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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정 Sep 09. 2024

[3] 8살짜리에게 밀리는 기분은 처음이라

 아침 6시. 시계가 아닌 내 몸이 나를 깨운다. 요즘은 알람이 필요 없다. 심지어 알람보다도 더 정확하게 눈이 떠진다. 옆을 보니 아내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나 혼자다. 침대에서 살짝 빠져나와 거실로 나온다. 딸의 방 문은 닫혀 있고, 그 너머로 평화롭게 잠든 8살짜리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부럽다, 그 평온함.


딸은 초등학교 1학년이다. 매일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고,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잠이 든다. 이쯤 되면 작은 어른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뒤죽박죽된 일정도 없고, 그저 자기 일을 착실히 해내는 걸 보면 가끔 내가 정말 어른 맞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커피 한 잔을 타서 천천히 마신다. 이 아침의 고요함, 참 좋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도 뭐 하나는 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다. 마치 매일 아침마다 "오늘도 할 일 잔뜩이야, 준비 됐어?"라고 속삭이는 듯한 압박감. 딸은 그런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뭐, 나처럼 고민에 빠져 있는 대신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니까.


7시 30분이 되자, 딸의 방 문이 열린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거실로 나온다. "일어났어?" 내가 묻자, 딸은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인다. 매일 같은 질문, 매일 같은 대답. 참 기계처럼 정확하다 싶을 정도로. 피곤한 기색도 없고, 뭐든 착착 해낸다. 

딸은 가방을 챙기고, 준비물을 확인하고, 양치질을 하고, 밥을 먹는다. 실수도 없다. 나도 내 일정을 스스로 다 못 챙기는데, 8살짜리가 나보다 낫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 한다. 왜 이러지? 점점 자존감이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날 저녁, 딸이 받아쓰기 100점을 받은 시험지를 내밀었다. "잘했네," 내가 말하자, 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숙제로 돌아간다. "당연하지, 이게 내 일이지"라는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슬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글을 쓰겠다고 출판사를 나왔는데, 이제 와서 보면 내가 제대로 해낸 게 있긴 한가? 딸은 8살밖에 안 됐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맞춤법은 맞게 글을 쓰고 있는 건가?


며칠 후,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같이 집을 나섰다. 딸은 말없이 내 옆을 걷다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내 앞을 지나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왜 딸한테까지 밀려야 하나 싶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딸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빠, 좀 빨리 좀 걸어"라는 표정이 느껴질 정도다. 아, 이젠 8살에게도 뒤처지는구나. 삶이 참 빠르기도 하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머릿속에는 집세, 생활비, 밀린 청구서들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다. 아무리 걸어도 그 무게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딸은 마치 이런 고민 따위는 그냥 발로 뻥 차버리라는 듯 가볍게 걷고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딸을 떠올렸다. 딸은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해내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 더 이상 부럽다 못해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나를 압박하는 것들과 싸우고 있는 걸까? 딸은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다 살아내는데, 나는 하루를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다.

뭐, 이제 와서 변명해봤자 소용없다. 딸이 보여주는 건 대단한 능력이나 초인적인 힘이 아니다. 그저 자기 일을 착실히 해내는 것. 이게 내가 잊고 있었던 거다. 딸은 매일매일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나도? 글쎄. 나도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딸처럼 침묵을 지키면서 할 자신은 없다. 일단 입부터 다물면 좀 나아질까?


아침 7시 30분, 딸은 오늘도 조용히 방에서 나와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나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내 발걸음을 맞춘다. 딸이 저만치 앞서가도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간다. 매일이 똑같다 해도, 나는 내 식으로 버티며 걸어간다. 그래도 가끔 뒤처질 때마다 한마디는 할 거다. "저기요, 좀 천천히 가자." 그래, 그 정도 요청은 해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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