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또 다른 힘
손이 남긴 흔적은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데버라 메디슨
오늘의 글감 : 어떤 기록을 하고 있나요?
어릴 적부터 끄적끄적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일정한 패턴을 그리기도 하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나만의 방식으로 적어 내려가기도 하며 나도 모르게 손으로 쓰는 습관들이 있다. 여전히 나는 운전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전화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누군가와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눈앞에 있는 메모지에 펜을 들고 끄적거리는 것을 즐겨한다.
결국 그런 메모들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기는 하지만, 가끔 지나간 통화의 흔적을 보며 보는 재미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 있었던 일들을 싸이월드와 카스에 시시때때로 올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기록용으로. 언제 무엇을 했는지 들여다보기 좋고, 그날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서 사진과 함께 짧은 기록을 남긴다. 카스는 내게 소중한 기록장소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의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막힐 때면 도와주는 기억의 보관소이기도 하다.
"아, 작년 크리스마스 때 갔을 때 거기 진짜 맛있었는데, 그 식당 이름이 뭐였더라?" 라던지,
"지난 결혼기념일에 우리 뭐 했더라?"
"우리 여행 가지 않았어?" 남편의 얼버무리는 말에,
"아냐, 내기할래? 우리 그날 애들이랑 뮤지컬 보러 갔었잖아!"
당당하게 반박하여 내기도 이기고 남편에게는 눈을 흘길 수 있다.
올해 시작한 것 중에서 하나는 5년 일기 쓰기이다. 남편과 5년 일기를 함께 쓰고 있다. 기록해야 할 양이 많지 않아서 부담스럽지는 않다.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꾸준히 쓰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함께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같이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 듯하다. 서로의 일기를 들여다볼 수 없기에 썼냐는 말도 묻지 못하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시작하려고 했던 마음을 높이 샀을 뿐이다.
하지만 나와 남편의 일기장은 거의 매일 펼쳐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보랏빛 일기장 속에 한 해의 기록이 쌓이면 다음 해에 같은 날엔 어떤 일이 더해질지 궁금해진다. 지금은 첫해라 비교할 수 없지만 내년엔 어느 날의 일기를 쓰면서 작년에 썼던 내용을 자연스레 들여다보고 그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손으로 쓰는 일기는 온라인에서 타자로 쓰는 글과는 사뭇 다르다. 그날의 피곤함이 글에 베이기도 하고, 설레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한다.
기록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뒤돌아보게 되는 힘인 듯하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날의 내 감정과 일상을 글로 남길 때, 그날 썼던 감정의 여운이 글에 담겨 있는 듯하다.
어쩌다 펼치지 못한 날엔 뭐가 그리 바빴나 떠올려보고 갤러리를 살펴보고 뭘 했지? 돌아보고 밀린 일기를 채워 넣기도 한다. 어쩌다 딸이 적은 쪽지가 일기를 대신하기도 하고, 공연을 보고 난 후 티켓을 오려 붙이기도 한다.
사진을 보고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듯, 글을 쓰면서 느꼈던 마음을 떠올려보게 하는 마법이 있다. 때론 그랬었나? 하고 생소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살피는 시간. 나에게 귀를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된다. 속상한 마음, 슬펐던 마음, 힘들었던 일들을 털어놓게 된다. 벅찼던 순간, 기뻤던 마음, 행복이 차올랐던 마음도 채워 넣으며 올 한 해의 여백들이 거의 채워졌다.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수히 스치고 지나간 나의 소중한 순간들도 사라지고 내 것이 아닌 것이 되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남은 것들은 다시 한번 내가 돌아볼 수 있는 멈춤의 순간이 되어줄 것이다. 남은 시간도 조금씩 채워가며 기록해야겠다.
나의 끄적거림은 아마도 내내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