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학적 대립 고찰 (에라스무스 vs.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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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의 논쟁만큼 묵직한 충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두 사람의 대결은 단순한 개인적 충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정신과 진리를 향한 상반된 방법론, 그리고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두 비전의 충돌이었다. 1524년 9월,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을 출간한 순간은 유럽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사이의 위태롭던 동맹이 마침내 끊어지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들의 지도자이자 루터의 개혁 정신에 불을 붙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한동안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는 로마 성직자들의 타락을 꾸준히 비판했지만, 비텐베르크 진영의 급진적인 분노에도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위험한 중립을 유지한 채 조용히 움직였던 그였지만, 결국 유럽의 군주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강한 압박 속에서 침묵을 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한 주제가 바로 ‘인간 의지’였다. 그는 면죄부나 교황권 같은 눈앞의 문제를 논쟁의 중심에 두지 않고, 당시 신학 전체를 흔들고 있던 더 깊은 문제 즉, 인간이 과연 신적 은총에 협력할 능력을 갖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에라스무스가 선택한 이 전장은 그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신학적 논의의 핵심에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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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책이 어떤 배경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스무스는 스콜라주의 체계 안에서 움직인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언어와 텍스트에 정통한 문헌학자이자 수사학자였고, 무엇보다도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경건과 도덕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었다.
1466년경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사제 제라르와 의사의 딸 마가렛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이 신분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불안의 근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봉건적 충성 체계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갈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이 덕분에 그는 어느 한 질서에 갇히지 않고, 문예 공화국의 세계시민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그의 지적 형성은 데벤테르 등지에서 공동생활형제단의 후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형제단은 후기 스콜라 철학이 추구하던 복잡한 형이상학을 비켜가고, 내면의 경건과 그리스도의 본받음, 그리고 성경과의 직접적 만남을 강조하는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을 실천하는 이들이었다. 이 경험은 에라스무스에게 건조한 변증법적 신학을 평생 좋아하지 않게 만들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신학에 대한 선호를 키웠다.
그러나 부모의 죽음으로 그는 결국 1487년 스타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가야 했다. 수도원 생활은 고전 장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엄격한 규율과 지적 침체로 인해 그에게 큰 답답함을 안겼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영적 질식기로 회상했고, 이는 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도원 풍자의 원천이 된다.
1492년 사제 서품을 받고 캉브레 주교의 비서가 되면서 에라스무스는 수도원을 떠날 수 있었다. 이후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우신예찬』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게 될 스코투스주의자들의 논리적 말장난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당대 신학이 빠져 있던 형식적 논쟁의 허무함을 깨닫는 경험이었다.
참고) 스코투스주의자들의 ‘논리적 말장난’은 주로 중세 철학에서 존 스코투스와 그의 학파가 복잡한 논리적 구분과 개념 분석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발생한 표현. 이들은 언어와 개념의 미묘한 차이, 다의성, 상호 유비추리 등을 세밀하게 다루며, 특히 보편자 문제, 존재론적 범주, 개념과 실체 사이의 관계 등을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논리적으로는 정확하나 실질적 의미나 현실과 동떨어진, 또는 지나치게 복잡한 언어적/논리적 재구성을 하여 일종의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일상적 언어감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논리적 혹은 철학적 엄밀성을 위해 너무 복잡하고 미묘한 구분들을 무한히 확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결국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ia Christi)’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학문적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천되는 윤리적 제자도를 가리킨다. 에라스무스에게 기독교는 ‘무엇을 아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의 문제였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예수의 삶과 도덕적 모범을 따라가려는 변혁의 여정에 들어서는 존재였다.
이런 비전을 위해 그는 끊임없이 '원천으로'(ad fontes), 곧 성경 본문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에라스무스는 중세 라틴어 성경(불가타)이 잘못된 번역과 오랜 관성 때문에 신학적 오류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본격적으로 원문을 바로잡는 작업에 뛰어들었고, 그 결실이 1516년 출간된 『신약성서 개역』(Novum Instrumentum omne)이었다. 인쇄 기술이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헬라어 신약성경이었으며, 그 자체가 중세 신학에 대한 조용하지만 강력한 문제제기였다.
대표적으로, 그는 마태복음 4장 17절을 전통적으로 번역되던 “고해성사하라”(poenitentiam agite)에서 “회개하라”(metanoeite)로 수정했다. 이 단 한 단어의 차이가 고해성사 제도의 성서적 근거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루터가 『95개조』를 작성할 때 사용할 문헌학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에 불씨를 제공한 셈이었다.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ESV]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그러나 루터와 달리,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해 훨씬 더 낙관적이었다. 그는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을 완전히 타락해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 대신 상처 입었지만 여전히 존엄하며, 교육을 통해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했다. 이런 교육적 낙관주의는 그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에라스무스에게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도록 훈련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려면 최소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면, 그리스도의 철학 즉, 윤리적 모방의 삶으로 부름받는다는 생각은 결국 인간에게 너무도 잔인한 요구가 되고 만다. 그는 이러한 일관된 신념 위에서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끝까지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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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년 『자유의지론』의 출판은 에라스무스가 자발적으로 기획한 학문적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압력 속에서 마지못해 떠안은 결과에 가까웠다.
1517년부터 1520년 사이, 그는 매우 아슬아슬한 중도적 입장을 지켜왔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면죄부 비판과 성직자 타락에 대한 지적에 동의했고, 루터가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작센 선제후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루터가 심문도 없이 로마로 압송되는 일을 막아내며 초기 박해로부터 그를 보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루터의 신학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그는 공의회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법을 불태우며,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에라스무스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는 루터의 급진적 움직임이 기독교 세계의 일치를 흔들고, 자신이 평생 지켜온 인문학적 이상이 종교 전쟁의 잿더미 속에 묻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했다. 에라스무스는 내부로부터 천천히 고쳐나가는 개혁을 꿈꿨지만, 루터는 급격하고 파괴적인 정화를 요구했던 셈이다.
1521년이 되자 에라스무스가 붙잡고 있던 중도는 사실상 붕괴하고 있었다. 보름스 칙령은 루터를 법외자로 선언했고, 가톨릭 지도부에게 에라스무스의 침묵은 점점 공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고 루터가 부화시켰다”는 비난과 함께, 숨어 있는 루터파라는 의혹까지 받았다.
압박은 권력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그의 옛 학우이자 로테르담 출신인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는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 에라스무스의 ‘강력한 펜’을 독일의 이단자들을 향해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의 헨리 8세와 턴스톨 주교 역시 루터를 비판한 뒤, 에라스무스에게도 정통성을 증명하라는 압박을 더했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에라스무스는 결국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교회 내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인문주의적 개혁 구상을 루터파의 분열적인 운동과 명확히 구별해 보여주기 위해서도 그럴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어디를 공격할 것인가였다. 그는 면죄부나 교황권 같은, 루터와 부분적으로는 의견을 같이할 수도 있는 주제는 피했다. 대신 훨씬 근본적이며 철학적인 문제 바로 ‘자유의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선택은 전략적으로 탁월했다. 루터의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은 곧 에라스무스가 평생 붙들어온 인문주의의 핵심, 즉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도덕적 노력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 글을 통해 로마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 역시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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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론』은 겉보기에는 온화하고 점잖은 논고지만, 그 아래에는 매우 전략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을 쓰면서 교리를 단정하는 선언문이 아니라, 문명화된 논의와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디아트리베’(diatribe, 담론)와 ‘콜라티오’(collatio, 비교)라는 형식을 일부러 선택했다. 이 문체적 선택 자체가 그의 신학적 입장을 드러낸다. 교회나 성경이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이 아니라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드러나는 그의 태도는 루터의 단호하고 단정적인 어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에라스무스는 무엇보다 ‘단언’을 경계했고, 성경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회의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오히려 경건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는 자유의지 문제가 구원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부차적인 문제)에 속하거나, 적어도 교회가 여지를 남겨둔 신비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신비를 억지로 흑백논리로 밀어붙이는 것은 경건이 아니라 분열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에라스무스의 논지는 요약하면 ‘중용’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대의 두 극단적인 견해 사이에 절묘하게 위치시킨다. 전략적으로, 그리고 인문주의자답게.
펠라기우스주의: 인간이 은총 없이도 자연적 능력만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
마니교: 인간의 모든 선택이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신을 악의 책임자로 만드는 이원론적 결정론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마니교적 결정론 쪽으로 너무 기울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은총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은총에 응답할 ‘작고도 필수적인 공간’을 남겨두는 중도를 찾으려 했다. 신인협력설이 바로 그 지점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자유의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유의지(자유선택)란, 인간이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는 것에 자신을 적용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인간 의지의 힘을 의미한다.”
중요한 점은 에라스무스가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인간에게 ‘응답할 힘’, 즉 선택의 능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루터가 암시한 것처럼 의지가 전적으로 죽어버렸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그저 외부에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나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성경 전체를 폭넓게 훑으며,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전제하거나 암시하는 구절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또한 “해야 한다(Ought)는 할 수 있다(Can)를 함축한다”는 논리를 신학적 재료로 삼았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면, 그 명령을 수행할 최소한의 능력 역시 인간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약과 신약에서 수백 개의 계명, 권고, 위협, 약속을 인용한다.
"내가 생명과 사망을 네 앞에 두었은즉... 너는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30:19)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스가랴 1: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요한복음 14:15)
에라스무스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단순하면서도 압도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인간에게 순종할 능력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전신 마비된 아이에게 걸으라고 명령해놓고, 걷지 못한다고 매질한다면,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괴물일 것이다.”
그의 논지는 명확하다.
성경이 사용하는 문법, 즉 “네가 X를 하면, 내가 Y를 하겠다”라는 조건절 자체가 이미 인간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전제가 무너진다면, 성경의 명령은 인간을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은 잔인한 폭군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에라스무스는 물론 반론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위클리프나 루터처럼 신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진영은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능동적 주권’을 암시하는 텍스트들을 갖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출 4:21)
이라는 구절이다.
루터는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바로에게 ‘악을 능동적으로 창조해 넣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 전통을 따라 보다 비유적이고 영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이 바로에게 악을 주입한 것이 아니라,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은총을 거두어, 바로 안의 본성적인 악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내버려 두셨다.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이 처벌을 늦춤으로써, 마치 태양이 밀랍은 녹이고 진흙은 굳히듯, 바로의 오만이 더욱 굳어지도록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
다시 말해, “완악해짐”은 하나님의 개입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인간의 고집이 더 단단해지는 인간적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이 죄의 원인을 직접 만드는 분이 아니라는 신학적 전제를 보호한다. 에라스무스에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은 인간의 철학보다 훨씬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에라스무스가 특별히 무게를 둔 본문은 외경인 집회서(시락) 15장 14–17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를 자신의 의지의 손에 맡기셨으며(left him in the hand of his own counsel)… 불과 물을 네 앞에 두었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손을 뻗으라.”
비록 외경이지만, 그는 이 구절을 통해 고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인간에게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합의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자신의 의지의 손에 맡기셨다”는 말은 그에게 인간 존엄성의 선언문과도 같았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 스스로의 절대적 능력을 제한하셨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에라스무스는 이 문제를 악의 문제와도 연결시킨다. 만약 인간의 의지가 전혀 자유롭지 않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강간, 살인, 신성모독은 결국 하나님이 ‘직접 의도하고 실행한 것’이 되고 만다. 그는 이런 결론이 본성상 지극히 자비로운 하나님과 결코 조화될 수 없다고 보았다. 에라스무스에게 하나님은 무엇보다 선하신 분이며, 이 “실재론적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의 절대 의지만을 강조하는 “유명론적 견해”보다 당연히 우선해야 했다.
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에라스무스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구분을 차용하여 정교한 은총의 분류법을 개발한다.
1) 자연적 은총(Grace of Creation): 창조 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 타락 후에도 이는 어두워진 불꽃으로 남아 있다.
2) 선행 은총 또는 자극하는 은총(Gratia Praeveniens/Excitans): 이것은 죄인에게 예기치 않게 다가와 영적 잠에서 깨우고 회개하도록 의지를 자극하는 하나님의 작동적 은총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3) 협력 은총 또는 완성하는 은총(Gratia Cooperans): 일단 선행 은총에 의해 의지가 깨어나면, 구원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의지가 동의하고 협력해야 한다.
에라스무스는 '걸음마하는 아기와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이 신인협력을 설명한다.
아버지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다(선행 은총).
아버지가 방 건너편에 있는 사과를 보여준다(말씀/약속).
아이가 걸으려고 애쓰지만 비틀거린다. 아버지는 아이를 부축하고 걸음을 인도한다(협력 은총).
아이가 사과에 도달한다.
에라스무스는 묻는다.
“
아이가 걸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없이 할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가 공로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아이의 노력이 '0'인 것은 아닙니다.
“
에라스무스는 이것이 바로 성경적 균형이라고 주장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빌립보서 2:12-13).
5.
루터의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에라스무스가 온건하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쓴 『자유의지론』이 루터를 대화의 자리로 이끌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착각에 가까웠다. 루터의 응답은 1년 뒤인 1525년 12월에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말 그대로 폭풍과도 같았다. 『노예의지론』은 에라스무스 책의 네 배 분량에 달했고, 이후 루터 신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게 된다.
루터는 먼저 에라스무스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정면 비판한다. 그는 『자유의지론』의 ‘회의적’ 어조를 조롱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성령은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은 의심이나 추측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며 모든 경험보다 확고한 단언들이다.”
루터에게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확신의 학문이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해 단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에라스무스의 모호한 태도는 루터에게 겸손이 아니라 믿음의 결핍으로 보였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퍼부으면서도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에라스무스가 교황권이나 면죄부처럼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논쟁의 본질—자유의지—을 겨냥한 것을 인정하며, 그의 선택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루터 역시 자유의지가 양측의 근본적 갈등 지점임을 분명히 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은총은 ‘은총’이 아니라 ‘보상’이 되고 만다. 만약 인간이 구원에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완전히 잃어버린 자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부분적으로 약한 자’를 도와준 셈이 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정의한 자유의지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는 인간의 의지를 ‘짐승’에 비유한다. 짐승은 자신이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타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고, 사탄이 타면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간다. 즉, 의지는 스스로 기수를 선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논리—“해야 한다(Ought)는 할 수 있다(Can)를 포함한다”—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율법의 명령은 순종할 능력이 있어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 명령을 전혀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자신에 대한 절망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바로(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해짐’에 대한 해석에서도 루터는 한 치의 타협이 없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비유적 해석을 “교묘한 말장난”이라고 치부하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어떤 이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며, 그 이유나 목적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 범위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루터는 여기서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개념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며, 그의 예지는 오류가 없기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불변의 필연성’ 아래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6.
에라스무스의 재반박 — 『히페라스피스테스』와 최후의 변론
역사 서술은 종종 『자유의지론』과 『노예의지론』 두 저작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이후의 논쟁은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넘어가곤 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루터의 거센 공격에 깊은 충격을 받은 그는 1526년과 1527년에 걸쳐 방대한 두 권의 반박서, 『히페라스피스테스』(Hyperaspistes, ‘방패를 든 수호자’)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논증을 한 줄 한 줄 끈질기게 해부한다. 그는 루터의 결정론이 시민 질서와 도덕적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만약 루터의 가르침이 대중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내가 선택된 사람이라면 어차피 구원받을 것이고, 저주받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도 소용없는데, 왜 금식하고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에라스무스에게 루터의 신학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들고, 결국 자신이 만들어놓은 결함을 근거로 인간을 벌하는 “잔인하고 불의한 폭군”으로 묘사하게 되는 위험을 품고 있었다.
『히페라스피스테스』는 에라스무스가 단순히 도덕적 충고를 늘어놓는 인문주의자가 아니라, 루터의 아우구스티누스적 절대주의에 맞서 오리게네스, 요한 크리소스톰, 히에로니무스 같은 교부들의 사상을 깊이 있게 활용할 줄 아는 유능한 신학자였음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저작은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구조 때문에 간결하고 명료했던 『자유의지론』만큼 읽히지는 못했다. 더구나 이미 시대는 루터파와 가톨릭 진영으로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있어, 진지한 대화를 이어갈 여지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이기도 했다.
7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은 단순한 16세기 사건을 넘어, 그 이후 500년 동안 서구 기독교의 신학적 좌표를 결정지은 거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이어진 트리엔트 공의회가 마침내 교리를 정리하고자 모였을 때, 비록 에라스무스의 저작들은 성직자 비판 때문에 이미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지만, 회의장에는 마치 그의 사상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공의회의 ‘칭의 교령’(제6회기)은 결국 에라스무스의 견해가 우세한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트리엔트는 칭의를 인간의 협력을 포함하는 과정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놀랍도록 에라스무스의 3단계 은총론과 닮아 있었다.
죄인은 선행 은총에 의해 깨어난다 (자신의 공로 없이).
죄인은 이 은총에 동의함으로써 협력해야 한다.
죄인은 이 은총을 거부할 수 있다.
이 결정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지나친 인간 중심도, 루터와 칼뱅의 단독설(Monergism)도 거부한 가운데, 에라스무스적 신인협력설을 가톨릭의 공식 교리로 자리잡게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영향은 가톨릭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 결정론(루터 『노예의지론』의 직계 후손 격)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죽으셨으며, 은총은 인간에 의해 거부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사실상 에라스무스가 주장했던 신학적 틀을 되살린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면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이 흐름을 더욱 발전시킨다. 웨슬리의 핵심 교리인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회복시켜 복음에 반응할 수 있게 하신다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에라스무스가 말한 “걸음마하는 아기에게 도움을 주는 은총” 비유의 재해석이었다.
이 흐름 덕분에 에라스무스가 옹호한 자유의지는 오늘날 로마 가톨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신학적 전통인 감리교와 성결교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고, 신앙과 실천의 중요한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8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갈등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비극에 가깝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옳음’,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는 두 필수적 차원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은총의 진리를 위해 싸웠다.
구원은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달려 있다는 그의 확신은 실존적인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교만을 꺾고, 죄책감에 떨고 있는 양심에게 절대적인 확실성을 주고자 했다.
반면 에라스무스는 책임의 진리를 지키려 했다.
인간이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도덕적 필연성을 옹호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고자 했다.
『자유의지론』은 그 결과, 기독교 인문주의의 기념비처럼 남게 되었다. 이 책은 르네상스가 품었던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가 종교개혁이 드러낸 인간 죄성의 현실주의와 충돌한 바로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장면만 놓고 보면 16세기의 승자는 루터였을지 모른다.
그의 열정은 에라스무스의 온건함이 불러일으킬 수 없었던 거대한 종교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근대의 흐름 속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오히려 에라스무스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서구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관용, 교육, 인간 자율성이라는 에라스무스적 가치가 결국 초창기 종교개혁이 가졌던 교조적 결정론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역설의 수호자’로 남는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신비를 단순한 필연성의 논리로 환원할 수 없다고 믿었다. 오히려 은총과 자유가 서로 긴밀하게 얽히고 영향을 주고받는 그 미묘한 공간 속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인다고 보았다.
9.
두 주장을 비교 정독한 상황에서, 독자이자 신앙인으로서 나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픈 마음이다.
텍스트를 해석할 때 그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진지한 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듯, 신앙 역시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지한 대화 위에서 형성되는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학습이 더 깊어지면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의 나의 결론은 분명하다.
에라스무스 윈(win)!
참고자료
1.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해제) https://books.google.com.ec/books?id=4LpbAAAAQAAJ&printsec=frontcover&hl=it&pli=1#v=onepage&q&f=false
2. 루터의 『노예의지론』: (해제) https://www.google.co.kr/books/edition/Beati_Patris_Martini_Lutheri_Liber_de_Se/3-LlodhstmgC?hl=it&gbpv=1&dq=De+servo+arbitrio&pg=PA127&printsec=frontc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