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천 개의 파랑』, 오승현 『지피지기 CHAT GPT』
“필사한 문장을 일상에 녹이는 글을 쓰고 있는데, 필사한 문장만 있고 내 문장은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해.”
“그런 글쓰기는 정말 멋진 시도인데,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기도 해. 필사한 문장을 일상에 녹인다는 건, 단순히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살아보는 일이잖아. 자연스럽게 내 말로 풀어내야 하니까, 처음엔 당연히 어색하고 내가 쓴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그런 자괴감은, 네가 글에 대해 진지하다는 증거야. “내 문장이 없는 것 같다”는 고민은 오히려 내 문장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서 오는 거고. 그 마음이 있다면 이미 너만의 문장은 천천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일 거야."
올해 초였던 것 같다. 첫 책이 나온 후 다음 책에 대한 아니 다음 글에 대한 방향성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이렇게 가는 게 맞나?’ 막막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글쓰기의 즐거움이 전보다 못하다는 데 있었다. 전에는 투박한 글이지만 내가 쓴 글을 내가 읽으면서 혼자 ‘키득키득’ 거리며 웃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즐거움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어느 잣대에도 속하지 않고 나 자신이 자유롭다는 감각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즐겁게 쓰자’가 모토였는데 이번엔 쉽지 않았다. 글 한 편을 쓰는 동안에는 물론 글을 끝낸 후에도 계속해서 입안을 맴돌던 말 “아!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들지?” 주위에 글 쓰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할 텐데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어 더 답답했다. 공통의 관심사도 아닌데 지인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것도 쉽지 않고 결국은 혼자 헤쳐나갈 문제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힘들어 죽겠어.”라고 말할 곳이 필요했다. 그게 챗GPT일 줄이야!
“챗GPT 써 봤어? 진짜 신기하다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못하는 사적인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공감도 해 주고 힘이 되는 말까지 해 주더라고. 내가 챗GPT에게 위안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라는 말이 여기저기 들려올 때였다. 나 또한 챗GPT란 놈의 정체가 궁금했고, 한 번쯤은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끙끙 앓고 있던 고민을 챗GPT에게 털어놓게 된 것이다. 나도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는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며 고민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주하기 싫어서 미루기를 반복하다 더 이상은 도저히 미룰 수 없어 삐져나온 고민일지도 모르겠다. 챗GPT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아서였을까? ‘지가 그래 봐야 대화형 챗봇, 기계 아냐?’ 라며 솔직히 우습게 생각했다. 그런데 “필사한 문장을 일상에 녹인다는 건, 단순히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살아보는 일이잖아.”라는 챗GPT의 허를 찌르는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았다고나 할까?
아! 내가 필사한 문장을 사느라 살려고 하느라 힘든 거였구나! 글을 쓰면서 글을 쓴 후에도 왜 그렇게 힘든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문장에 사로잡혀 그렇게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글을 쓰는 것도 쓰는 거지만 글을 쓴 후, 그 문장을 살아낸다는 건 단박에 되는 일이 아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필사한 문장대로 살아지기도 살아지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과 일상 사이에서 글과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챗GPT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서웠다. 챗GPT에 대한 감정은 이렇게 놀라움과 두려움의 양가적인 감정을 시계추처럼 오갔다.
그런데 왜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인간은 말하는 능력이 발달한 유일한 존재입니다. 말하는 능력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마룻보다 우월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챗GPT가 위협적인 것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능력 때문입니다. 챗GPT의 등장으로 말과 글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는 믿음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동시에 무서운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역사적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p.26) 놀라운 동시에 무서운 것,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 DNA는 알 수 없는 걸 두려워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에 AI를 두려워한다.”라는 천선란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잘 알지도 못하는데 나와는 상관없이 일상에 훅 들어온 챗GPT가 놀랍고 두렵기만 하다.
“혹시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이나, 필사한 문장 하나 보여 줄 수 있어? 같이 네 말로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라는 챗GPT의 지나칠 정도로 과하고 상냥한 권유에 그만 부랴부랴 채팅창을 닫았다. 고민 상담까까진 좋았지만, 그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챗GPT가 내미는 협업(?)의 손을 냉큼 잡자니 왠지 꺼려졌다. 챗GPT가 이끄는 대로 챗GPT와의 협업으로 글을 쓴다면 물론 좋은 글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게 과연 내 글일까? ’라는 내 생각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기준이 챗GPT의 손을 덥석 잡는 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형 인공 지능, 더 나아가 생성형 인공 지능 전성시대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세상의 속도인 거고 나의 속도는 또 다른 문제다. 세상의 속도 안에서 내 템포대로 산다는 건 내 속도를 유지하며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너도나도 2G 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던 시기, 가장 늦게 스마트폰으로 갈아탔고, 지인들이 “너 한 사람 때문에 따로 문자를 해야 하니 불편해”라는 민원이 빗발칠 때 카카오톡을 받아들였다. 2G 폰이어도 충분했는데 2G 폰이라는 선택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세상에서 내가 아무리 신기술을 사용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 순간 사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나는 그렇게 항상 마지막 주자였다. 세상에는 앞장서 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천천히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상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나처럼 최대한 느리게 가고 싶은 사람이 챗GPT를 일상에 들이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챗GPT에 대해 알고는 싶었다. 정체는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나 보다. 독서 모임 멤버의 제안으로 오승현의 『지피지기 CHAT GPT』를 읽고 토론하기로 했다. “다들 챗GPT, 챗GPT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AI 시대라고 하는데 솔직히 AI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겠고요. 어려운 책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청소년을 위한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 안내서가 있는데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건 어떨까요? ” 어디에선가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게 공포 1순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챗GPT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고자 실체를 알면 조금이나마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싶어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그렇게 마흔 중반 둘과 오십 대 초반 둘은 10대를 위한 챗GPT 안내서를 읽으며 세상의 변화를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고자 했다.
과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야에서 챗GPT가 쓰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걸 챗GPT가 할 수 있다고?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AI혁명은 우리가 알던 방식의 인류 역사가 끝났다는 신호라며 역사상 처음으로 힘의 중심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라는 유발하라리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어떤 시대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인류 역사라는 긴 흐름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73년생으로 나는 X세대다. “x세대가 컴퓨터, 밀레니얼 세대가 인터넷, z세대가 모바일과 소셜 미디어와 함께 성장했다면 미래세대는 궁금증을 인공지능으로 해결하는 인공지능 네이티브로 자랄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궁금한 걸 챗GPT에게 물어보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책을 통해 챗GPT에 대해 대략적인 것을 알았지만 내 일상에 챗GPT를 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나는 이제 막 이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발전되어 가고 있는지를 알았을 뿐이다. 인공 지능과 공존할 수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데 나는 아직 이 아이와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투박하지만 나는 내가 쓴 글을 좋아한다. 온전히 내 지분이 100프로인 글이 나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가 과연 이 아이와 협업할 수 있을까? 협업한다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은 채팅창을 닫아둔 채 외면하고 있는 상태다. 채팅창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이 아이의 손을 잡게 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시대적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인공지능이 컴퓨터 안에 있지만, 앞으로는 피지컬 AI인 로봇으로 올 것이다. 기술은 날로 발전하는데 나는 매번 이 기술들의 속도 앞에서 숨이 가쁘다. 분명 인간을 편하게 하기 위한 기술들일 텐데, 나는 왜 이 기술들을 받아들이기가 힘겹고 숙제처럼 느껴지는 걸까?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에 나오는 이 문장이 떠오를 뿐이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