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는 자주 말하곤 한다.
“내 어린 시절은 팔 할이 TV가 키웠어.”
부모님께서 나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난했던 시절, 두 분은 먹고살기 위해 늘 바쁘셨다. 시골에는 지금 같은 돌봄 시스템도 없었다. 어른들은 모두 하루 종일 생계를 위해 뛰어다녔다. 자연스럽게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같았으면 스마트폰 게임도 하고 유튜브도 봤겠지만, 그때는 채널 세 개가 전부였고 아이들이 볼 만한 프로그램도 많지 않았다. 어머니가 대구에 물건을 떼러 가시면,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몇 시간을 멍하니 보내곤 했다. 집 안에 장난감이라고 해봐야 책이 전부였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림이 크게 그려진 위인전을 반복해 읽었다. 엄청 재미있어서 읽은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을 뿐. 그래도 그 시간이 내가 책과 친숙해지는 출발점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사춘기가 되자 나는 중2병을 앓으며 회의적인 인간이 되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삶의 의미’를 찾는 쪽에 가까운, 조금은 특이한 학생이었다. 자연스레 위인전에서 시작한 독서는 어느새 고전 인문학으로 옮겨갔다. 이해도 못하면서 자유론, 순수이성비판, 군주론 같은 책들을 괜히 들고 다니던 겉멋도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소설 같은 픽션을 얕봤다. 명작 소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에세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가벼운 자기 통찰을 적어놓은 글이라며 건드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고단한 중년이 되고 보니, 딱딱한 고전이 과연 지금의 나에게 ‘쉬이 즐길 수 있는 책’인가?
어느새 고전을 읽은 기억은 아득해졌고, 가끔 자기 계발서나 베스트셀러를 교양 삼아 읽는 정도만 남았다.
그런 나에게 브런치에서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참 생소한 일이었다.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을 받고 스크린샷까지 찍었을 만큼 은근히 뿌듯했다.
하지만 40대가 넘은 남자가 이런 일로 티를 내기도 괜히 민망했다. 힘들게 준비한 선물을 건네면서도 “오다가 주웠다”라고 말하는 차도남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가족에게 말했다.
“나 브런치 작가 됐어.”
연세 드신 부모님은 물으셨다.
“그게 뭐냐?”
“에세이를 쓰는 사이트예요.”
그러자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어이고, 우리 아들 뭐라고 됐다니까 축하한다. 그런데… 에세이가 뭐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마른데 물도 없이 계란 노른자 세 개를 한 번에 삼킨 것처럼 목이 꽉 메어왔다.
“어… 그건… 일기 같은 거 있어요…”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왠지 자존심이 건드려져, 에세이의 정확한 정의부터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글은 마흔 이후 브런치에서 독학으로 글을 쓰며 출판 제안을 받고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를 출간하기까지의 과정과 기술을 솔직하게 나누는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