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사, 골프, 공부, 일...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볼링을 치러 간 날이 생각난다. 직구 밖에는 못 쳐서 언젠가 멋지게 커브 볼을 치는 것이 소원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평균 200이상을 치던 실력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성한 볼링장에서 술을 파는 거다. 따로 술 마시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자신들 레인에 맥주와 안주를 시켜 놓고 마셔가면서 볼링을 친다.
볼링 매너라는 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가 어프로치에 올라서면 다른 사람은 옆 레인에 올라오지 않는 것이 한국에서는 불문율이요 기본 매너였는데, 남이 옆에서 치든 말든 자기 마음대로 레인에 올라 공을 굴린다.
볼링을 치는 내내 신경이 쓰였고 기분이 나빴다. 아니, 무슨 볼링장 운영을 이렇게 하며, 볼링을 이런 식으로 친다는 말인가. 다른 곳으로 갈껄, 생각하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른 곳도 마찬가지란다. 캐나다에서는 볼링을 못 치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에 살사 댄스에 빠진 후배 한 명을 만났다. 살사 댄스가 너무 재미있다며 푹 빠져서 나름 대회에도 나가는 실력을 갖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가 얼마 전에 휴가차 한국을 방문하는 중에 한국 친구를 통해서 살사 댄스 동호회에 초대를 받았더란다. '그래도 내가 캐나다에서 대회에도 나가는 실력이니 동호회 회원들 정도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던 그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동호회 회원들의 살사 댄스 수준이 자신이 참가했던 캐나다의 대회 참가자들보다 높아 보였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한국은 많은 것에 진심이다. 운동만 하더라도 골프를 치더라도 레슨을 받는 것이 정석으로 되어 있고,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대부분 기본적인 강습은 필수다. 많은 경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들고 어울리기도 힘든 문화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캐나다는 그렇지 않다. 볼링도 그랬지만, 살사댄스도, 골프도 그렇다. 우선 즐기는 것이 먼저다. 그러다보니 살사댄스의 대회 수준은 한국의 동호회 수준이 되기도 하고, 골프장에는 레슨 한 번 받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이상한 포즈로 공을 쳐 대는 경우도 많다. 웬만한 실내 스포츠에서는 술을 마시면서 경기를 하는 것이 허용된다.
꼭 운동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캐나다에 살다보면 한국은 "제대로 하든지 안하든지"인 반면 캐나다는 "즐겨 (Have Fun!)"의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차이는 어쩌면 두 나라가 적용하고 있는 교육의 차이에 뿌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출신이 한국이라서 즐기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제대로 해야 한다는 압박때문에 아예 시작을 하지 않은 것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일단 즐길 거리에 몸을 맡기고, 정말로 즐기로 싶어지면 그 때부터 "제대로"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보니, 하고 싶고, 해 볼 수 있는데 경험해 보지 못하는 것이 별로 없다. 경험의 문턱이 턱없이 낮아진다.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라서,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다니는 중에 전공을 바꾼다. 그러니, 4년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지만, 학생은 물론이고 부모님들도 그닥 신경쓰지 않는다. 경험에 관대하다.
나쁘게 보면 쓸 데 없는 경험이 많아 지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다. 영어, 일어, 독어, 불어, 중국어를 조금씩 하는 것보다, 영어든 독어든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싶다.
하지만, 좋게 보면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시도가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란다. 해 보고 싶으면 한국에 비해 덜 망설이고 시도해 본다. 이러한 '시도의 자유'가 갖는 가치는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내가 갈 수 있는 길에 큰 차이를 만든다. 캐나다에서 자란 친구들은 내가 한 가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여러가지를 시도해 보고, 골라가면서 쉽게 길을 바꾸면서 그렇게 살아서 나를 놀라게 한다.
어느 것이 좋은 걸까. 정답을 알고 있다면, 정해진 성공의 길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한국의 시스템이 좋다는 데에 한 표를 던질 듯 하다. 하지만, 선뜻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물병리학을 공부했던 내가 지금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