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코스모스』
“어떻게 인류가 과학적 사고라는 것을 하게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류가 지식을 쌓은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을 해보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 지식을 쌓기도 하고요. 예술을 지식이라고 한다고 하면 그건 직관과 느낌들이 무척 크게 작용하죠. 종교는 경전이라는 걸 만들어서 가르치고 적용함으로써 지식을 쌓아가는 방식인데 인류가 기원전 6세기경부터 아주 독특한 생각의 방식을 개발해요. 그게 과학적 사고라고 지금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이오니아에서 어떻게 과학적 사고가 처음 탄생했는지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챕터, ‘밤하늘의 등뼈’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워 함께 보기 시작한 한 유튜브 영상에서 진화 생물학자인 장대익 교수가 한 말이다. 과학 혁명이 16세기 이후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라는 지역에서 현재와 비슷한 과학이 쌌텄다니! 과학사에서도 이오니아에서부터 과학이 탄생했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어느 날 우리가 느닷없이 과학을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과학적 사고를 하는 집단들이 있었다는 과학의 뿌리를 알았다고나 할까?
인류가 독특한 생각의 방식인 과학적 사고라는 것을 처음 시작한 게 기원전 6세기라면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다. 그럼 나는 이러한 인류의 후손으로서 과학적 사고를 하며 살고 있을까? 내가 지식을 쌓아 오고 있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과학적 사고와는 동떨어져 있어도 너무 동떨어져 있다. 책을 통해 지식을 쌓고 있다. 삶은 끊임없이 수많은 질문들을 해 오고,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대부분 인문학책에서 찾아왔다. 인생 책(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섯 권을 나열해 보면 이 같은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읽고 토론하는 책들을 필사하면서 때로는 답을 찾기도 하고 더 헤매기도 하고 하나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필사를 하면서 생각하고 그렇게 사유한 문장을 글로 쓰면서 지식을 쌓고 있는 내게 과학은 무관한 세계였다. 골치 아프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이렇게 오십 년 이상을 지극히 문과적으로 살던 한 인간이 『코스모스』 를 읽으면서 왜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왜 과학적 사고가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리타르코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은 지구와 지구인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p.380) 내가 누구이고 이 지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유를 통해서만 지식을 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걸 한쪽 눈은 가린 채 하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인문학적 접근과 과학적 접근이 조화를 이뤄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인문학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알았다.
결국 지식을 쌓는 이유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자유로운 탐구와 객관적인 실체를 찾아가는 어떤 여정이며, 열려 있음이다.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과학은 어떤 호기심을 채워주는 설명이 아니라 일종의 세계관인 거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계관인 거죠. 이게 얼마나 쿨한가. 그리고 이게 인류에게 있어 이오니아에서부터 시작된 이 세계관이 사실은 우리가 계속 가져가야 할 우리 정신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요.” 장대익 교수는 과학을 일종의 세계관이라고 한다. 과학이 세계관이 될 수 있다니! 과학적인 사고로 세상을 보는 것, 이오니아’라는 단어도 난생 처음 들어본 내게 과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은 이렇게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서서히 열리고 있다.
과학적인 사고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인데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시도해 보기로 했다. 과학적 사고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매년 가을에 보던 단풍을 올해는 두 개의 눈, 인문학적 관점과 과학적인 관점으로 보기로 했다. “일조량이 줄어들고 밤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줄기와 잎 사이에 떨켜층을 만들어 잎으로 가는 수분과 영양분을 차단한다. 이때부터 잎의 엽록소는 파괴되고, 엽록소에 가려졌던 다른 색소들이 울긋불긋 드러나는데 그게 우리가 보는 단풍이다. 수분 공급이 멈춘 잎이 완전히 말라서 떨어지기까지는 짧아서 더 아름다운 시간. 나무의 겨울 채비가 온 산천을 물들이는 광경은 매년 보아도 여전히 신비롭다.”(김신지의 『제철 행복』) 하나의 세계를 마음에 들이기 시작하면 보이지 않았던 문장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건너뛰고 마음에 두지 않았을 문장을 필사하면서 산책길에 만나는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쁘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나무가 실은 겨울 채비를 하는 거였구나! 줄기와 잎 사이 ‘떨켜층’을 찾아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주 독서 모임 단체톡방에 올리는 시 한 편은 단풍철을 맞아 오승건 님의 <고궁의 은행나무>를 올리며 샛노란 은행잎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했다. 두 개의 눈으로 단풍을 바라본 건 처음이라 이러한 경험 역시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디 이뿐일까? 앞으로 알게 될 잘 몰랐던 과학이라는 세계는 얼마나 장대할까?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전의 나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곳에 다녀왔다. 인문학 강의만 줄기차게 들었던 내가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궤도님 강의를 듣고 있다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던 '우주로 향하는 인류의 꿈, 어디까지 왔을까?'를 귀를 쫑긋 세우고 앉아 있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 우주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하던 사람이 줄을 서서 입장권을 받고 한자라도 놓칠까 로켓의 역사를 노트 가득 빼곡히 적고 있었다. 그렇게 과학이라는 세계를 조금씩 일상에 들이고 있었다. 과학적 사고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이제 막 과학이라는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과학이라는 세계관으로 일상을 살아보려 시도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생명의 기원, 지구의 기원, 외계 생명과 문명의 탐색,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 등을 밝혀내는 일이 인간 존재의 근원과 관계된 인간 정체성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 사고 저변에는 자신의 기원에 관한 관심이 두껍게 깔려 있기 마련이다.”(p.23) 결국 나 역시 과학적 세계관이 나 자신의 기원에 관한 답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