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람 Jun 17. 2023

런던과 음식

영국은 음식이 맛없다는 슬픈 오명을 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음식은 피쉬 앤 칩스 말고는 딱히 없다. 피쉬 앤 칩스를 제외한다면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아마도 인도 커리일 것이다. 영국 사람들의 인도 음식 사랑은 엄청나다. 영국 내의 어느 마트를 가도 인도 커리 소스와 인도 커리 레디밀을 종류별로 맛볼 수 있다. 영국이 인도를 200년간 식민지배하면서 인도의 문화를 영국으로 많이 들여왔는데 그중 하나가 식문화다. 인도 커리에 들어가는 다양한 스파이스도 영국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커리와 함께 먹는 난도 종류별로 접해볼 수 있다. 인도 커리가 영국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가 연간 50억 파운드 이상이라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슬프게도 이건 제대로 말하자면 인도의 음식이지 영국의 음식은 아니다. 피쉬 앤 칩스와 인도 커리를 제외한다면 내가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국 음식은 아마 로스트 디너 (고기와 각종 채소들을 오븐에 오랜 시간 동안 구워내 그레이비소스와 함께 먹는 식사) 또는 코티지 파이나 치킨 파이와 같은 파이 종류가 될 것 같다. 한국도 식당마다 김치찌개의 맛이 다르듯 영국도 잘하는 식당이나 펍에 가면 근사한 로스트 디너를 맛볼 수 있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일명 겉바속촉한 파이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국 가정집에서 영국인이 직접 만들어주는 로스트 디너만큼 맛있는 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엄마가 만들어주는 집밥을 따라올 음식이 없는 것처럼 집밥이 일등인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이렇게 영국 음식은 한국 보다는 대표 음식의 가짓수가 좀 적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이건 영국의 사정이고, 런던을 따로 떼놓고 이야기하자면 내용이 조금 달라진다. 2021년 인구 통계에 따르면 런던에는 300개가 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제 런던 인구 중 영국 본토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50퍼센트를 간신히 넘고 나를 포함한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46퍼센트나 된다. 덕분에 런던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수많은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런던에 살게 되면서 내가 눈뜨게 된 음식은 모로코와 자메이카 음식이다. 모로코에서는 타진을 이용한 음식을 많이 먹는데 타진 안에서 수분을 머금으며 조리된 부드러운 고기와 쿠스쿠스 또는 병아리콩은 정말 맛있다. 내가 집에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음식이기에 이런 음식이야말로 식당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먹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메이카의 저크치킨은 저크(jerk)라는 마른 양념을 치킨 겉에 발라 스모키 한 향이 배도록 숯불에 뭉근히 오래 구운 음식이다. 자메이카계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사는 이스트 런던에 살며 알게 된 음식인데 내 입맛에 어찌나 맞던지 전생에 내가 자메이카 사람이었나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였다. 한 때는 저크치킨을 집에서 요리해 보겠다며 시중에서 파는 저크 소스를 사서 이리 구워보고 저리 구워보았지만 결국에는 자메이카 큰엄마 (우리 동네 저크치킨가게 사장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스트 런던에 오신다면 집에서는 따라 하기 힘든 스모키 향과 자메이카인의 손맛을 경험해 보시길 추천한다.


런던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식재료의 폭도 넓다. 나는 자궁내막증과 선근증을 동시에 앓고 있어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식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런던은 오히려 서울보다 더 큰 식재료 재량권을 갖고 있다. 식당마다 채식주의자 메뉴를 기본으로 갖고 있고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들도 많다. 마트에 가면 유럽에서 많이 먹는 채소들부터 청경채와 초이섬 같은 아시아인들이 많이 먹는 채소들도 있고 플란틴, 카사바 같은 나에게는 생소한 과일 야채들도 있다. 빵을 주식으로 먹는 유럽이지만 쌀 종류도 많고 요즘에는 쌀 파스타까지 출시되고 있어 밀가루를 과하게 섭취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음식들을 요리해 먹는 게 가능해졌다. 유제품을 대체하는 음료들도 많아서 귀리유, 아몬드유 심지어 쌀유까지도 나온다. 유제품을 멀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영국의 음식은 단조롭고 맛이 없을지언정 런던의 음식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런더너들의 다양한 종교와 민족, 문화를 충족시켜 주는 배려 넘치는 음식들이 거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크게 아프고 나니 나만의 가치관과 신념을 지키면서 식생활을 이어나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런던의 다양한 음식들에게 고맙다, 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서.


고기가 부럽지 않은 비건 레스토랑
술이 들어있지 않은 목테일도 다양-
건강하게 먹기 위한 나의 노력
물론 정크하게 먹을 때도 있쥬- 피쉬 앤 칩스
가장 맛있는 영국 음식- 크리스마스 때 먹는 시엄마표 로스트 디너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과 미술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