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 시간에 대자로 누워 저항 없이 죽는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처럼 죽는다. 모든 종류의 죽음이 약점인 나에게 이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매일 반복되는 이 귀한 죽음은 딱 10분짜리다.
몸에 부담을 가장 적게 주는 통 큰 바지로 갈아입고, 내 키보다 아주 조금 길고 넓은 요가 매트 위에 앉거나 선다. 시작할 때의 수련자는 태초의 미물과 비슷하다. 요가원에서 그나마 가장 익숙한 내 몸을 눈앞에 두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괜히 목뒤를 주무르고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한다. 모든 수련은 호흡부터 시작한다.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한숨이 들어오고 한숨이 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코를 거쳐 폐를 거쳐 다시 코로 나가는 이 순환이 새삼 신기하다.
중반부에 이르면 수련자 본연의 성질이 드러난다. 성취감을 추구하는 나 같은 수련자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자세라도 한 번 더 잡아주시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얼굴 뻘게진 채 온 힘을 쥐어짠다. 가능하신 분은~이라는 말이 붙으면, 가능하지 않더라도 일단 그 자세를 취해본다. 그러고 나서 대차게 끙끙거린다. 가끔은 요가원의 침묵을 깨고 나도 모르게 ‘와 이건 오반데?’라는 말이 작게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내가 나의 매트 위에 서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다 허용된다. 그걸 알기에 오바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새로운 동작을 시도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매트 위에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선사했다. 잘하고도 잘못되었나 하고 끊임없이 뒤돌아보게 되는 현실에는 반하는 명언이다.
나와는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수련자는 모든 걸 너그럽게 대한다. 조금이라도 몸이나 마음에 무리가 갈 것 같으면 냅다 엎드려 누워있는다. 아니면 심화된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전 단계에 머무른다. 물론 누구도 그를 불성 하다 여기지 않고 재촉하지 않는다. 쉽게 누구를 판단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하지 않는다. ’ 판단‘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한 사람들이 모여 어쩌면 이기적이게 각자의 몸을 달군다.
땀을 뚝뚝 흘리며 매운맛을 본 뒤에는 역자세를 취한다. 역자 세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동작이다. 숙련자는 ‘시르사 아사나’(머리서기)를 하고 애매한 숙련자는 ‘사르방가 아사나’ (어깨서기)를 한다. 그 경계에 있는 나 같은 수련자는 어깨서기를 하다가 내려와 머리서기를 연습하며 그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뭐라도 세우기 힘든 자는 그저 팔 다리를 들고 있기만 하면 된다. 요가는 언제나 대안을 제시한다. 그 대안과 대체의 끝판왕은 무릎을 꿇고 냅다 앞으로 엎드려 팔을 쭉 뻗거나 뒤로 젖혀놓는 자세다. 이런 자세 또한 ‘발라 아사나’(아기자세)라는 이름을 붙여 등과 허리를 이완해 준다고 하며 그 어느 순간에도 수련자가 죄책감을 수반하게 두지 않는다.
역자세까지 마치고 나면 10분간 죽음의 시간이 온다. 이른바 ’사바 아사나‘(송장자세) 시간. 많은 수련자들은 이 시간을 좋아할 것이다. 누구나 이 자세만큼은 완벽하게 구현해 낸다. 어둠 속에서 등을 대고 누워 팔 다리를 편하게 펼쳐내면 끝이다. 수련 초반에 익혀 이제 겨우 익숙해진 숨쉬기 방법 따위는 잊는다. 송장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웠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능력이다.
반드시 그 모든 과정을 성실히 수행한 자에게만 이 세상과 행복하게 차단될 시간과 동시에 다음 세상과 유연히 연결될 시간이 온다. 우물쭈물 매트 아래 두 다리로 뿌리를 내려 태어나, 낯선 내 몸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보다가, 무언가 해내려고 애쓰다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구르다가, 어쩌다가 성취하다가, 절정에 오른 것 같은 순간에 하나하나 역순으로 잡았던 것들을 놓는다. 마지막으로 편히 누워 모든 것을 잊고, 잊어야 하다는 것조차 잊는다.
10분이 지나면, 어두웠던 내부가 환해지고, 누워있던 사람들이 꿈틀대며 일어나 앉는다. 비몽사몽 중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뒤 ‘느므스뜨 .. (나마스떼)’하고 작게 읊조린다. 그러고는 매트 위 불완전하게 완전한 자아에서 벗어나 매트 밖 완전하게 불완전한 자아를 살기 위해 수련자들은 요가원을 떠난다.
아직까지 나는 머리서기가 너무 어렵고, 잘 서있다가도 자주 균형을 잃고 앞사람과 부딪힐 뻔하거나, 쿵 - 소리를 내며 요가원 바닥에 고꾸라지고 만다. 그러나 언젠가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로 서 있을 나 자신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요가는 나에게 그런 의미다. 낯선 것도 일단 하면 끝내 태연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려주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맞닿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때부터 웃으면서 손바닥 전체를 발바닥 아래에 넣고 상체를 숙일 수 있기까지 필요했던 것은 다짐이나 동기부여나 보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해바라기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 키보다 큰 해바라기를 뛰어 넘으려면 그 해바라기가 아주 작은 새싹일 때부터 하루씩만 그 위를 뛰어넘으면 된다는 이야기.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아직 중요하지 않다. 요가가 세상에 존재하는 해바라기 씨앗을 심어볼 일은 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