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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연 하나

by 김정준








오래전 일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문단에 데뷔한 적은 없지만 자칭 시인이라고 하시며 시를 쓰시고, 사색하시길 좋아하셨으며, 그림을 즐겨 그리시던 낭만적인 분이셨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서울 모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수석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S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합격했다.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조각처럼 표정 변화가 없던 선생님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거머쥔 것처럼 부러울 게 없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미래에 날개 달고 훨훨 날 아들을 상상하며 흡족해하는지도 몰랐다.


선생님과 가끔 자리를 같이하면 둘째의 대학생활에 대하여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장학금을 받았다, 논문이 학회지에 실렸다, 사회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한다 등.


그러나 내가 외국에 살게 되면서 선생님을 뵐 수 없었고, 둘째의 소식도 대학교 4학년에서 멈춰 섰다.


그 후로 선생님을 만난 것은 7년이 흐른 후였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국에 두 번 방문했지만 단기간 머물렀기 때문에 선생님을 뵐 기회가 없었다.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기 위해 만났을 때, 선생님의 모습은 많이 늙고 수척해 계셨다. 7년이라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저렇게도 외모를 바꾸어 놓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선생님과 나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장황하게 펼쳐놓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상하게 자식들의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선생님이 그토록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당당하게 만들었던 둘째 아들은 지금 어떤 일에 종사하는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불쑥 물어보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아드님들은 다 결혼했겠네요.


둘째 아들의 근황을 듣기 위해 화제를 살짝 돌려놓았다.


다 결혼했지. 첫째는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막내는 한의예과 졸업한 후 한의원을 개원했어.


그러나 둘째에 대한 소식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말씀이 없으시니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둘째 아드님은 무슨 일 하나요?


......


선생님은 약간 당황하시는 것 같더니 ,


둘째는 지금 미국에 있어. 가까운 친척이 LA 사는데 , 거기서 일하며 견문을 넓히겠다고.....


선생님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두 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마도 멀리 있는 자식이 그리워 그러려니 했다.


선생님의 부고를 받은 것은 인사동에서 만남이 있은지 4개월 후였다. 살이 많이 빠지고 기력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의외의 소식이었다. 게다가 연세도 60대 중반이셨기 때문이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7-80대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생님의 빈소가 차려진 대학병원 영안실을 찾아 상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님을 잘 아는 지인도 있었다.


누가 둘째 아들인가요?


빈소 앞에 서있는 상주들을 바라보며 내가 지인에게 물었다.


아, 모르고 계셨구먼. 둘째 아들은 2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지인이 주위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벙어리가 된 듯, 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들이라는 나무가 쓰러지면서 뿌리인 아버지까지 쓰러뜨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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