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쳤지. 미쳤어. 미친년이야. 정말.
김여사가 싱크대 앞에서 중얼거리며 서 있다. 김여사는 마트에 장 보러 가서는 고기보다 맥주를 먼저 집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맥주와 소주를 넣었다. 쌀을 씻어 밥통에 앉히고 되재고기와 김치를 볶았다. 쌀뜨물을 붓고 가스불을 켰다. 벽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들이 오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낸 김여사는 식탁으로 걸어가며 한 모금을 마셨다. 마치 앉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몹시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식탁의자에 앉은 여사는 맥주를 마시다 말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바빠?
-아니, 급한 건 아니고. 아휴 정말 나 못 살겠다. 나 정말 어쩌면 좋으니?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민정엄마 알지? 그래, 이 년 전에 우리 딸 괴롭혔던 그 민정이.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나한테 언니, 언니 하면서 그렇게 살갑게 굴더니 그 일이 터지자마자 나랑 인연을 딱 끊었잖아.
김여사가 일어나 캔맥주하나를 가져온다.
-그때 정말 확 돌겠더라. 그래도 지낸 정이 있어서 난 걔가 사과하면 받아주려고 했어. 얘들끼리 그럴 수 있다고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전화는 무슨. 다른 엄마들한테 다 전화했다는데 나만 쏙 빼놓은 거 있지. 어이가 없어서. 날 무시한 거야. 내가 그 정도밖에는 안 된 거라고.
어깨에 전화기를 올려놓고 조미김의 비닐을 뜯은 김여사는 김하나를 집어 먹었다.
-나도 전화 안 했지. 내가 왜? 민정이 때문에 학교 안 다니겠다는 걸 겨우 달래서 졸업만 하자고 했어. 얘들은 얘들이더라. 딸은 나중에는 괜찮다고 했어. 다시 어울리며 놀아대. 그래도 난 용서 못하겠더라고. 우리 딸 필통 던지고 책상에 낙서하고, 아이들 다 보는 앞에서 책가방 쏟아버리고, 화장실 문 앞에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딸의 머리채를 잡았다니까.
-아. 말하다 보니까 또 확 신경질이 나네. 잠깐만.
-어, 아니. 술은 무슨. 물 마시고 있어. 응,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의 어설픈 일진 놀이에 우리 딸이 당한 거지. 예전부터 걔가 말이 많았어.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맘에 안 들면 짜증 내고, 화내고, 친구들 사이에서 나쁜 분위기 조성하는 걸로. 근데 그 엄마는 모를걸. 원래 엄마들은 자기 자식은 잘 모르잖아. 그 엄마도 만날 때마다 자기 딸 너무 순진하고 여려서 걱정이라고 하더라. 집에서는 안 그러지. 그럼.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지만, 밖에서 새다가도 안에서는 안 샐 수도 있잖아.
-아무튼 그 엄마랑 그래서 2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했어. 졸업식 날에도 아는 척을 안 했어. 중학교가 다르니까 이제는 안 보겠구나. 싶었지. 근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정말 못 산다.
김여사가 다시 일어나 맥주를 가져온다. 김여사의 얼굴이 제법 빨개졌다. 냄비에서 찌개가 끓는 걸 확인하고 불을 줄였다. 핸드폰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맥주를 깐 김여사는 벌컥벌컥 마시더니 싱크대 위에 맥주를 올려놓았다. 냉장고에서 대파와 두부를 꺼냈다. 계란 6개를 집었는데 하나가 떨어질 뻔했다. 김여사의 왼쪽 어깨가와 목 사이에 핸드폰이 위태롭게 끼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여사는 능숙하게 대파와 두부를 썰었다.
-오늘 되게 더웠잖아. 그래서 내가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학교에 갔거든. 맞아. 내가 맨날 끼는 레이벤 선글라스. 기다리는 사이 화장실에 갔다 오려고 실내에 들어갔는데 안에서 누가 "언니"하면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거야. 그래서 나도 손을 흔들면서 말했지. "어, 오랜만이야. 어머. 근데 너 너무 어려져서 못 알아볼 뻔했다야. 학생인 줄 알았어. " "어머, 언니도 참 호호호 깔깔깔." 그러면서 지나갔는데, 글쎄 그게 누군지 알아?
-어. 맞아. 민정엄마였어. 2년 동안 쌩까고 살았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선글라스가 잘못이라고? 그래, 실내에서 안 보이긴 진짜 안 보였어. 화장실에서도 내내 얼굴이 빨개지고 진짜 미친년소리가 절로 나왔다니까.
-아이고, 정말. 내가 살 수가 없다. 잊어버리라고? 그래, 뭐 이제 와서 별도리는 없다마는 그래도 너무 창피한 거 있지. 나 자신이 너무 싫다. 나 정말 왜 이럴까?
-어? 뭐라고? 어. 알겠어. 잠깐만 찌개 끓는다. 야야 우리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 조만간 놀러 갈게. 응응 고마워. 들어가.
에러프라이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캔을 기울여 마지막 맥주를 들이켠 김여사는 능숙하게 전업주무모드로 들어가 재빨리 저녁상을 차렸다. 맛있는 취사가 완성되었다는 알람소리에 맞춰 현관벨이 울린다. 김여사가 입을 닦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꼭 안아준다.
"수고했어. 배고프지? 얼른 손 씻어. 저녁 먹자."
부엌으로 들어온 김여사의 눈에 찌그러진 맥주캔이 보였다. 얼른 치우고 돌아서자 아이들이 부엌으로 들어오며 오늘 저녁은 뭐냐고 물었다. 김여사는 검정선글라스와 민정엄마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큰소리로 외쳤다. "김치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