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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GB USB가 무너뜨린 저작권

좋은 아빠와 변호사 아빠

by 신광훈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USB 를 발견했다. 용량은 2 GB. 요즘은 웬만하면 USB 하나가 16 GB 이상의 용량을 가지고 있으니, 딸 아이는 신기해 하며 묻는다. "아빠, 이걸로는 도대체 뭘 했어?"


딸은 모른다. 넷플릭스도 디즈니 플러스도 없던 그 시절, 이 용량 작은 USB 하나가 저작권 침해의 일상화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2GB USB가 처음 나온 건, 동영상 불법 공유사이트가 난립하던 시절이었다. 오래된 것이든 신작이든 웬만한 영화는 다 다운로드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 한 편의 용량이었다. 보통 한 편의 영화가 두 개의 파일로 나누어져 업로드 되던 그 시절에, 파일 하나의 용량은 대부분 1.5GB정도였다.

컴퓨터에 다운로드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그 파일을 다른 컴퓨터로 옮기는 것이 불편했다. 가장 편리한 방법이 USB를 쓰는 것이었지만, 당시 USB는 1GB가 한계였기에, 영화를 다른 컴퓨터로 옮기려면 일일이 CD를 굽는 수고를 해야 했다. 그래서 영화를 불법으로 다운로드하는 많은 이들은 애타게 1.5GB를 넘어서는 용량을 가진 USB를 기다렸고, 나도 그 중 한명이었다.


2GB USB가 나오자마자 나는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영화 복사량은 서너 배로 늘었고 나의 출장과 여행은 훨씬 덜 지루해졌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을 용량이지만, 그 당시 2GB 의 용량을 가진 USB는 불법 다운로드를 부추긴 촉매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이 마흔이 되어 나는 캐나다의 로스쿨에 진학했다. 이과생으로 마흔까지 한국에서 지내다가 늦깎이로 캐나다 로스쿨에 입학한 내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과생으로 박사 학위까지 했으니, 그나마 로스쿨의 젊은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있는 분야는 지적재산권이었다.


그래서 로스쿨 1학년 때부터 지적재산권 변호사를 목표로 달렸고, 다행히 원하는 캐나다의 지적재산권 전문 로펌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변호사 자격에 이어 변리사 자격도 취득하여 명실상부한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학업과 일에 몰두하던 그 시절에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둘러대던 핑계는 확실했다. “지금 내가 멈추면 가족의 미래는 없다. 지금의 희생이 우리 가족의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아이들의 주말까지 아내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기에, 나는 공부하고 일하는 틈틈이 나만의 방법으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 바로 불법 다운로드로. 아이들의 영어 공부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많은 명작 영화들과 아이들 교육용 콘텐츠를 한국의 불법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캐나다에 있는 우리 집 거실에서 아이들에게 틀어주곤 했다.


아니, 로스쿨 학생이, 나중에는 지적재산권 변호사가 되어서까지, 불법다운로드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라고 반문할 지 모른다. 당연한 지적이다. 하지만 죄책감? 그 당시에 그런 건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영화 제작자의 이익보다 내 아이들의 영어가 더 급하고, 내 아내의 쉬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저작권 관련 리서치 업무가 나에게 배당되었다. 의뢰인은 해리포터의 저작권자였다. 한창 해리포터 시리즈가 인기를 끌던 그 시절,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이름과 원작에 나오는 장소, 원작의 세계관 등을 이용해서 원작자가 아닌 사람이 전혀 다른 내용의 소설을 써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원작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는 빠져있는 시간대에 일어난 일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쓴 소설이어서 원작 해리포터 시리즈와 이야기는 전혀 겹치지 않았지만, 해리포터 소설의 저작권자는 등장 인물이 동일하고, 같은 장소나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는 등 공통 요소가 너무 많기에 새로 출간된 소설이 해리포터 소설의 저작권을 침해한다고 확신했다.


리서치 업무를 받아들고 조금 난감했다. 얼핏 보기에 저작권 침해같아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배운 바로 저작권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아이디어-표현 이분법’하에서 저작권 침해가 아닐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간단히 말해, 저작권이 아이디어 그 자체는 보호하지 않고 그 아이디어가 구체적으로 구현된 표현만을 보호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라는 이름이나 물건을 이동시키는 마법, 부모를 잃은 소년 마법사와 같은 아이디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실제 대사나 구체적인 사건을 기술하는 언어적 표현 등만이 작가 고유의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리서치를 좀 더 해 보니 역시 그랬다. 볼드모트라는 악당이나 인간 세계와 마법 학교를 오가는 마법사와 같은 세계관은 일종의 아이디어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의 소설은 이 아이디어를 빌려왔을 뿐, 원작의 문장이나 표현을 베끼지는 않았고,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사건과 표현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따라서 고객이 ‘가짜 해리포터 소설’이라고 부르는 이 ‘2차 창작물’ 은 다른 법으로 제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작권 침해는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 분석에 파트너 변호사도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는 않았으나 난감해 했다. 저작권 침해가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고객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잠시 침묵하던 파트너 변호사가 물었다. “이 2차 창작물의 이 장면은 해리포터 3편에 나오는 이 상황하고 동일한 것 아닌가?” 아마도 저작권자가 물어 볼 상황을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마니아는 아니었고, 리서치를 위해 해리포터 시리즈를 다 읽지는 않았으나, 마침 그 전 주 주말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여러 편 다운 받아서 아이들에게 보여준 터라 그 기억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 놓았다.


그랬더니 파트너 변호사가 말했다. “기억력이 대단하네. 소설이 발간된 지 꽤 되었는데”. 나는 무심코 “읽은 것은 아니고 주말에 여러 편을 아이들과 영화로 보았다”고 말했고, 파트너 변호사는 물었다. “어디서?”


순간 아차 싶었다. 해리포터를 상영하는 곳은 없었으니, 내가 영화를 불법으로 다운로드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발설한 셈이 아닌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DVD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캐나다에서 내노라하는 지적재산권 전문 로펌에서,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가, 고객의 저작권을 버젓이 침해하고 있다는 것을 들켰는데, 파트너 변호사가 뭐라고 할까.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파트너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어제 디즈니 애니메이션 하나 불법으로 받아서 늦둥이 딸이랑 봤어.” 순간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 그는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그 영화를 살 곳도 없고, 그 시간에 빌릴 가게도 없는데, 그리고 그 귀여운 녀석이 보여달라고 계속 떼를 쓰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 순간, 2GB USB로 불법 복제를 하던 20대의 나와 캐나다를 대표하는 지적재산권 변호사인 그 파트너가 겹쳐 보였다. 아마도 그 파트너 변호사는 내게 면죄부를 주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은 오히려 두 배의 부끄러움으로 돌아왔다. 저작권법을 지켜내는 최전선에 있는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들조차 '아빠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가볍게 저작권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적재산권 중에서도 저작권은 참 취약한 권리다. 특허권이나 상표권은 개인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매일의 생활에서 침해할 일이 많지 않지만, 저작권은 2GB USB에도 무너지고, 귀여운 딸에게 웃음을 주려는 아빠의 마음에도 무너진다. 저작권은 거대 로펌의 법정 공방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영화를 고르는 아빠의 마음속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 날 깨달았다.


그게 벌써 10년전 일이다.


이제는 기술 발전의 산물인 2GB USB가 불법 공유의 기폭제가 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스트리밍 서비스나 구독 모델처럼 기술이 저작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도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싸고 편리하게 즐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지금도 도처에 있고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예전에 2GB USB를 신기해 하던 그 작은 딸은, 이제 아빠와 같은 지적재산권 변호사의 꿈을 품은 로스쿨 학생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반쯤은 등 떠밀려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여주던 아빠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든 창작자들의 땀과 노력을 이야기해주는 아빠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내 서랍 속 2GB USB는 단순히 오래된 저장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저작권이 얼마나 무심코 그리고 선의로 포장된 핑계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경고문이다. 그리고, 저작권의 진정한 보호는 법정이 아닌 거실에서, 법조문이 아닌 양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은 증거물이다.


저작권 침해의 유혹은 따뜻한 마음이라는 핑계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에 저작권은 양심에만 기대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권리다. 하지만, 그것을 막는 진짜 힘도 결국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 집 넷플릭스 화면에 가족 모두의 이름이 따로따로 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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