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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천>, 낙엽과 돌만 있을 뿐.

투명성은 감정의 진실을 동반하고, 감정의 진실은 공명을 전달한다.

by 권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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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영화 <수유천>의 주인공 '전임'은 아침마다 수유천을 그린다. 자신의 작품 패턴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에서 끝내 그 패턴을 볼 수 없다. 패턴은 고사하고 전임의 작품조차 볼 수 없다. 전임이 무척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여교수의 칭찬이 무색하게 영화는 작품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일부러 숨기는 것에 가깝다. 혹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우리는 엄청난 작품이 있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을 예술품을 말이다.


무언가를 숨기는 영화의 태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허무'가 아닐까. 그러니까 전임은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싫다. 기대한 것들, 상상한 것들이 예상한 것들과 어긋날까 봐 두렵다. 매일 아침마다 카메라의 위치는 점점 멀어진다. 수유천을 그리는 전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던 카메라는 날이 지날수록 점점 멀어지며 전임의 모습을 희미하게 포착한다. 어쩌면 자신감의 상실이다.


그래서 수유천이라는 공간은 중요하다. 전임이 그림을 그리는 수유천은 끝 지점이다. 실제로 영화 촬영지 덕성여대는 수유천이 넓어지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의 궁극이다. 지형으로 비유하자면 그녀는 수유천의 근원지를 탐구하고 싶다.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 확인하고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고 싶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공간은 늘 중요했다. 영화 <탑>에서 그가 도술처럼 부리던 공간의 마법을 생각해 보자. 중요한 것은 공간의 위치이다. 그는 위치를 올라가면서 예술의 근원을 탐구했다. 그에게 공간은 단순히 배경으로 작동하지 않고 인물의 위치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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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과 돌


어쨌든 핵심은 전임은 근원을 탐구하여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외삼촌과 여교수를 경외하는 그녀의 태도는 이해가 갈만하다. 전임에게 있어 그들은 근원을 탐구하여 성취를 달성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임에게 고결한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사랑의 불가항력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연극을 준비하면서 스캔들을 겪은 전임에게 그들의 사랑은 트라우마다. 무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을 관찰한 전임의 행동은 끝내 무의미로 연결된다.


영화의 마지막, 전임의 분노도 결국 외삼촌과 여교수의 사랑이 아니라 무의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녀가 화난 이유는 사랑을 속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허무에 대한 탄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 분노는 체념으로 이어진다. 결국 전임이 그토록 궁금한 수유천의 근원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는 오직 낙엽과 돌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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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과 공명


필자는 홍상수 영화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어색함을 사랑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선뜻 손을 먼저 내밀기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에서 다가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묘한 장력이 발생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전임과 외삼촌이 처음 만난 순간을 돌아보자.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사실 남에 가까운 사이이지만, 혈육으로 이어진 이상한 거리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영화는 할말도 없는데 억지로 말을 꺼내는 그 틈 사이로 무척 투명한 순간을 발견한다. 연극이 끝나고 외삼촌이 학생들과 밥 먹는 장면은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투명하다. 결국 투명성은 감정의 진실을 동반하고, 감정의 진실은 공명을 전달한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이토록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공명이야말로 홍상수 영화의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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