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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우 Sep 03. 2024

한여름 밤의 일기

43년 전 군대 생활 중 잠시 틈을 내어서 적은 일기

43년 전의 빛 바랜 일기장


   [한여름 밤의 일기]

한 줄기 소나기가 지나가고 맑게 갠 한여름 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인다. 답답해서 문을 박차고 나가 시원한 공기를 깊이 들어마신다. 밤하늘에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자리가 유난히 눈에 띈다.
어릴 적 한여름 밤이면 마당 한가운데 모캣불을 지펴 놓고 동생과 평상에 드러누워 밤하늘 별자리를 찾으며 서로 먼저 찾았다고 우기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늘 북두칠성은 대문 옆에 우뚝 서 아직 익지 않은 풋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감나무 가지에 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밤짐승 울음소리가 나면 무서움에 질려 스르르 방으로 기어들곤 했다.
밤이면 동네 아이들과 수박이랑 참외 쓰리를 해서 멧부리에 숨어서 정신없이 먹어 치우던 주옥같은 추억들이 그립다.

유성이 밤하늘에 꼬리를 치며 휙 지나간다. 알퐁스 도데의 별 이야기에서 목장에 온 아가씨가 소나기로 물이 불어 돌아가지 못하고 목동의 등에 기대어 쌔근쌔근 잠이 들었을 때 황홀해진 목동은 두 눈을 부릅뜨고 분명히 내가 보고 있는 저 별들을 헤아리고 있었으리라.

남북으로 길게 은하수가 흐르고 있다. 저 은하수 속에는 꿈속의 요정들이 수정같이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겠지. 북두칠성의 국자로 은하수 한 바가지를 마시고 세속에 물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볼거나.

이제 시내도 완전히 잠이 들었다. 어둠에 묻힌 시내의 어느 한 집에서 반딧불처럼 빠안히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저 불빛 속에는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저렇게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일까? 용마를 타고 청운을 겨냥하려는 한 소년이 졸리는 눈을 비비며 아직도 책상에 앉아 있을지, 아니면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꿈을 밤하늘의 성좌에 새기며 기도하는 소녀가 이 밤을 지새우고 있을지 모르겠다.

괴로운 듯한 차의 비명이 밤공기를 공명하며 지나간다.
아름다운 한여름 밤이다.

                 1982년 7월 안양 석수동의 연대본부에서


대학 2학년을 마치고 1982년 3월 15일에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에서 6주간의 신병 교육을 마치고 통신 특기병으로 자대에 배치되었다가 잠시 연대 RCT 훈련 때문에 안양 석수동의 연대본부에 통신병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시흥에서 군포로 가른 길목의 안양 석수동에 있었던 군부대 앞에는 그 당시 5층짜리 주공아파트가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주변은 모두 단독주택으로 시골 분위기였다. 건너편으로 관악산이 보이는 조그만 야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연대 본부의 위병소 앞으로 1호선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었지만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접근이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와 같았다.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어 사회와 모든 면에서 격리된 군대는 마치 동물원 철장 속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동물의 시각과 비슷한 시대였다.


엄격한 자대의 분위기와 달리 파견병은 통제가 느슨했기에 잠시 센티멘탈해져서 부모형제가 사는 고향을 그리면서 적은 일기이다.  

43년 전, 풋풋한 청년 시절에 적어놓은 일기를 읽어보니 미묘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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