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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

무계획이 계획이 된 설악산 여행

by Rosary

일상이 단조롭고 휴식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조금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중년 이후의 여행은 많이 달라졌다. 살면서 맞이하는 슬프고 우울한 순간 일단 짐을 챙겨서 여행을 떠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때로는 도피이고 때로는 치유가 되는 시간이다. 이번 여행은 예약할 때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는 순간이 되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설악산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끌리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설악산이 그렇게 절경인지 무지해서였음을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날 때도 설악산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난여름 평창여행이 무척 만족스러워서 강원도 다른 어딘가로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래서는 숙소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져서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밤, 충동적으로 숙소를 예약했다. 차가 없고, 늘 뚜벅이 여행을 하기 때문에 좀 더 꼼꼼히 알아보고 찾아가기 쉬운 곳을 숙소로 정해야 함에도 잘 알지도 못하고 뭐가 좋은지도 모른 채 그냥 타임세일을 하길래 소노캄 델피노 2박을 덜컥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나서 어디 있는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찾아보는데 백담사 입구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면 15분 거리 택시예상요금도 2만 7천 원 정도라고 하니 갈만하구나 안심한 것이 실수였다. 막상 터미널에서 내려서 식사하면서 식당 사장님께 물어보니 “택시를 잡기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백담사 입구 터미널에서 하차할 게 아니라 속초방향으로 조금 더 가서 한화콘도에서 하차해서 택시를 불렀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버스를 기다렸고, 조금 늦긴 했어도 훨씬 저렴한 택시비(?)로 무사히 소노캄 델피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노캄 델피노에서 본 울산바위

목적지에 도착하자, 어떻게 이런 위치에 자리를 잡았나 감탄이 나올 정도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뒤늦게 검색을 해보니 설악산 울산바위가 정면으로 가장 멋있게 보이는 곳이란다. 멋진 풍광을 보면서도 설악산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호캉스라는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온 여행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되니 몸이 근질근질했고 오전 9시가 되니 객실을 나서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산에 갈 생각이 없었기에 가벼운 워킹화를 신고 와서 갈만한 곳을 찾다 보니 자생식물원이 눈에 띄었다. 아침으로 초당순두부를 먹고, 카페에서 빵과 커피까지 야무지게 먹은 후 식물원으로 향했다. 온실 같은 식물원을 생각했지만 말 그대로 자생식물원이었다.

피로를 풀기 좋았던 척산 온천장

한 바퀴 돌고 나서 택시를 타기 위해 도로를 찾아 내려오다 보니 척산온천장이 보였다. 여독을 푸는데 온천만 한 것은 없지, 망설임 없이 온천으로 향해 뜨끈한 온천탕에 몸을 담그니 여행의 만족도가 확 올라갔다. 체크인할 때 리조트에 있는 온천 이용을 물어보았지만 막상 가려니 가격은 얼마나 할까, 수영복을 챙겼어야 하나 싶었는데 단돈 1만 원의 목욕비를 내고 온천을 즐기다니 뭔가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다음날은 그저 속초항에 들렀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택시 안에서 마음이 바뀌었다. 날이 매우 흐린데 설악산 케이블카 운행이 되느냐고 기사님께 물었더니 “오늘 정도면 날씨가 좋은 편이에요. 바람도 없는 편이고.” 대답을 듣자마자 케이블카를 타는 걸로 마음이 바뀌었고, 설악산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막상 케이블카 탑승장에 가보니 사람이 너무 많고, 40~50분이나 기다려야 하길래 그냥 등산을 하는 걸로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케이블카는 역시 나랑 안 맞지...


상대적으로 한산한 토왕성 폭포전망대로 방향을 잡았고, 산에 오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신발이라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육담폭포와 비룡폭포를 지나 공포의 900 계단을 오르는 건 괜찮았는데 바닥이 자꾸 미끄러지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 그만 가야겠다 싶었다. 어느 산에 가든 반드시 정상을 가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 아니었고, 안전제일주의라서 목적지를 200미터 남겨뒀을 때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설악산과 안면을 텄으니 다음에 준비를 잘해서 오면 되지 싶기도 했고, 다시 못 오면 또 어떠랴 싶기도 했다.


올라갈 때는 신나게 올라갔지만 내려올 때는 바닥이 미끈미끈해서 몇 번이고 삐끗하는 위기가 있었다. 무사히 하산을 마친 후 바로 속초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설악산 등산도 하고, 온천도 즐겼으니 나름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다. MBTI에서 J(계획형)라는 게 0에 수렴하는 편이라 가능한 변덕에 변덕을 더하고 무계획이 계획이었지만 어쩐지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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