설한 다른 모든 서적은 갖다 버려야 할 정도로 일당백의 정수만 모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사(士)는 원래 계급이었다.
주나라가 실시한 봉건제에서 주나라는 제후들에게 영지를 봉해 주었다.
이때는 왕(王)이 주나라 왕 하나 뿐이었다.
따라서 각 제후들은 공(公)으로 불렸다.
춘추오패로 불리는 제환공, 진문공 등이 이것의 사례이다.
공(公)의 밑에는 대부(大夫)이다.
공(公)은 사실상 왕(王)인데, 왕실을 의미하는 공실과 대부의 대결이 춘추시대 중기 이후의 볼만한 양상이다.
즉, 대부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군주의 지위와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춘추오패 중의 하나인 진나라를 나눠먹은 한/위/조 세 대부가문이 있고, 춘추오패 중에 첫번째 패권국인 강태공의 제나라를 전씨의 제나라로 만든 전씨 가문이 있다.
대부를 공권력인 공실과 대비하여 사가(私家)라고 하는데, 공실과 사가의 대립은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이고 주제이다.
대부(大夫)는 제후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던 국정 파트너이다.
보통 제후의 친인척 출신 대부를 동성同姓 대부, 제후가 새로 포섭해 귀족으로 편입한 실력자를 이성異姓 대부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제후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경대부는 조정에서 국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막강한 실력자였다.
대부는 제후가 봉해준 땅으로 파견되어 자신이 관할하게 된 영지를 다스리기도 하고 제후가 거주하는 성에서 제후와 함께 국정을 이끌어가기도 했는데, 독자적 영역과 실력을 확고히 구축한 대부의 세력이나 그의 영지를 가 또는 사가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 내에서 군사적, 경제적 힘을 키워 제후에게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라의 새 주인이 되거나 각국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희생되기도 했는데, 춘추시대 중기부터는 제후에 맞서 치열하게 실력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후와 대부의 싸움으로 인해 대외적 갈등 못지않게 대내적 갈등이 심했다.
제후가 천자의 말을 듣지 않고, 대부가 제후의 말을 듣지 않으며, 또 대부가 부리는 가신이 대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하극상이 극심했다.
이러한 하극상과 대내적 갈등을 일찍이 종식하고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나라들이 전국시대에 강자로 등장했다.
반면에 내부 갈등을 제대로 봉합하지 못하고 중앙집권화에 실패한 나라들은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라고 하면 우리는 선비를 떠올리며 지식인을 우선 생각하는데, 사는 본래 무사였다.
'사관학교'나 군대의 '사기'같은 말에 원래 뜻의 편린이 남아 있다.
전쟁에 대부가 장수로 나선다면 사는 직접 활과 창을 잡고, 요즘으로 치면 장갑차에 해당하는 수레를 몰면서 싸우는 하급 무사였는데, 대부가 지휘관 내지 간부라면 사는 부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후 신분인 공公에서 대부가 나왔듯이, 사 역시 대부의 혈족 또는 자손이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그중 종법제)에 따르면 적장자만이 아버지의 특권과 지위를 세습 했다.
그 중 공의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대부가 되고, 대부의 아들 역시 장자만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고 나머지 아들은 사가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사는 갈수록 늘었는데, 이들은 주로 무사로서 전쟁 일선에 나섰고 평소엔 국인으로서 대접받았다.
'국'은 오늘날과 같은 영토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제후와 귀족이 사는 성이다.
전쟁과 제사 공동체로서 같은 조상을 모신다는 유대감을 가진 귀족의 협소한 공간이었다.
사 는 좁은 국國에 사는 국인(國人)이었고, 대부만큼의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진 못했지만 국인으로서 정치적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통일된 목소리를 내면 대부와 제후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춘추시대 말엽부터 국은 성 밖에 사는 사람들까지 병사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점차 사士는 하급 무사로서의 위치가 애매해지게 되었고 존재의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기회도 찾아왔다.
모든 나라가 국력 극대화 경쟁을 벌이면서 유능한 관리나 통치 전문가를 구하지 못해 난리가 났는데, 사士는 그러한 인력 수요에 흡수되면서 수레와 활, 창을 버리고 지식인으로 변신해갔다.
부사관이나 하급 무사로서의 옛날은 잊어라. 이제 대부 못지않은 특권과 명예를 누릴 기회가 왔다.
시대적 분위기와 열망이 그랬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맞다.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대부분이 이들 사士 계급에서 나왔다.
이들은 각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부국강병책을 부르짓고 다녔다.
이 부국강병책을 이용하여 실제로 강국이 된 나라들이 속출하자 각 나라들은 이들을 유치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이들을 '유세객遊說客'이라 불렀다.
그 유명한 공자가 유세객이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제후들만이 이들 유세객들을 반긴 것이 아니다.
재산가나 유력가도 이들 유세객들을 유치했다.
제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또 제후를 넘보기 위해서.
그래서 나중엔 재산가나 유력가가 유세객들의 일차 관문이 되었다.
유세객이 요즘으로 치면 오디션을 보는 것인데, 예선 심사를 이들 재산가나 유력가가 하는 것이다.
유세객들이 넘쳐나서 제후가 일일이 오디션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공자와 맹자의 유가사상이 춘추전국시대에 인기가 없었음은 잘 알려지기도 하고 잘 모르기도 한 사실인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맹자-맹자>는 맹자가 위나라의 수도 대량에 들러 양혜왕 앞에서 오디션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묻는다.
"선생께서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내 나라에 와주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큽니다."
그러자 맹자는 정색을 하면서 말한다.
"왕께서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그저 인仁과 예禮가 있을 뿐입니다."
맹자가 활약(?)한 전국시대는 백성은 사육되고 길러지는 존재로 치부되고 약육강식의 살벌한 법칙만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오늘 내가 이 나라의 군주를 하고 있지만, 내일이면 한 줌의 고기밥이 될 수도 있는 판국에 이런 한가로운 소리를 하니 어느 군주가 이런 유가사상가들을 오디션에 합격시키고 나라의 재상을 맡기겠는가?
하지만, 제후를 제외한 나머지 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맹자는 정확히는 전국시대 중기의 학자였는데, 이때쯤에는 중앙집권화가 완성이 되고 각 나라의 귀족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사병도 몰수당하여 장차 자신들의 계급이 없어질 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무소불위가 되어 가고 있는 왕권을 어떻게든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대안은 유교로 구체화되어 익히 우리들도 알고 있다.
바로 왕도정치王道政治인데, "왕이 선정을 펼치면 그것으로 천명을 받아 천하통일할 수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말은 맞는 말인데, 여기에는 무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왕이 선정을 펴지 않으면 하늘이 천명을 거두어 간다는 것이다.
즉, 군주의 목숨은 파리목숨이 되는 것이다.
한나라가 유교를 국시로 채택한 이래로 동아시아 역사에 피비린내를 몰고온 모든 역성혁명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이 천명사상이다.
그렇다면 이 <선정>이 대체 무엇이냐가 중요할 것 같다.
이 선정을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그 선정으로 한다면 천명사상이 특별히 나쁘거나 낡아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정>이란 것을 왜곡시켜 <귀족들을 대변하는 정치>로 망쳐 놓았다는 것이 유학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유학이 동아시아를 망친 주범 취급을 받고 전근대적인 봉건적 사상이 된 것이다.
맹자의 유명한 <성선설>이 바로 그렇다.
"사람은 날 때부터 선하게 태어난다"로 요약되는 성선설은 일반인민과 지식인이 달리 적용된다.
<맹자-양혜왕상편> 『일정한 생업(항산)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착한 마음(항심)이 유지되는 것은 오직 선비士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지식인은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일반인민은 생업 기반이 안정되어야만 항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항산을 마련해 주고 나서 효孝와 제弟의 덕목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교육은 언제나 항심을 가지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이 담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맹자는 이렇게 일반인민과 지식인을 구분했다.
그 도덕적 감성과 이성을 잘 키워서 확충할 수 있는 사람은 지식인뿐이므로 지식인이 관료가 되고 군주와 일반인민의 스승이 되어 세상의 중심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봉건적인 신분제를 옹호한 사상이 유교이고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이렇게 흘러갔다.
이 특별한 지식인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신분을 맹자는 <군자君子>라고 했다.
우리가 조선왕조의 모습으로 알고있는 모든 퍼즐이 이렇게 맞춰지는 것이다.
이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인 것이다.
필자가 맹자를 주로 언급하는 이유는 맹자가 그들 사士 계급의 본모습인 무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기 때문이고 그것이 조선왕조의 선비의 모습과 중첩되기 때문이다.
즉, 조선왕조의 선비가 이상적으로 추구한 인간형이 바로 맹자이다.
<맹자-등문공하편>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한다. 뜻을 얻었을 때는 인민과 더불어 선을 행하고 뜻을 얻지 못했을 때는 홀로 도를 행하며, 부귀도 그를 유혹하지 못하고 빈천도 그 지조를 꺾지 못하며, 위협과 무력도 그 뜻을 꺾지 못하는 사람이 대장부다.』
우리가 흔히 <사내대장부>라고 하는 맹자의 대장부론이다.
이를 보면 조선왕조의 선비는 칼 대신 붓을 든 <선랑(仙과 郞)>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임금에게 대들던 조선왕조 대신들의 모습을 보라.
비록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라지만.
선비의 어원은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선랑(仙과 郞)>의 역사 공부를 해온 우리에게는 적어도 선비의 선이 仙일 수 있다는 강한 암시를 받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어디까지 대들 수 있나하는 극한의 모습을 <맹자-맹자>에서 찾아보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다.
참고로 저 당시의 전국칠웅의 왕은 조선왕조같은 허수아비 왕도 아니고 요즘으로 치면 절대군주인 북한의 김주석이나 차이나의 시주석 앞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면 제격일 것 같다.
<맹자-등문공하편> 『제 선왕이 말했다.
"탕 임금이 걸桀을 내쫓고 무왕이 주紂를 정벌했다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전해오는 책에 있습니다."
제 선왕이 되물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해도 되는 겁니까?"
맹자가 답했다.
"인명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자를 그냥 한 사내(一夫)라고 합니다. 한 사내(一夫)에 불과한 주紂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