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카피라이터에게 연락이 왔다. 드라마 타이즈로 광고를 만들려고 하는데 작업을 해보겠냐는 것이었다. 유학을 준비한다고, 뭔가 바람이 잔뜩 들어서는 되도 않는 영어공부를 한다고 세상과 나름 담을 쌓고 세가 나가지 않은 이모네 지하 빌라에서 고군분투하는 처지라, 노트북만 달랑있고 인터넷도 안되고 열악한 상황이었으나 딱히 못할 이유도 없어 방구석에서 뒹굴뒹굴 스토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는 광고주의 기본 톤앤매너를 고려했고 기존에 해당 광고주가 의사결정해서 온에어되었던 기존 광고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두번째는 메인 모델(광고주는 이미 전속모델이 있었다.)에 대해서도 자료를 찾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그 광고를 보게 될 사람들과 그 제품을 사게 될 소비자가 어떤 사람일지, 떠올려 봤다. 그 제품을 직접 사는 사람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나이는 20대일까? 30대일까? 가격이 저렴하지 않으니, 직접 살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날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몇가지 또 추가로 메모를 해봤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의 전반에 조화를 이루는 느낌의 드라마를 떠올려 보았다. 바로 드라마 '파스타'였다.
두 남녀의 달달하고 때론 코믹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드라마는 내 머릿 속에 저장되어 있는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파스타'의 OST 에프터스쿨 정아가 부른 '귀여운 넌'은 귀에 피가 날 정도로 무한반복해서 들으면서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의 현실과는 별개로 달달한 로맨스를 탑재하기 위해 애쓰며 스토리를 구상했다. 특별히 드라마 가운데 신호등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은 영화 '클로저'(감독 마이클 니콜스)에서 나탈리 포트만과 주드 로가 만나는 첫 장면처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광고 속에도 당연히 넣었다. 톤앤매너에 맞춰 재밌고 귀여운 장면들과 순간들을 떠올리고 그 장면들을 연결시켰고 가장 큰 줄기는 아주 오래 전에 써놨던 단막 '네 어깨를 빌려줄래?'의 에피소드 한개를 가져와서 드라마같은 광고의 컨셉과 스토리를 써내려갔다.
책상이 없어서 엎드려서 써보기도 했다가 누워서도 해봤다가 하니까, 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다고 느껴진 것은 스토리를 다 쓰고 나서 창 밖으로 비춰진 달이 지친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것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게 광고로 만들어 지면 웃기겠다, 그치?' 혼잣말을 한 건가, 달에게 말한 건가. 너무 오래 전이라 그것까지 다 알 수는 없으나 곰팡이 냄새나는 빌라의 지하에서 뒹굴뒹굴 썼던 그 스토리를 광고로 만들어졌고 그해 여러 개의 광고상을 받기도 하고, 시리즈로 두 편의 스토리를 더 쓰게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차례로, 그렇게 순식간에 잃었다. 그렇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나이먹은 고아가 되어 버렸다. 3년짜리 계약은 작업이 더 잘되어서 다시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먹을 수도, 잘 수도 쉴 수도 웃을 수도 없었던 지옥같은 때가 있었다. 메리어트호텔 15층에서 그렇게 숨만 겨우 쉬고 전시 준비를 했다. 밤에는 아무도 없었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없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기 시작했다. 철길 앞의 그 길, 야경을 배경으로 다리 위로 가만히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 가만히 위로하는 목소리...드라마를 보며 울고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