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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빛 Nov 04. 2022

나 홀로 육아

독박 육아 생존기


지난 10년 동안,

나는 슬퍼하거나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충분한 위로를 주고 보태서 위로를 받기까지 할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을 겪어냈다.

'애 아빠는 애 둘키울 동안 기저귀 두 번 갈아준 게 다야.'

이 말 한마디면 상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말이 되냐고. 혹시 뻥 아닐까. 과장이 있겠지 등등..


나는 임신기간과 출산과정에서도 난이도 별 다섯 개를 찍었고, 설마 이보다 더한 어려움은  없겠지 했지만 철저하게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남편의 직장 역시 난이도 별 다섯 개였기 때문이다. (조금 그의 편을 들어보자면, 그 회사는 정말... 사람을 들들 볶아댔다. 야근을 밥 먹듯 시키고 사람의 진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설렁설렁 다닐 수도 있었겠지만 , 그는 그럴 성격이 아니었고 회사일에 올인하고 싶어 했다.

돌쟁이 큰아이를 안고 제발 좀 육아를 같이하자고 일 년 가까이 매달렸지만 그때마다 번복되는 다툼에 지쳐가는 것은 나였다.

 그는 확실한 업무분장을 원했고, 나는 그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끝내야 했기에.

 우리 가정의 평화는 그렇게 불공정 조약에 의해 지켜져 왔다.


힘든 회사에 다녀와서 주말 늦잠을 자거나,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주말 동안 집을 비우거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니 방안에 처박혀 게임만 하루 종일 하더라도

나는 우는 아이 달래 가며 삼시세끼 차려가며 젖먹이고 집안일하고 밥 먹이고 재우고 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어금니 꽉 깨물며 되뇌었다.

'남편아 니 죄는 다 너에게 돌아가리라. 다 네가 선택한 거야. 나쁜 놈'


주변의 집안일에 육아까지 다 잘하는 남편들 보면 너무 내가 초라해지는 느낌이라

동네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지냈다.

 어슬렁어슬렁 걷던 나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앞만 보고 옆을 보지 않는 빠른 걸음으로 바뀌었고,

동네에 아는 사람이 몇 없다 보니 웬만한 사람 소리에 둔감하게 되었다. 나를 부를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나의 사회성은 말 못 하는 아기 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점점 퇴화되어갔고,

그렇게 나는 세상과 조금씩 더 멀어져 갔다.


나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당뇨질환을 앓고 계셨다.

그리고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뇌졸중으로 쓰러져 대수술을 하셨었고,

대학교 3학년 때 한번 더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따로 없었다. 병원의 모든 과목이 한 몸에 다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까지 이겨냈다. 하루에 꼬박꼬박 아침 점심 운동을 하고 끊임없이 재활에 힘쓰고 지금은 너무 멀쩡하게 잘 걸어 다니시고 글씨도 곧 잘 쓰신다.

마치 기적처럼.

그는 내가 보아온 중 가장 의지가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다.

 그랬던 아버지가 둘째가 두 살 정도 되던 해에 위암판정을 받았다.

두 아이들과 봇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병간호에 들어갔다.


한 달 반 정도 병간호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또다시 쳇바퀴도는 독박 육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두 아이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어두운 방을 지나 복도를 지나 현관문을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리 죽여 삼켰을 때 그 온도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처절했고, 슬펐으며, 답답했고 여기는 어딘 지도 모르는 새로운 우주였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커갔고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으며, 대화라는 것을 하며 일상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흘렸던 그 눈물은 이렇게 함께 즐길 줄 알게 되라고 예열 차원에서 그리도 뜨거웠나 보다.

우리는 전우애 가득한 그런 끈적하고 깊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눈물 한번 흘리지 못한 사람은

즐기고 함께하는 데 있어서 깊이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늦은 후회를 한다 해도 되돌이킬 수 없다.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버스는 떠났고, 그 버스는 회차 버스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힘들고 또 힘들고 어렵고 산 넘어 산이었던 나의 육아는

아직도 온고잉이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힘든 시기를 꼭 겪고 지나야 사골육수 뽀얗게 우러나오듯 진국이 되는 거라고.

진심으로 그 시기를 열심히 지나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은 따로 있는 거라고.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끝까지 엄마를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놓치지 않아 주고 붙잡아주고 행복해해 줘서.


그리고 남편에게도 감사한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함께해주고 마음을 내어줘서.

앞 차는 놓쳤지만, 뒤늦게라도 온 다음 차를 탑승해줘서.


우리 가정의 이야기는 온전히 해피엔딩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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