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뒤지게 처맞아야 사람 구실하는 척이라도 하지
해는 중천에 떴고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다, 찬영은 세상모르고 쿨쿨 잠들어 있었다. 침대 맡 LED 시계에 적힌 시간은 이미 오전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정아야, 오빠가 잘할게. 잠꼬대를 중얼거리는 찬영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휴, 술 냄새. 얘는 왜 아직도 자고 있어?"
침대로 다가가 아들을 흔들었지만 찬영은 꿈쩍도 않았다. 어머니는 주저 없이 찬영의 등짝을 후려쳤다.
"일어나, 이놈 새끼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출근 안 해?"
만사 태평한 얼굴을 보니 부아가 치미는지 어머니는 손바닥으로 아들의 투실투실한 몸뚱이를 북어포 마냥 깎아 댔다.
"이 망할 놈 새끼는 하여간 뒤지게 처맞아야 사람 구실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제야 찬영은 놀라 컥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숙취가 심해 얼굴을 찌푸렸다. 게슴츠레 뜬 눈을 비비다가 별안간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화면엔 17건의 부재중 전화와 무수히 많은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그때 진동이 울리며 '수진 작가'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찬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했다. 촬영은 고사하고 형순 피디에게 피살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만둘까? 이대로 잠적할까? 고소라도 당하면 어쩌지? 온갖 생각이 술기운으로 몽롱한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여보세요?"
"찬영 씨! 미쳤어? 지금 어디야!"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죄송해요, 작가님! 지금 가고 있습니다. 곧 도착해요."
찬영은 전화를 끊은 뒤 씻을 새도 없이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 차 키를 챙겼다.
"아침 안 먹고 가?"
어머니의 외침을 무시하며 찬영은 급히 모자를 눌러쓰고 폭풍처럼 집을 나섰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그는 우당탕 소리와 함께 계단을 굴렀다. 술이 덜 깬 모양이다. 운전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고민할 새가 없었다. 찬영은 술 냄새를 날리려고 지하철 역까지 입을 벌리고 달렸다.
메인 작가 선영은 초조한 얼굴로 조그만 하늘색 레이 차량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차 뒤편엔 촬영 장비들이 쌓여 있었다. 차 키가 없어 여태 짐도 싣지 못하고 있었다. 구석에선 보조 작가 수진이 채준의 매니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팀 막내가 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운전자가 그 친구밖에 없어서…"
"작가님, 이러시면 곤란해요. 저희 채널 스케줄만도 타이트한 거 아시잖아요. 이것도 오전에 시간 쪼개서 잠깐 해드리는 건데."
"네, 알죠. 곧 출발하니까 그래도 10시 전에는…"
찬영이 유리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며 차를 향해 달려왔다. 누가 봐도 자다가 급히 나온 행색에 눈은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다.
"죄송합니다! 피디님, 진짜 죄송합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연신 사과하며 찬영은 트렁크를 열고 허둥지둥 짐을 실었다. 그런 찬영의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깨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자 찬영은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서슬 퍼런 기운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뒤돌아보자, 의외로 침착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형순 피디가 보였다.
"찬영이 괜찮은 거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과장되게 다정한 표정과 말투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성을 잃기 직전에 형순 피디가 사용하는 마인드 컨트롤의 결과물이었다. 그 온화한 수면 아래에는 무자비하게 휘몰아치는 해류와 같은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형순은 세상 평온한 얼굴로 수진에게 물었다.
"얘기는 잘 됐니?"
"네, 화나긴 하셨는데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주실 것 같아요."
"언제까지?"
"10시까지만 도착하면 인터뷰는 가능하시대요. 근데 지금 시간이…."
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판교에서 김포까지 한 시간 안에 주파해야 했다. 형순의 손이 찬영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꽉 움켜잡았다. 통증과 함께 엄습하는 공포로 찬영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형순은 미륵불 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갈 수 있지? 찬영이 운전 잘하잖아."
"네, 갈 수 있습니다!"
찬영의 다급한 외침에 형순은 비로소 그의 어깨를 놓아주고 남은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네 사람을 태운 소형차가 제한 속도를 훌쩍 넘기는 빠르기로 양재 IC를 달리고 있었다. 차 내부엔 싸늘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를 몰았다. 아직 술이 덜 깬 탓에 아득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컨디션이라도 한 병 먹고 올 걸 그랬다. 다만 술냄새는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백미러로 흘끔 뒤를 보니 두 여자 작가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형순 피디님 괜찮으신 거 맞죠?"
"응?"
"평소랑 다르게 화를 안 내시니까 오히려 불안해서…."
두 사람이 불안한 건 단순히 촬영에 늦어서가 아니었다. 오늘의 촬영에 팀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찬영이 일하는 직장은 MBS 방송국의 연예 프로그램 외주를 맡는 제작사였다. 대단한 히트작은 아니었지만 꾸준한 시청률이 보장되는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메인 피디 입장에선 잘해봤자 본전이지만 못해도 리스크는 없는 안전한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 메인 MC의 학폭 논란이 터졌다. 뒤따라 고정 시청층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대표와의 친분 때문에 MC 교체를 미루며 사태가 일단락되길 기다렸지만, 지난 회차에 이르러서는 시청률이 반토막 났다. 더구나 제작사의 섣부른 사과문으로 지금은 프로그램 폐지 요청까지 쇄도하는 상황이었다. 일이 커지자 본 방송국 임원 라인에서까지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대표와 팀장은 형순 피디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그런 시국에 마침 채준이 섭외에 응했다. 최근 느끼한 카페 사장 콘셉트로 1, 20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크리에이터였다. 근 몇 달간 모든 방송사의 섭외 희망 1순위였지만 까다로운 성미로 도통 성사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형순의 대학 시절 인맥이 닿아 가까스로 섭외에 응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인터뷰와 주말 라이브 방송 성사를 계기로 채준을 메인으로 한 고정 코너를 신설할 계획이었다. 채준 측의 긍정적인 반응 덕에 프로젝트는 순항 중이었다. 데뷔 1년 만에 배우 브랜드 평판 1위를 달성한 그라면 꼬라박은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살려내고도 남을 것이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어가는 방송을 살려내기라도 한다면? 또 누가 알겠나. 형순에게 본 방송사 피디로 넘어갈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대표님도 양심이 있어야지. 그걸 왜 우리한테 독박 씌워요?"
"누가 아니래. 그러니까 책잡힐 일 하나라도 생기면 안 돼. 10시까지 도착할 수는 있으려나."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기는 한데…."
선영이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말했다. 반면 운전석의 찬영은 전혀 다른 이유로 시한폭탄과 동승한 듯한 불안감을 견디고 있었다. 그는 극도의 긴장감과 숙취를 동시에 이겨내며 틈틈이 곁눈질로 조수석을 살폈다. 어제 몇 병을 마신 거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러다 차도 한복판에서 기절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평일 오전에 음주 단속에 걸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차가 올림픽 대로에 들어섰다. 교통 체증이 극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출근길 차량들로 도로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찬영아."
형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어제 술 마셨니?"
올 게 왔구나. 찬영의 콧잔등 옆으로 식은땀이 흘러 인중을 간질였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근데 왜 늦었어?"
"그게, 좀 일이 있어서."
그때 꾸룩 소리와 함께 숙취로 인한 복통이 엄습했다. 찬영은 당혹감에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있는 힘껏 입술을 오므렸다. 앞니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복통을 잊으려 애썼지만 효과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일?"
"끝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대답했다. 지금 화장실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꽉 막힌 차도에 피디와 작가들을 버려두고 풀밭으로 달려가는 것만큼 망신스러운 일이 어딨겠는가. 찬영은 심호흡을 하며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정체 구간을 빠져나오자 도로가 원활해졌다. 속도를 내면 10시에 맞춰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전까지 싸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찬영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조금만 버티자. 제발 조금만 더! 어느새 찬영의 귀 밑으로 피 섞인 진땀이 빨갛게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