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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정리

자카리아의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Age of Revolutions

by KEN

결국은 해석력이다.


파리드 자카리아 또한 현재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병리적 현상에 대한 진단과 이해, 그에 대한 대안적 제안을 끌어내는 힘 역시 그의 해석력에 기인한 것이다.


저자가 어떻게 그의 해석 역량을 드러내고 있는가라는 관점으로 책의 내용을 분해해 보자.




혁명의 시대와 자유주의의 위기 _ 파리드 자카리아

(Age of Revolutions: Progress and Backlash from 1600 to 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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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첫 4분의 1이 경과한 현재, 인류는 소위 다중 위기라 불리는 복합적인 난국에 봉착해 있다. 냉전 종식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예견했던 역사의 종언과 자유 민주주의의 영구적 승리라는 낙관적인 비전은 산산조각이 났다. 서구 민주주의의 심장부인 미국과 유럽에서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고도화된 세계화가 약속했던 경제적 번영의 과실은 불평등의 심화라는 쓴 뿌리로 돌아왔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유토피아적 해방을 가져다주기보다는 감시 자본주의와 정보 생태계의 오염, 그리고 인간 소외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그의 저서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한 거대한 역사적 프레임워크를 제시한다. 자카리아는 작금의 사태를 일시적인 정치적 일탈이나 경제적 경기 순환의 하강 국면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영어 책의 부제에서와 같이 그는 이를 지난 400여 년 동안 인류 역사를 형성해 온 거대한 구조적 힘, 즉 '혁명(Revolution)'과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반동(Backlash)'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해석한다.


책은 현대 정치와 국제 질서의 붕괴 원인을 설명하고, 자유주의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의 본질을 기술하고 있다. 내용을 설명하는 자카리아의 분석틀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구조적 변동으로서의 혁명이다. 그에게 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토대, 기술적 인프라, 그리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는 필연적 반작용으로서의 반동이다. 모든 급진적인 진보는 기존 질서의 안정을 파괴하고, 이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과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자카리아의 해석을 배경으로, 그가 제시한 역사적 사례들(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과 현대의 4대 혁명(세계화, 정보기술, 정체성, 지정학)을 정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가 개인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의미의 공백을 초래했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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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리아는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16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찾는다. 그는 흔히 서구 근대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네덜란드를 최초의 자유주의 혁명의 발원지로 지목함으로써 역사적 논의의 지평을 확장한다.


네덜란드

Revolution (최초의 자유주의 혁명)

16세기말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네덜란드 황금기는 단순한 경제적 번영의 시기가 아니었다. 자카리아는 이 시기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상업적 번영을 체계적으로 장려한 시기로 규정한다.


네덜란드의 혁명은 척박한 지리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해수면보다 낮은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끊임없이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야 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독특한 정치 문화를 형성했다. 물 관리는 중앙집권적 명령보다는 지역 사회의 자발적 협력과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필요로 했다. 이는 네덜란드 사회에 수평적 연대와 실용주의적 타협의 문화를 뿌리내리게 했으며, 훗날 공화주의 정치 체제의 토양이 되었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혁명적인 발명품을 낳았다.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증권 거래소의 탄생이다. 자카리아는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어떻게 봉건적 질서를 해체했는지 설명한다. 과거의 부가 토지와 신분에 묶여 있었다면, 네덜란드의 혁명은 부를 유동화하고 개인의 능력과 모험심에 따라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를 열었다.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경제적 토대였으며, 국가는 상업 활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경제적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인 국가로,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 위그노, 그리고 자유사상가들을 받아들였다. 스피노자와 데카르트가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네덜란드의 출판 자유와 지적 개방성이 있었다. 자카리아는 이를 현대의 '정보 혁명'과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한다.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의 독점을 파괴하고 대중에게 정보를 확산시켰으나, 이는 동시에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과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기도 했다.


Backlash

자카리아의 역사 분석이 돋보이는 지점은 혁명의 빛뿐만 아니라 그 그림자인 '반동'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그는 1672년 네덜란드의 '재앙의 해'를 현대 포퓰리즘의 원형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사실상 지도자였던 대평의회 의장 요한 드 비트는 전형적인 자유주의 엘리트였다. 그는 탁월한 수학자이자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종교적 관용과 자유 무역, 그리고 공화정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침공해 오고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대중은 드 비트의 복잡하고 느린 의회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 그들은 강력한 구세주, 즉 오렌지 공 윌리엄을 원했다.


1672년 8월, 분노한 군중은 헤이그의 감옥으로 쳐들어가 요한 드 비트와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를 끌어냈다. 군중은 두 형제를 잔혹하게 구타하고 살해했으며, 시신을 거꾸로 매달고 신체 부위를 절단하여 나눠 가졌다. 심지어 일부 기록과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검은 튤립》에서 묘사되듯, 군중이 그들의 간을 구워 먹었다는 끔찍한 일화까지 전해진다.


자카리아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도출한다. "진보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무 빠르고 급진적으로 진행되어 대중의 심리적 안정감을 파괴할 때, 그리고 엘리트들이 대중의 정서와 유리될 때, 반동은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기술 관료주의와 글로벌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어떻게 극단적인 포퓰리즘으로 비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이다.


영국

네덜란드의 자유주의 실험은 비극적인 반동을 겪었지만, 그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카리아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을 통해 네덜란드의 혁신이 어떻게 영국으로 이식되고 제도화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던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네덜란드의 금융 시스템(중앙은행, 국채)과 관용의 정신이 영국에 도입되었다.


자카리아는 영국 혁명을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한다. 프랑스혁명이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을 시도하다 실패한 것과 달리, 영국은 기존의 제도(왕정, 의회, 보통법)를 유지하면서 그 기능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점진적 개혁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는 에드먼드 버크적 보수주의와 맞닿아 있는 자카리아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그는 "급진적이지 않은 혁명"만이 지속 가능한 진보를 담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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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확산된 산업혁명은 인류의 삶을 물질적으로 가장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다. 자카리아는 이를 '모든 혁명의 어머니'라 칭하며, 이 시기의 기술적 진보와 그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함을 지적한다.


Plus & minus

산업혁명은 인류를 맬서스 트랩에서 해방시켰다.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었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의 생활 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었다. 농촌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도시 빈민가는 질병과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인들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노동의 존엄성을 상실했다.

주) 맬더스 트랩(Malthusian Trap):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가 식량 공급을 초과하여 식량 부족, 기근, 질병, 전쟁 등이 발생해 인구가 다시 감소하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


러다이트(Luddites)

자카리아는 흔히 기술 발전을 거부하는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묘사되는 러다이트 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평가한다. 그는 러다이트들이 단순히 기계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초래한 사회적 계약의 파기에 저항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정당한 임금과 노동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대해 가혹하게 대응했다. 기계를 파괴하는 자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자카리아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기술 혁명이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양산하며, 국가가 패자들의 고통을 외면할 때 사회적 갈등은 폭력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이는 오늘날 AI와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를 위협받는 현대 노동자들의 불안과 정확히 공명한다.


피털루 학살

산업혁명기 반동의 또 다른 상징적 사건은 1819년의 피털루 학살이다. 맨체스터의 성 피터 광장에 모인 6만 명의 평화로운 시위대는 의회 개혁과 빈곤 해결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기병대를 투입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자카리아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기득권층이 변화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힐 때 얼마나 억압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영국의 지배층은 프랑스혁명의 공포를 기억하며, 자국의 노동자들을 잠재적인 자코뱅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공포의 정치'는 오늘날 기득권 엘리트들이 포퓰리즘 지지자들을 '민주주의의 적'으로만 규정하고 배제하려는 태도와 유사한 구조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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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4대 혁명: 진보의 가속과 다층적 반동

자카리아는 2부에서 과거의 거울을 통해 현재를 비춘다. 그는 현대 사회를 뒤흔드는 혁명을 세계화, 정보, 정체성, 지정학의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분석한다. 이 네 가지 혁명은 서로 얽혀 있으며,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전례 없는 '복합 반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1) 세계화 혁명

지난 40년간의 초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수십억 인구를 빈곤에서 구출했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 내부에서는 제조업의 공동화와 불평등 심화를 초래했다. 자카리아는 이로 인해 전통적인 좌파(경제적 평등) 대 우파(경제적 자유)의 정치 지형이 붕괴되고, 개방 대 폐쇄라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고 진단한다.

현대 정치의 새로운 균열 구조

자카리아는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가 단순한 경제적 불만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가 타인(이민자, 글로벌 엘리트)에게 빼앗겼다고 느끼는 문화적 상실감과 지위 불안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2) 정보 혁명

현대의 정보 혁명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20세기의 기술 혁신(자동차 등)은 거대한 중산층과 고용을 창출했으나, 21세기의 디지털 혁명은 소수의 인력으로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자카리아는 이를 디지털 경제가 실물 경제를 압도하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가치 창출의 불균형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수십만 명을 고용하던 GM과 같은 가치를 창출하지만, 고용 인원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는 고용 없는 성장을 고착화시키며,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정보의 범람과 인식의 부족화

인쇄술이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을 촉발했듯,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은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사회를 부족 단위로 쪼개놓았다. 자카리아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필수 전제인 공유된 사실을 파괴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살지만 서로 다른 정보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3) 정체성 혁명 ☜ 가장 통찰력 있는 분석

가장 주목하는 책의 통찰은 바로 정체성과 공백에 관한 철학적 분석이다.

그는 자유주의가 승리한 결과, 역설적으로 인간의 영혼에 채울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고 진단한다.


성공이자 실패

자유주의는 인간을 종교, 가문, 지역, 계급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개인은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계할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감과 의미, 그리고 초월적인 가치를 갈구하는 존재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종교가 해체된 자리에 남은 것은 차가운 시장 논리와 고립된 원자로서의 개인이다. 자카리아는 자유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낡은 구조가 무너졌을 때 그 공백을 채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부족주의로의 회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원초적인 소속감, 즉 부족주의로 회귀한다. 인종, 민족, 젠더, 종교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가 좌우를 막론하고 맹위를 떨치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소속감'과 '도덕적 확실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파는 혈통적 민족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로, 좌파는 인종과 젠더 정체성 정치로 각자의 부족을 결집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타협이 불가능한 '선과 악의 전쟁'으로 변질된다.


(4) 지정학적 혁명

국내적 반동은 국제 질서의 붕괴로 이어진다.

자카리아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과 함께 지정학적 반동이 본격화되었다고 본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서로 다른 형태의 도전 세력으로 구분한다.


[중국] 성공한 혁명가의 도전
중국은 세계화와 기술 혁명의 최대 수혜자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서구 주도의 경제 질서에 편승하여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 하의 중국은 이제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도전하는 독자적인 모델 —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 를 확산시키려 한다.


[러시아] 실패한 국가의 반동
반면 러시아는 경제적, 기술적 현대화에 실패한 국가다. 푸틴은 이러한 구조적 쇠락을 만회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극단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서구를 '타락한 사탄'으로 규정하고, 러시아를 전통적 기독교 가치와 민족주의의 수호자로 포장함으로써 국내외의 지지를 결집한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반동적 세계관이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된 극단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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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적 리뷰

자카리아의 저작은 방대한 역사적 지식과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결합한 수작이나,

몇 가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지점들이 존재한다.


(Plus) 구조적 통찰과 균형 감각

맥락의 복원

자카리아는 단편적인 뉴스들의 홍수 속에서 독자들이 잃어버린 역사적 맥락을 복원해 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린치 사건을 현대의 온라인 마녀사냥이나 포퓰리즘적 분노와 연결하는 탁월한 서술을 해 낸다.


비경제적 요인의 중시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경제 환원론을 거부한다. 트럼프 현상이나 브렉시트를 설명할 때 경제적 박탈감뿐만 아니라 문화적 인정 투쟁과 지위 불안을 핵심 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현상의 복잡성을 정확히 포착했다.


(minus) 목적론적 서술과 서구 중심주의

휘그 사관의 한계

비평가들은 자카리아의 역사관이 다소 목적론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역사를 자유와 이성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온 과정으로 파악하며,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영미식의 점진적 개혁을 이상적인 모델로 상정한다. 이는 역사적 우연이나 비서구권의 고유한 발전 경로를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주) 휘그 사관(Whig historiography)
- 과거 사건들을 현재의 정치적·이념적 기준에서 해석, 진보의 필연성을 강조.
- 역사를 영웅과 악당의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나누어 서술하는 경향.
- 입헌정체, 개인 자유, 과학적 진보,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
이는 시대착오적 접근으로 비판받으며, 과거의 실패와 복잡한 현실을 간과하는 문제점이 지적됨.


서구 중심적 시각

책의 부제가 "1600년부터 현재까지"를 표방하지만, 주된 분석 대상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에 국한되어 있다. 20세기를 뒤흔든 러시아 혁명이나 이란 혁명, 혹은 아이티 혁명과 같은 비서구권의 중요한 혁명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반동'의 관점에서만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엘리트주의적 시각

자카리아는 대중의 분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해법은 계몽된 엘리트들이 대중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는 그가 비판하는 '대중과 유리된 엘리트'의 시각을 스스로 답습하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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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자카리아는 결론부에서 우리가 이 혼란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급진적인 혁명이 아니라, 무너진 사회적 유대를 복원하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라고 역설한다. 아울러 그는 헌법, 민주적 절차, 자유와 평등이라는 공유된 정치적 가치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의 회복을 핵심적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애국심 대 민족주의, 자카리아는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한다. 민족주의가 우리 대 그들을 나누는 배타적 감정이라면, 애국심은 국가 공동체의 개선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랑과 책임감이다. 그는 진보 세력이 애국심의 언어를 보수 세력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제언한다.


아울러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대중에게 강요하려 해서는 안 된다. 변화는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대중의 삶 속에서 공감을 얻으며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디지털 혁명을 동시에 겪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그리고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는 자카리아가 묘사한 '반동'의 전형적인 징후들이다. 특히 1672년 네덜란드의 비극은 기술적, 경제적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통합과 대중의 심리적 안정을 소홀히 할 때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진보는 필연적으로 저항을 동반한다. 그 저항을 '무지한 자들의 반란'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이면에 깔린 상실감과 불안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정치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자카리아의 말처럼,

"혁명은 막을 수 없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되새겨봐야 할 제언이다. 아울러 옮긴이인 김종수는 아래와 같은 말로 제언한다.

"혁명 즉 모든 급격한 변화에는 반발과 역풍이 뒤따르기 마련이고,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하는 혁명 또는 혁명적 변화는 실패한다"


Backlash 즉 반동의 관리 또한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명심하자는 의미였다.

역시 되새겨볼 만하다.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파리드 자카리아 저, 김종수 역, 2025,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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