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I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장면 1.
오래전, 라디오에서는 매일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어린이 드라마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가 흘러나왔다. 국민학교 저학년이던 나에게 그 시간은 늘 기다려지는 순간이었고, 라디오 앞으로 자연스레 다가앉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루치와 아라치가 하늘을 종횡무진 가르며 악당 파란해골 13호와 맞서 싸우던 장면들은, 상상만으로도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던 듯한 해방감으로 또렷이 남아 있다.
몇 년 뒤, 그 이야기가 만화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오히려 낯선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펼쳐지던 장면들이 이제는 정해진 그림과 움직임으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화면 속 캐릭터들은 내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고, 오히려 그 제한된 모습들이 나만의 세계를 침범하는 듯해 묘한 불편함마저 느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면 2.
소설은 때때로 라디오 드라마를 닮았다.
독자 각자가 상상의 여백을 채워 넣으며 스스로 장면을 그려내도록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단편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서사가 충분히 이어지지 못한 채 어느 순간 갑자기 끊기는 느낌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편에 깊이 몰입해 있다가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앞선 이야기가 아직도 내 안에서 정리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상황과 마주해야 하는 일이 어쩐지 서늘하게 낯설다. 게다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뚜렷하게 읽히지 않을 때면 집중이 흐트러지고, 이야기 사이를 떠도는 듯한 감각이 내심 불편하다.
서유미의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도 내게는 비슷한 경험을 주었다. 읽는 내내 마치 장편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첫 작품인 〈토요일 아침의 로건〉의 인물이 다음 이야기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그 연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쓰며 페이지를 넘겼다. 각각의 이야기가 장별로 독립적으로 흘러가다가도, 결국 하나의 큰 서사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기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도 그 바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
어느 한 장면에서, 팽팽하게 조여 있던 마음의 실타래가 풀어지듯 서사를 이어보려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던 거다. 날을 세워 억지로 서사를 이어가려던 나의 집중을, 작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스르르 풀려나게 해 버린 셈이었다.
집무실 문을 열면서 위쪽에 붙어 있는 본부장 김동희, 라는 아크릴 명판을 쳐다보았다. 검은색으로 음각된 ㅁ과 ㅇ에 회색 먼지가 껴 있었다.
(중략) 노트북을 켜고 캡슐을 골라 머신에 넣은 뒤 커피를 내렸다. 창문을 닫고 책상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메일함을 열었다. 비로소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메일에 답을 쓰다 말고 동희는 세 평 남짓한 자신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창가 쪽에 업무용 책상이, 중앙에 6인용 원목 테이블이 있고, 벽쪽에 책꽂이와 수납을 겸한 5단 책장과 냉장고, 맞은편 벽에 이동식 화이트보드가 서 있었다. 직원들이 지나가면서 말하고 웃는 소리가 안으로 흘러들긴 했지만 분리된 공간이라 대체로 조용했다. 창고로 쓰던 곳인데 오년 전에 본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집무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_ '밤이 영원할 것처럼' 중에서 『밤이 영원할 것처럼』 200쪽
이 묘사들을 읽는 동안, 몇 해 전 그러니까 퇴직을 앞두고 지내던 그 시절의 나의 집무실이 오버랩되었다. 세부적인 디테일은 달랐지만, 전체 분위기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프린터와 옷장, 화상회의용 CISCO 대형 모니터 시스템이 놓여 있던 자리를 제외하면, 남은 공간을 채우고 있던 냉장고나 캡슐 커피기기 등의 정서는 그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을 읽던 바로 그 순간, 정년을 앞두고 맞이했던 내 마음의 결이 불쑥 되살아났던 것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 자리에서 뭔가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한 촉감, 존재의 무게가 서서히 희미해지는 듯했던 느낌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아졌다.
서유미 작가의 문장들 밑바닥에 흐르고 있던 정서가 바로 그 ‘상실감’이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뒤의 내 반응은 분명 달라졌다.
“아, 그런 얘기였구나!!!”
장면 3.
『밤이 영원할 것처럼』의 일곱 편 단편들은 현대의 생활인이 일상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해 기울이는 애씀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애씀 자체가 역설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불안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작가는 특별한 사건 대신, 아주 사소한 순간들 즉 방 안의 빛, 창문 너머의 소리, 몸에 밴 일상의 리듬 등에 천착하며, 그 안에서 인물들의 내면이 흔들리는 결을 포착한다.
정말 괜찮으세요?
동희는 데님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아직 뺨에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직원을 바라보며 주머니 안의 명판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지 않다고 답하기엔 직원이 너무 어려 보였다. 동희는 괜찮다, 와 괜찮지 않다, 사이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직원의 앞치마에 묻은 얼룩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_ '밤이 영원할 것처럼' 중에서 『밤이 영원할 것처럼』 218쪽
이 연작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결국 '상실'이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잃어버렸거나, 잃어가고 있거나, 곧 상실할 것만 같은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것은 나이 들어가는 신체일 수도 있고(〈다른 미래〉), 하루의 위안을 주던 장소일 수도 있으며(〈밤의 벤치〉), 한때의 욕망을 상징하던 집과 물건일 수도 있다(〈그것으로 충분한 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희미해지는 실존적 상실로 이어진다(〈기다리는 동안〉).
장마가 끝난 뒤 경진의 가족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휴가에서 돌아온 경진이 밤의 산책에서 마주한 건 나무와 벤치가 아니라 몇 대의 자동차들이었다. 원래 주차장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동차 세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경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살아온 전나무 네 그루가 어디로 갔는지, 모였다 흩어지던 고양이들의 집회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101동 여자의 맥주 마시던 밤과 자신의 차갑고 달콤한 휴식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벤치와 나무가 아니라 다른 것이 사라진 것 같았다.
_ '밤의 벤치' 중에서 『밤이 영원할 것처럼』 63-64쪽
그 배경에는 오늘의 생활인이 지닌 특유의 감수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구원보다는 생활의 질을, 명예보다 내면의 존엄을 더 중시한다. 날씨와 절기, 집안의 작은 도구, 동네 이웃의 표정 같은 일상의 디테일들을 섬세하게 감지하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다른 미래〉에서 남편을 잃은 중년 여성이 보이는 태도는 그 대표적 예다. 삶의 균열을 마주하면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간신히 지켜내려는 조용한 노력과도 같은.
얼굴 위로 비가 쏟아지는데 가릴 것도 없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으니 시원하고 후련했다. 왜 여태 이런 기분도 모르고 살았을까. 딸은 딸대로, 사위는 사위대로 자기 자리에서 파도를 맞았다. 파도 하나하나의 높이가 다 달랐고 최고의 파도는 계속 경신되었다. 비 오는 바다에서 파도를 맞는 건 살면서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그게 뭐라고 좋아서 눈물이 났다.
진은 자신도 모르게 더 큰 파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젖은 옷으로 어떻게 호텔로 돌아갈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_ '다른 미래' 중에서 『밤이 영원할 것처럼』 156-157쪽
작가의 각 단편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들추지 않는다. 고통을 장황하게 묘사하기보다,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장면을 조용히 비춘다. 〈토요일 아침의 로건〉을 보자. 뇌종양 진단을 받은 로건의 내면을 파고드는 대신, 화자는 그가 토요일 아침 한강공원의 늦가을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풍경의 잔잔함 속에서 비로소 로건의 삶이 흔들리고 있음을 독자가 스스로 감지하게 만드는 방식인 것이다.
수업시간에 젤다는 계절과 관련된 표현들을 짚어주었다. 젊었을 때 그는 가을을 탄다는 게 뭔지 몰랐다. 오십대가 되니 그게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삶에서도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고 거울에 비친 얼굴빛은 낙엽을 닮아갔다. 그런 것들이 그의 마음 한 구석을 바스라뜨렸다. 그는 강 쪽으로 걸어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강물과 멀리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과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오리배들을 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배들이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묶고 있는 줄을 풀면 오리배들은 어디로 떠내려갈까. 영어 수업을 그만두게 되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는 알 수 없었다.
_ '토요일 아침의 로건' 중에서 『밤이 영원할 것처럼』 14-15쪽
〈그것으로 충분한 밤〉의 ‘유선’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에 대한 의혹이 짙어지는 순간에도, 서술은 비밀의 중심을 파고들지 않는다. 다만 집 밖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소리가 문틈으로 스며드는 듯한 잔향만을 전한다. 모든 것은 과장되지 않고, 절제된 감정선 위에서 흘러가도록 놓아둔다.
그들이 포크를 들고 케이크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유선은 진희가 두른 스카프를 유심히 보았다. 베이지색 바탕에 네이비색 명품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트윌리 스카프는 진희의 얼굴과 잘 어울렸고 가늘고 긴 목에 생기기 시작한 주름을 효과적으로 가려주었다. (중략)
유선은 손님들이 있는 식탁 대신 침실의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아주 먼 데서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선은 옷장 문을 열고 가운데 작은 서랍에서 둥글게 말아놓은 스카프를 꺼냈다. 그것을 펼쳐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달 전 결혼기념일 저녁에 종우가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들어간 쇼핑백을 들고 귀가했을 때, 유선은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생각했다. 종우는 그날 거래처 미팅 때문에 백화점에 들렀는데 쇼윈도에 걸려 있는 이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고 했다.
—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어.
_ '그것으로 충분한 밤' 중에서 『밤이 영원할 것처럼』 74, 78쪽
문학평론가 황종연은 이러한 서유미의 서술 방식을 두고, “일상생활의 뻔한 장면 속에 숨은 경이를 알아보는 비범한 눈”이라 평하며 한 미술사가의 말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일상의 세목 안에 계신다”라고.
이 인용글은 소설집을 읽는 내내 줄곧 공감되었다. 세목(디테일)의 세계가 섬세할수록, 우리는 상실을 직면하면서도 그 불안을 지나치게 증폭시키지 않을 수 있다. 그 건조한 묘사, 감정의 과잉을 피한 거리감 덕분에 독자인 나는 작품 속 인물들의 아픔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게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 서유미가 독자인 나에게 건네고 싶었던 조용한 안전장치가 아니었겠나.
장면 4.
『밤이 영원할 것처럼』은 시류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또렷한 문학적 자리를 확보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어느 평론가는 이 소설집이 “단아함과 미묘함이 갖춰진 형식미”를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더불어 극찬까지 한 바 있다고까지 전해진다.
이러한 형식적 완성은 저자 서유미가 현대인의 일상적 안락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상실의 정서를 미시적 구체 묘사로 끌어올리는 그이만의 서사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앞서 언급했듯, 평론가들은 그녀의 서술이 독자에게 감정적 거리를 부여해 자기 연민이 아닌 차분한 성찰로 이끄는 힘을 지녔다고 말한다. 나 또한 몇 년 전의 회사 집무실을 자연스레 떠올렸지만, 감상에 빠져드는 대신 한 발 물러서 그때의 감정을 되짚어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서술의 거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성취가 비평가들만의 평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 독자층에서도 작품의 공명도는 매우 높다. 어느 인터넷 서점(YES24) 회원들의 평균 별점이 9.8/10에 달하고, 특히 20, 30대 독자층에선 만점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오늘의 세대가 겪는 존재론적 불안을 얼마나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는지를 웅변하는 듯하다.
결국 서유미의 문학은 단정한 문장과 세밀한 감각의 묘사라는 형식적 특질을 통해 독자에게 적당한 정서적 거리를 제공하고, 자기 연민이 아닌 성찰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서서히 내적 회복을 이루도록 유도되는 것이다. 어떤 독자가 남긴 말처럼, “사회적 고통이 일상화된 불안의 시대에 문학이 소비재가 아니라 존재론적 치유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취”가 바로 이 소설집이 가진 품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정리하자.
얼마 전부터 해석학을 학교의 필수 교양 과목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오고 있다.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단순한 학문적 기술만이 아니라 시민적 자질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왜곡된 담론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 ‘해석 역량의 부재’라는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그런 점에서 서유미의 소설은 흥미롭다. 앞서 말했듯, 그는 결코 작가의 목소리를 서사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감정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지도 않고, 독자의 해석을 과도하게 안내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섬세한 디테일로 상황을 놓아두는 데 그친다. 마치 “여기, 당신이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세계가 이렇다”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다.
그리하여 독자는 텍스트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저자, 텍스트, 독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서로 얽히며 의미가 생성되는, 해석학적 장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게 유도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유미 작가로부터 시작된 서사는 결국 독자의 인식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독자는 인물들의 눈짓과 숨결, 묘사된 사물들 사이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고, 때로는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며 성찰에 이른다. 작품은 그렇게 독자를 해석하는 주체로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단순한 이야기 묶음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종의 감각 훈련장처럼 읽힌다.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것은 단단한 메시지만이 아니라, 생각하라고, 그리고 스스로 해석해 보라고 요청하는 듯하다. 이는 시대에 꼭 필요한, 조용하지만 강력한 문학적 태도이다.
이쯤 되면, 추천 목록에 올려두지 않을 이유가 없다.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