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근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근심에도 격(格)이 있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다. 가볍게 흘려들을 수도 있었을 그 말이 유독 묵직한 추처럼 가라앉아 오랫동안 마음속을 맴돌았다. 정말 그건걸까?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수많은 근심에도 저마다 다른 무게와 깊이, 즉 '격'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생각해보면 우리의 하루는 근심이라는 그림자를 늘 달고 산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의 작은 스트레스, 업무 중의 사소한 실수에 대한 걱정,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불안감, SNS 속 ‘좋아요’ 수에 일희일비하는 마음까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피곤한 내 모습, 기대에 못 미친 주변의 반응 같은 '작은 근심'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어쩌면 사소해 보일지라도 끈질기게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어 시야를 좁아지게 한다.
하지만 분명, 어떤 이들의 근심은 그 결이 확연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일의 평등’이라는 대의를 고뇌했다. 암살 위협 속에서도 테네시 멤피스 위생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연단에 섰고, 그 유명한 "나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았습니다(I've Been to the Mountaintop)" 연설을 남겼다. 자신의 안위가 아닌 공동체의 정의를, 당장의 평안이 아닌 미래 세대의 권리를 향한 그의 근심은 그 자체로 숭고한 무게를 지니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근심의 격은 그 방향성에 의해 결정되는 듯 하다. 나 자신에게만 매몰된 근심은 가볍게 흩날리기 쉽지만, 타인을 향한, 공동체를 향한, 더 나아가 미래를 향한 근심은 격이 있다.
요즘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로 시끄럽다. 누구를 뽑아야 할지 많은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근심하고 나도 역시 고민하지만, 후보들의 자질이 크게 차별회되지 않는 듯 하다. 안타깝게도 다 좋아서가 아니라, 다들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듯 보여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근심이 ‘격 있는 근심’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
열 명의 마틴 루터 킹이 나와서 경쟁한다면, 나와 같이 평범한 시민 한 사람의 근심도 보다 나은 사회와 미래를 향한 ‘격 있는 근심’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의 근심이 격이 있는 근심인지 자신이 없다. 내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근심이 오히려 나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더 중요한 가치를 향한 고민을 가로막는 소비적인 근심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후보들이 간절하다.
물론 누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거대한 족적을 남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또 모든 근심을 숭고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다는 것도 안다. 다만, 나도 '격 있는 근심'을 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고민해야 하나... 하는 실망과 한탄 그 이면에는,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열망, 즉 '격 있는 근심'을 향한 갈증이 숨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내 근심에도 격이 조금은 있다고 자위하는 하루다.
나의 내일 근심에는 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