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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 관점'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by KEN

들어가기에 앞서…


생각이란 게 한번 풀리기 시작하면 금세 통제를 벗어나 널뛰기를 합니다. 좌우로 튀고, 위아래를 오가고, 소설 얘기하다가 에세이로 가고, 생산성 담론을 얘기하다가 어느새 신학을 하고 있고, 오방색을 들추다가 황해의 색깔을 궁금해하고…. 말 그대로 망아지가 날뛰듯 마음속이 어지럽습니다.


첫눈치고는 참 많이도 오던 지난 오후에, 역시나 오락가락 정신마저 멍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 관련 글을 보다가, 그 와중에 시온주의 신학 논문을 뒤적이더니, 결국 다시 '바울의 새 관점' 문제로 돌아왔습니다.

쓰다 중단하고 저장해 뒀던 것을 다시 엽니다. 톰 라이트. 아니 N.T. 라이트 관련 얘깁니다. 학계에서는 후자를, 대중적 공간에서는 전자를 주로 사용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어쨌든 그이의 주장을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다.



0.


N.T. 라이트는 현대 신학계에서 가장 넓은 영향력을 가진 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신학은 전통적 복음주의의 경계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넘어가며 성경을 읽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혔습니다. 그 전환의 첫 문이 바로 그가 대중화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입니다. 하지만 라이트의 여정은 단순히 바울 해석을 새롭게 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아요. 그 너머에 더 큰 지평이 있습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 관점’은 그가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 Rethinking Heaven, the Resurrection,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에서 제시하는 우주적 종말론과 선교적 비전을 떠받치는 신학적 토대입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그는 ‘칭의’를,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왔던 개인적인 법정적 사건으로 보기보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선언, 즉 공동체적 인준으로 재해석합니다(언약적 율법주의 배경—이방인 신자 또한 그 언약백성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관점). 이렇게 ‘칭의’를 재구성하니 구원은 개인의 영혼이 천국에서 신분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 회복, 곧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 프로젝트 안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과제는 이것입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이 전환, ‘칭의’에서 ‘새 창조’로의 이동이 그저 용어 몇 개를 바꾼 수준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학의 기반 자체를 새롭게 재구축하는 보다 근본적인 전환인지 따져보는 일입니다. 이 분기점을 분별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중요한 해석학적 과제인 것입니다.

주) 바울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은 1980년대 등장한 신학적 해석 흐름으로, 바울의 율법과 칭의에 대한 전통적 종교개혁적 이해를 1세기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이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을 구원론 중심이 아니라, 교회론적·공동체적 문제로 이해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새 관점은 특히 1세기 유대교가 율법을 ‘언약적 신분을 유지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해했음을 밝히며,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 역시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적 행위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언약적 신분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행위와 관련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에서 바울의 칭의는 단순한 법정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여되는 새로운 신분과 그에 수반하는 내적·외적 변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표적인 새 관점 학자로는 E.P. 샌더스(새 관점의 기초 작업), 제임스 던(‘새 관점’이라는 용어 제시), N.T. 라이트(새 관점의 신학적 확장과 대중화), 크리스터 스텐달, 존 바클레이 등이 있다.



1.

바울에 (관한) 새 관점


라이트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개혁 이래 굳건히 자리 잡은 바울 해석과 정면으로 다른 길을 걷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의 ‘새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왜 그토록 과감한 종말론과 선교론을 펼칠 수 있었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책은 종종 완전히 별개로 다루어져 온, 그러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내가 열렬하게 믿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의 궁극적인 희망은 무엇인가?"이다. 두 번째는 "현재 세계 안에서의 변화, 구출, 변혁,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주된 대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의 희망'을 '천국행' 혹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구원'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두 질문은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의 희망'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new heavens and new earth)을 바라는 희망이라면, 그리고 그 희망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미 실현이 되었다면, 이 두 질문을 서로 연결시킬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됨을 알게 된다. 나는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을 듣고 놀라는 것을 보았다. 즉 기독교의 희망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무척 다르다는 사실과, 바로 그 희망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온전한 기초를 제공해 주고 활력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에 놀란다. _ (N.T.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20-21쪽)


라이트는 E.P. 샌더스가 제시한 1세기 유대교의 모습을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샌더스의 핵심 주장, 기억하시죠?

전통적 개신교가 생각해 온 1세기 유대교, 즉 ‘율법 지켜서 구원받으려는 종교’라는 이미지는 실제와 거리가 머다란 것입니다. 그 이미지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논쟁을 1세기 유대교에 투영하여 씌워진 것이라는 얘기죠.

샌더스는 유대교의 구조를 ‘언약적 율법주의’라 부르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언약에 들어왔고, 율법은 그 언약 안에 머무르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해 구원받은 족속들이라는 이미 획득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이트는 이 관점을 바울 해석의 비가역적인 전제로 삼습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구조가 새로 짜이기 시작하죠.


이 역사적 재구성(믿는 이방인 포함)을 받아들이면, 바울이 씨름하던 핵심 문제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 즉 자기 노력(행위)으로 구원받으려는 사람들과 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라이트의 설명은 다릅니다. 바울의 적수는 개인의 구원 문제에 매달린 사람들이 아니라, 메시아가 오신 이후에도 ‘누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냐’를 민족적 기준으로 고수하려던 유대 민족주의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점이 바뀌면, 바울 신학의 핵심 용어들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통적 해석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 즉 (선악인을 나누는) 분배적 정의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라이트는 이 개념의 틀을 아예 옮겨 버립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예수 안에서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언약적 충실성이라는 겁니다.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이행의 신실함이라는 것이죠.


아울러 전통적으로 ‘율법의 행위’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쌓는 공로적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라이트는 이 범위를 유대인의 민족적 경계표지로 축소합니다. 할례, 음식 규례, 안식일 규례 이런 것들이죠. 즉, 문제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이 행위들을 가지고 이방인을 배제하려고 했던 민족적 우월감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와 ‘율법의 행위’가 바뀌어 보였으니 ‘칭의’도 자연스럽게 재해석됩니다. 전통적으로 칭의는 “죄인이 법정에서 무죄 선언을 받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칭의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선언하는 교회론적 개념이다.” 즉, 칭의는 소속의 선언이지, 개인이 구원받는 과정 그 자체의 설명이 아니다는 것이죠.


이 모든 재구성은 바울 신학의 중심축을 개인적 죄책·영혼구원이라는 좁은 틀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우주적 성취라는 큰 서사로 이동시킵니다. 라이트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문제는 개인의 내면적 죄책이 아니라 깨진 언약 공동체이며, 해결책은 천국으로의 탈출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깨진 언약을 다시 회복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회복된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종말론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도피가 아니라 회복, 폐기가 아니라 재창조, 영혼의 이탈이 아니라 세계의 갱신.”이라는 것이죠



2.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비전


라이트의 새 관점은 결국 전통적인 내세관에도 손을 대게 됩니다. 그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력해요. “만약 바울이 말하는 칭의가 개인 영혼 구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선언이라면, 그 종말론도 당연히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시작해서 그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희망 자체를 재검토하게 만듭니다.


왜 라이트는 전통적 내세관을 문제 삼는 것일까요? 라이트는 현대 기독교가 ‘내세’를 이해하는 방식에 성경보다 플라톤적 이원론의 영향이 더 짙게 배어있다고 말합니다.

- 영혼은 고귀하다.
- 육체와 물질세계는 저급하다.
-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 더 높은 영적 세계로 간다.


이런 식의 사고죠. 우리가 자연스럽게 “죽으면 천국 가지”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그리스 철학에서 온 관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기독교의 희망이 본래 지니고 있던 구체성과 역사성을 잃어버리고, 그냥 세상이 잘 풀릴 거야 정도의 모호한 낙관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겁니다. 라이트는 이 부분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언어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불멸성’이라는 단어는 ‘육체가 없는 불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때로는 ‘부활’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부활한 육체에 대한 바울의 요점을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분명 육체일 것이나 필멸성에 복속되지 않는 육체일 것이다. 그런 ‘불멸의 육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도 이상한 것이어서,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야기했던 것이 정말 그것인지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
‘불멸의 육체’를 믿는 이러한 신앙과 ‘불멸의 영혼’을 믿는 신앙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은 불멸의 요소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보통 ‘영혼’이라고 일컬어졌다.(앞에서 C. S. 루이스를 칭찬하기는 했지만 그도 이 함정에 빠진 듯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불멸성’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며, 그것을 은혜로운 선물로써 자신의 백성과 나누시는 것이다.
_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10장 중에서


라이트가 말하는 종말론의 중심은 아주 명확합니다.

- 종말은 도피가 아니다. 회복이다. (영혼의 탈출이 아니라 세계의 갱신)
- 종말은 폐기가 아니다. 완성이다. (세상의 멸망이 아니라 완성)

‘구원’을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탈출로 이해하는 관점은 단순히 약간의 변경과 수정을 가하기만 하면 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틀린 관점이다. (중략) ‘구원’이란 현재에서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의미하고 미래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고향으로 가서 평화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는 관점 (중략) 그러나 다시 한번 요점을 최대한 강조하자면, 그러한 믿음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_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12장 중에서
대부분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은-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구 비그리스도인들은-기독교가 어느 정도 플라톤의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의 찬송가와 시들이 생각 없이 영지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냥 지나가네’ 식의 영성(“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나는 그냥 지나갈 뿐이네” 하는 찬송가처럼)이 어느 정도 전통적 기독교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영지주의적인 태도를 부추긴다. 창조된 세계는 궁극적인 세상과 무관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 어둡고 악하고 음침한 곳이기 때문에, 원래 다른 차원에 존재하던 우리 불멸의 영혼들은 허락되는 한 빨리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태도다. 그 결과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주된 목적은 ‘천국행’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천국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본문은 ‘천국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고, 로마서 8:18-25이나 계시록 21-22장처럼 그와 반대되는 본문이 나오면 마치 그런 본문은 존재하지 않는 양 무시한다. _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5장 중에서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다.
- 예수의 부활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점이자 모델(원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추구하는 최종 소망은 우리가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이 땅으로 내려와 새 창조를 완성하는 것(요한계시록 21–22의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라이트가 그토록 강조하는 파루시아(재림) 해석이 등장합니다.

라이트는 재림을 하늘에서 지구로 이동해 오는 식의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이미 통치하고 계신 왕이 자신을 가려온 장막을 걷고 드러나 나타나시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버리거나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임재로 충만하게 하심으로써 세계를 회복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재림은 파괴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라이트의 중요한 포인트는 여기서 더 이어집니다.

종말론은 미래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현재적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 종말은 끝이 아니라 목적지를 보여주는 지평이다.
- 새 창조는 먼 미래의 위로가 아니라 현재 행동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결국 질문은 이 하나로 귀결됩니다.

“부활로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된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것인가?”

라이트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삶, 교회의 사명, 사회적 책임을 전부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3.

통합적 분석: 칭의, 부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축'


이번 섹션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 관점의 칭의론과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에서의 종말론은 서로 따로 떨어진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둘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라이트의 사고방식은 교리 하나하나를 각각 따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신학적 요소를 하나님 나라라는 중심축에 연결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여러 신학적 분과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얽히며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는 겁니다.

비록 이번에는 ‘나타나다’와 ‘파루시아’가 사이좋게 나란히 오지만 말이다. 물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그분은 ‘현존’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타나다’를 강조하는 이유는 비록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그분이 ‘오시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분이 현재 그분이 계신 그곳에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은 우리가 속한 시공간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는 세계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땅’-와는 다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서로 교차되어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삶에서 교차된다. 언젠가는 이 두 개의 세계가 완전하게 통합되어 서로를 온전히 다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바울과 요한이 이야기하는 그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_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8장 중에서


라이트 신학의 중요한 장치는 바로 두 단계 칭의론입니다.


① 초기 칭의 (Initial Justification)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는 사건입니다. 현재적 선언이고,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들어온 소속 확인이죠.


② 최종 칭의 (Final Justification)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낸 전 생애적 삶의 열매를 두고 하나님께서 “그래, 너는 참으로 나의 언약 백성이었다”라고 최종적으로 변호(vindication) 하시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최종 칭의가 초기 칭의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된 구조라는 점입니다. 라이트는 이렇게 말하죠. “지금 당신이 행하는 것들… 그것들은 하나님의 미래 속으로 이어질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행하는 정의·자비·아름다움의 실천은 그저 착하게 사는 시민 윤리가 아니라, 최종 칭의를 위한 언약적 신실함의 증거이며 다가올 새 창조를 미리 짓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작업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언급하고 있다(롬 2:16). 바울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 일부 사람들이 바울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오해했는지 알 수 있다.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 ‘재판관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행하실 심판은 로마서 14:9-10, 고린도후서 5:10 그리고 그 외의 본문들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_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9장 중에서


라이트에게 부활 신앙은 단순히 미래에 우리도 부활할 거야라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새 창조의 흐름 속으로 삶을 재배치하는 새로운 인식 방식입니다. 라이트는 이것을 ‘사랑의 인식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말하는 부활 신앙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사랑이다. 악과 불의를 바로잡고, 침묵하지 않고, 환경을 지키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우리가 부활했을 때 보게 될 그 새 나라를 지금 이 자리에서 가리키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 신앙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세상을 바로잡는 힘입니다.


정리하자면 라이트의 신학은 개인의 영혼 구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시는 선교(Missio Dei)라는 더 큰 틀로 바울 신학을 재배치합니다.


그의 칭의론은 누가 이 선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인지 규정하고,
그의 종말론은 그 선교가 어디로 향하는지, 왜 지금 중요한지를 보여주며,
그의 부활 신앙의 인식론은 그 선교를 수행하는 동력과 삶의 방향을 제공합니다.


이 셋은 ‘응용’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하나의 통합된 구조입니다. 그래서 라이트 신학은 따로 떼어 놓고 읽으면 오히려 잘 보이지 않고, 전체 흐름 안에서 연결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이런 통합적 비전은 동시에 여러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언약 공동체의 경계와 행위의 역할, 칭의의 법정적 의미가 약해지는 문제, 종말론의 현재적 강조가 낳는 신학적 긴장 등은 여전히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트의 공헌은 분명합니다. 그는 바울 신학을 개인의 경건성으로 환원하는 오래된 틀을 벗어나 우주적 회복의 신학, 그리고 지금 여기서 새 창조를 살아내는 교회의 사명으로 재정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4.

비판적 평가: N.T. 라이트 신학의 긴장과 도전


N. T. 라이트의 신학은 여러 교리들을 흩어진 조각처럼 다루지 않고, 그것들을 하나의 큰 서사—하나님 나라—로 엮어내는 데서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현대 교회에 굉장히 실천적이고 사회적이며, 더 나아가 우주적 비전까지 제공하는 매력을 지니죠. 하지만 그의 신학이 주는 신선함과 통합적 상상력만큼, 그가 건드린 부분이 전통적 복음주의와 개혁신학의 핵심 구조를 크게 뒤흔든다는 점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그 긴장 지점을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구원론적 긴장 — ‘의의 전가’와 ‘구원의 확신’ 문제

① 의의 전가가 약해지는 문제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가장 많이 논쟁이 되는 부분은 전통적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중심이었던 ‘의의 전가(Imputation,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의미, 이신칭의)’가 사실상 설 자리를 잃는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요지는 이거죠.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라이트는 칭의를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법정적 사건”이 아니라 “누가 언약 백성인가를 선언하는 신분 인정”으로 재정의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충족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우려입니다.


②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가능성

라이트의 ‘최종 칭의’ 개념도 논쟁적입니다. 그는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변화된 삶의 열매”를 근거로 우리를 최종적으로 변호하신다고 말하죠. 이 구조는 자칫 잘못 받아들이면, 종교개혁이 반대한 바로 그 지점 즉 행위 중심의 구원론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이클 호튼이 말한 표현이 딱 들어맞죠. “율법주의의 껍데기만 벗기고, 알맹이는 그대로 남겨둔 셈이다.”이라는 것입니다. 행위가 구원의 ‘증거’를 넘어 구원의 ‘최종 근거’처럼 들리는 순간, 신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며 불안과 자기 검열에 시달릴 위험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 위에 안식하는 복음의 위로는 현실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2) 해석학적 문제와 존재론적 긴장

① 본문 해석의 한계

새 관점의 큰 특징은 ‘율법의 행위’를 민족적 경계표지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몇몇 중요한 본문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가 그렇죠.

- 바울이 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까지 선언했는가?

- 단순히 ‘민족적 배타주의’ 문제 때문이라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어조를 썼을까?

또, 에베소서 2:8–9처럼 은혜와 행위를 명확히 대비시키는 본문도 새 관점의 해석 범위 안에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② 존재론적 모순

라이트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지 않는 전체론적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신자가 육체 없이도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적으로 거한다는 전통적 ‘중간 상태’ 이해는 또 고수합니다. 이 두 입장은 서로 긴장을 일으키죠. 다른 학자들이 말하듯, 이건 단순한 철학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라이트가 만든 신학 시스템 내에서 드러나는 내적 불일치인 것입니다.


이 모든 논쟁점을 정리해 보면, 라이트 신학은 이렇게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개인 구원이 아니라 우주적 회복의 이야기로 확장하고, 교회의 사회적·공적 역할을 재발견하게 만들며, 신앙의 모든 요소를 하나님의 거대 서사 속에 통합해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 구원론의 핵심 토대를 약화시키고, 성경 해석에서 무리한 축소가 발생할 위험이 있으며, 존재론적 구조에서는 내적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라이트의 신학은 늘 박수와 비판이 동시에 따라다닙니다.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긴장을 유발하는, 아주 역동적이고 논쟁적인 신학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위대한 통합과 남겨진 질문


N. T. 라이트의 작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는 바울 신학의 여러 조각들을 하나의 큰 이야기로 다시 엮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새 관점’은 단순한 해석 차원이 아니라, 칭의·교회·종말·윤리를 하나의 거대한 서사 즉 하나님 나라안에 재배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래서 라이트에게서 칭의는 “개인이 구원받아 천국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를 언약 백성으로 인정하시는가”라는 교회론적 선언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언을 토대로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에서 펼쳐지는 우주적 새 창조의 비전이 연결되죠. 결국 라이트가 제시하는 기독교의 희망은, 죽어서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선교에 우리가 지금 참여하는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이 점에서 라이트의 기여는 분명히 혁신적이고, 또 많은 사람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신학이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에서 굉장히 큰 긴장을 만들어내죠. 가장 많이 제기되는 비판은 이 부분입니다. 라이트의 구조가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인 이신칭의와 의의 전가를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논쟁적이었던 대목이 바로 그의 ‘최종 칭의’ 개념인데, 라이트는 마지막 날의 칭의가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삶의 행위”를 근거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그럼 구원의 확신은 결국 내 행위를 평가하는 데 달린 건가?” “신자는 은혜의 안정이 아니라, 다시 행위의 불안으로 내몰리게 되는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단순한 오독이나 감정적 반발이 아니라, 라이트의 신학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구조적 긴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트의 유산은 찬탄이자 과제입니다. 그가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법정적·대속적 복음의 중심이 정말로 우주적 갱신의 비전에 방해가 되는 것인지, 혹은 오히려 그 비전을 떠받치는 유일한 토대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결국 라이트 이후의 신학이 풀어야 할 문제는 “구원론적 바울을 택할 것인가, 선교적 바울을 택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질문이 남죠. 바울에게서 구원론과 선교론은 원래 서로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라이트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남겼고, 그 질문 속에서 생겨난 긴장은 앞으로의 바울 신학이 꾸준히 씨름해야 할 열린 논의의 공간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1. 권연경,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 - 주석적 평가와 제안”

2. 김병훈,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NPP)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신학의 비평]"

3. N.T.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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