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시작하기 전 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조차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차를 타고 가기 애매한 집 주변으로 식사를 하러 가자면 교통편부터 확인했다. 걸어간다면 안 가는 쪽을 택할 정도로 나는 완벽한 귀차니즘이었다. 그런 내가 자발적 걷기를 두 달째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걷기를 하면서 깨달았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역발상이 나라는 우주를 어떻게 신대륙으로 인도하는지.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것을 소요(逍:거닐소, 遙:멀요)라 한다. 제자들과 교실 밖에서 소요하며 토론을 즐겼던 아리스토텔레스 사단을 소요학파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걷기의 모토는 '소요'다. 만보기의 하루 총량을 채우기 위한 전투적 걷기는 내게 의무감과 채무감만 남길 것 같다.
오늘은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들이 서로 이어지는 도시에서는 길 가다 마주쳤던 산책길을 다른 길에서 마주치는 일이 일어난다. 차를 타고 지나치기만 했던 도로 뒤편의 거리. 오래된 동네가 낡음과 낙후의 동의어가 아니라 정감이란 생각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걷기는 계절을 탄다. 철 따라 달라지는 냄새, 광선, 나무, 꽃, 흐르는 물의 수위, 온도의 주기를 접하면서 보행자가 세계와 맺는 톤이 변한다.
걷기 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현대문학
땅에 떨어져 고약한 냄새로 존재감을 알리는 은행은 이 계절 눈총 받는 열매다. 하지만 은행의 사연을 듣고 나면 생각이 조금 바뀐다. 은행은 수십 년 자란 암나무에서만 열린다.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으면 손자 때에야 열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년의 시간을 견딘 나무만이 열매 맺을 자격을 얻으니 은행이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
열매 맺는 나무 대부분이 잎보다 열매가 환대 받는데 은행나무는 반대다. 떨어진 은행을 밟을까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땐 땅에 시선이 집중된다. 그때의 나무는 은행을 끊임없이 낙하시키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그러다 이파리가 노랗게 물들 무렵 사람들은 비로소 은행나무 실루엣에 감탄한다. 성탄 트리가 일 년 중 크리스마스 기간 며칠을 위해 존재하듯, 은행나무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계절을 위해 열한 달을 견디는 것 같다.
나무에 영글게 매달린 은행을 보니 잘 익은 살구와 닮아있다. 그래서 은행을 한자로 풀이하면 '은빛 살구'인가 보다. 전 세계에 1종 1속만 있고, 2억 5천만 년 전 지구상에 나타나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이유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에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시인 괴테는 자신의 영원한 연인 마리안네에게 '은행나무 잎'이라는 시와 함께 은행잎을 넣어 연서를 보냈다.
동방에서 건너와 내 정원에 뿌리내린
이 나뭇잎엔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 있어
그 뜻을 아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오.
둘로 나누어진 이 잎은
본래 한 몸인가?
아니면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를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는 걸까?
이런 의문에 답을 찾다
비로소 참뜻을 알게 되었으니
그대 내 노래에서 느끼지 않는가.
내가 하나이며 또 둘인 것을
괴테
둘로 갈라진 은행잎조차 예사롭게 보지 않는 시인의 관찰력과 감수성. 올가을엔 나를 물들게 하는 것을 길 위에서 찾고 싶다. 무뎌진 관찰력과 뭉뚝해진 감수성의 부활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