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밖으로 꺼내고 싶어 하지만 그 이야기를 맞닿는 고통이 너무 커서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다. 듣는 사람의 반응이 두렵고, 그 어색한 공기가 싫어서 아예 입을 닫아버리게 된다. 상실을 경험할 때에 그 누구도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나는 혼자 너무나도 막연한 망망대해에 버려진 혼란을 느꼈다.
상실은 트라우마를 만든다. 트라우마는 나의 삶을 상실에 매몰되게 했으나 나는 상실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여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상실 이전의 시간과 이후,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상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
우리는 말로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잇는 것은 말에 있다. 상실은 말에 의해 경험된다. 애완동물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큰 애착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혼을 경험했다. 내가 이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따라 나를 상실 속에 가두기도 하고 그 이후의 삶으로 나아가게도 한다. 내가 이혼을 수치스럽고 실패한 경험으로만 떠안고 있다면 이 고통과 아픔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혼을 통해 나의 결핍을 알았고 자기 경계를 세우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고 내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있는 감각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썼고, 브런치를 시작했다.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정말 내 옆에 두어야 할 좋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만 갇혀 있었다면 나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폭력 속에서 나 자신을 지켜낸 용감한 사람이고,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낼 힘이 있는 사람이다. 이혼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무서워 계속해서 학대를 당하고 살았더라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삶이 어렵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며 불면증과 함께 찾아오는 우울을 이겨내려 에너지를 소모하고,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달고 살고, 현실을 애써 살아내야 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 진하게 박힌 상처들을 보듬어야 하는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지만,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폭력, 도박, 외도는 법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귀책사유이다. 나는 나 자신을 지켜냈다. 내 이야기를 알고 나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 사람 스스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인 게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 만약 내가 겪은 일을 자신이 겪고 있다면 절대 손가락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혼한 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혼은 사회적 아픔인 것을 말하고 싶다. 이혼을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삶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또한 나는 남편이라는 가족을 폭력으로 잃은 비참함을 경험했다. 많이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던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으로 인한 상실은 전쟁이 났을 때와 비슷한 고통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혼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선택을 부정당하는상실이며, 앞으로 어떻게 결정을 하고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안나는 고통이다. 물질과 관계, 정신적, 내적, 모든 것을 한꺼번에 허무하게 잃어버린 아픔이다.
상실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그 상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상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혼을 하기 전엔 이혼한 사람들의 고통을 피상적으로 위로했다. 당연히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겪고 보니 이혼한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나는 아이가 없으니 아이가 있는 상태로 이혼한 사람의 고통은 내가 심히 헤아릴 수 없으나 적어도 폭력과 신혼에 이혼한 사람들의 아픔을 체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상실은 예측이 없다. 아무리 행복한 부부라 할지라도 한쪽의 배우자가 사고나 질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좋은 사람도 변심하여 이별할 수도 있다. 10여 년씩 사귀던 사람과도 하루아침에 남이 될 수 있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이별하고, 사별하고, 파혼하고, 이혼하는 이 모든 일들이 인생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교통사고와 같은 것들이다. 사람의 속을 사람이 다 알 수가 없는 법이다.
내 주변의 이혼을 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한번 이혼한 사람은 두 번 세 번 이혼을 한 경우가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나의 판단일 수 있겠으나 여러 번 이혼하는 사람은 비슷한 사람을 계속해서 만났고, 재혼하여 잘 살고 있는 경우의 사람은 첫 번째 결혼이 아픔으로 끝난 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애도의 시간을 가진 것에 있었다. 물론 이혼이고 삼혼이고 사혼이고 오혼이고, 당사자는 좋은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한번 헤어지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기에 나는 그 어딘가에서 좀 더 나를 돌아보며 애도하고 있다.
애도가 쉬운 것은 아니다. 애도는 심히 외롭다. 한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애도하기 위해선 그때 당시의 나를 떠올려야 한다. 애써 지워버리려 했던 그새끼의 표정과 이름과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고 나를 향해 했던 그 거짓말들과 속임수들이 다시 떠오르고 그 속에서 악을 쓰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절실함을 안고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다. 말 그대로 맞은 대를 또 맞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 당시의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아파하는 시간인 것이다.
나는 이혼 외에도 많은 상실들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 나는 나의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하고, 내게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더 나쁜 삶일 거라는 보장도 없다.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나는 그저 현재의 책임을 다하려 애쓸 뿐이다.
나는 상실 이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 상실은 전부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한 챕터일 뿐이다.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으로 가고 싶다. 부디 우리 모두가 자신이 겪은 상실을 통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상실을 통과하며 나에게 가장 크게 온 것은 중증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은 이 분노를 나에게 돌리는 것이다. 멍청하게 속아서 결혼한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정작 잘못은 상대방이 했음에도 나에게 처벌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나를 고립시키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 감당이 안되어서 나의 감정을 묶고 살았다. 그렇게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졌고, 살아 있다는 게 의미가 없으니 생을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고, 나의 생각은 진짜가 아니었다. 나는 돌봄이 필요했다. 고통은 살아있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았다. 자기 비난을 멈추지 못하면 인생은 망가진다. 그러나 나는 상실에 침몰되지 않고 이겨내서 일어나려 애를 쓴다.
나에게는 이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이 글쓰기였다. 감정이 고이면 뼈와 살을 파고들어 나를 죽게 한다. 글쓰기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하여 떠나보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와 나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 이 슬픔을 떠나보내다 보면 분명 우리에게는 이전과 다른 깊이와 넉넉함과 평안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는 결국 끝끝내 살아남아, 살아남은 의미를 기록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악에만 머물러 있다면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 심장이 불타 없어지는 것 같은 미칠 듯한 고통이 있더라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분명히 알게 될 무언가가 있을 거라 믿는다.
상실을 경험하셨다면 충분히 슬퍼하시고 아파하셔도 괜찮습니다. 슬픔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상실 이후에는 상실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겪으며 애도해 가는 시간이 필요해요. 당신이 겪고 있는 슬픔은 흘러갈 것입니다. 당신이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지지를 받으세요. 그런 사람이 없다면 당신 자신에게 위로와 지지를 받으세요. 우리는 일상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적으로 깊은 상실을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고민하시는 분이 있다면 박경임 작가님의 <슬픔은 발효중>을 추천합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해보세요. 평소 쓸데 없다고 생각하여 미뤄놨던 것일수록 좋습니다. 맛있는 것들을 먹고 자연을 누려보세요. 분명 그 결핍의 자리에 새롭고 충만한 것들이 채워질 것을 믿어요. 저도 여전히 투쟁합니다. 삶이 정말 녹록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당신이 쉼을 얻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한 챕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혼자가 아닌 것을 아시지요?
저를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오늘도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