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을 배우고 정에 소속된 지 꼭 1년이 된 10월이다. 소속 활터(정)의 개정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다. 이순신 장군이 수련한 한산정에서 2 순을 놓는 기회가 마련됐다. 개인은 사용할 수 없는 활터인데 단체여서 신청 가능했단다.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에 도착하여 먼저 예를 갖춘 곳은 제승당이다.
제승당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을 이룬 후 지어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고(1593~1597) 제해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사적지다. 1963년에 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1975년 확장 보수하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영당과 유허비, 송덕비, 사정 등 부속시설이 단장되어 있다. (Daum 제승당관리사무소 발췌)
제승당에서 예를 갖출 때 소매가 없는 한복 형태의 옷을 입었고, 한산정에서 활을 놓을 때도 몇은 입었다. 아마 무사복인 듯하다. 한산정은 바다 위로 저쪽 산 자락에 2개의 과녁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활을 연습하던 곳이다. 활을 배우는 초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전해오는 무게감은 엄숙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한산도에 도착할 때 하늘도 바다도 잿빛이었다. 40여 명가량이 조를 편성하여 한 발 씩 발시하는 동안 응원과 웃음과 소요 속에서도 하늘과 땅은 내내 은빛이었다. 우기에 도착한 면도 있지만 왠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아픈 역사터가 아닌가.
화살을 수거하고 제각기 장비를 챙겨 돌아 나왔다. 내내 참아주던 날씨는 돌아오는 동안 찬 바람을 몰아쳤고 잠시 빗살이 보이기도 했다. 장군이 보내시는 또다른 환영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10개의 화살 중에 겨우 하나 과녁을 맞히는 느낌을 가졌다. 국궁이 스포츠로 발달하였지만 엄연한 무도다. 자신과 민족을 지키기 위한 무예였으니 얼마나 묵직한 도구인가.
'이순신 장군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쟁인 임진왜란, 그 7년간의 전쟁 속에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였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뿌리재 뽑혀 쓰러지려는 조선 왕조와 죽어가는 백성을 구했다.'
(Daum 제승당관리사무소 발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높은 누각)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할 적에
어디서 풀피리 소리는 남의 애간장을 끊느니'
-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진중에서 다가올 국난을 걱정하며 읊은 시조 - (Daum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