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디지털 심연 속 희미한 등불 (Encounter: A Faint Beacon in the Digital Abyss)
천명석은 존재의 무게가 눅눅하게 내려앉은 아침의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밤새 뒤척인 그의 몸을 감쌌던 침대 시트는 구겨진 채 그의 영혼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의식의 가장자리를 파고드는 스마트폰의 푸른 빛. 그는 마치 중독자처럼, 혹은 구원을 갈망하는 신도처럼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액정 위로 성가신 붉은 배지들이 수십 개의 미확인 메시지를 알리며 깜박였다. 3개의 즉석 만남 앱, 5개의 익명 채팅 앱. 그것들은 그의 공허를 잠시 메워주는 값싼 위안이자, 동시에 그의 시간을 좀먹는 디지털 심연이었다.
손가락은 기계적인 리듬으로 화면을 스크롤했다. 의미 없는 이모티콘의 행렬, 노골적인 욕망을 담은 짧은 단어의 파편들. 그는 마치 품질 검사관처럼 무심하게 메시지들을 분류하며, 때로는 영혼 없는 찬사를, 때로는 상투적인 거절을 타이핑했다. 화려하게 보정된 여성들의 프로필 사진과 그 아래 달린 공허한 자기소개 사이를 표류하던 그의 시선이, 예기치 않은 암초에 걸린 듯 문득 멈춰 섰다.
“무명 작가 양반! 당신의 글, 그 영혼의 편린을 잠시 엿볼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그의 프로필 한구석, 스스로도 반쯤은 자조적으로, 반쯤은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적어둔 ‘작가 지망생’이라는 초라한 문패. 그 빛바랜 단어에 누군가 진지하게 반응한 것은 처음이었다. 명석은 순간 호흡을 멈췄다. 그의 심장이,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낡은 시계추처럼 어색하게, 그러나 분명히 다른 종류의 박동을 시작했다. 호기심과 경계심,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얼마 전 간신히 퇴고를 마친 짧은 단편 소설 파일을 첨부했다. 그의 언어, 그의 미숙하지만 진솔한 영혼의 조각이 담긴 한글 파일이었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낸 이의 프로필에는 낯선 독일 국기가 선명하게, 마치 이질적인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번역기. 그 단어가 주는 불길함과 왜곡의 가능성. 그의 빈약하지만 확고한 경험에 따르면, 인간 감정의 섬세한 결을 따라 직조된 한글 문학 작품을 차가운 알고리즘의 기계 번역기에 던져 넣는 행위는, 섬세한 바로크 음악을 조악한 스피커로 재생하는 것과 같았다. 의미의 골격은 남을지 몰라도, 영혼의 울림은 사라지고 말 터였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메마른 사막에 씨앗을 뿌리는 심정이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의식을 다음 메시지로 옮겼다.
몇 번의 무의미한 타이핑과 기계적인 감정 표현 끝에, 마침내 그가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던 종류의 ‘신호’가 도착했다. 동영상 첨부. 명석은 방 안의 침묵을 확인하고, 볼륨 슬라이더를 거의 무음에 가깝게 끌어내렸다. 재생 버튼 위에서 그의 손가락이 죄의식을 느끼듯 잠시 망설였다. 이윽고 화면이 밝아지며, 조악한 화질과 거친 숨소리 너머로 여성의 가장 내밀한 풍경이 흔들리며 펼쳐졌다.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고 노골적인 영상. 그러나 그는 이 원초적인 ‘선물’을 받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존재라도 된 양, 기묘한 자긍심과 공허한 정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그의 메마르고 갈라진 자존감의 표면을 잠시나마 적셔주는 값싼 이슬과 같았다.
“오, 신이시여, 이토록 관능적인 계시라니! 당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회색빛 세상에 내려온 가장 매혹적인 뮤즈입니다. 부디 이 미천한 방랑자에게 당신이라는 성소를 직접 알현할 영광을 허락해주시길. 나의 여신이시여!” 그는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의 과장된 수사를, 마치 잃어버린 시 구절을 읊조리듯 타이핑하며 전송했다. 그리고 얼마 전 헬스클럽 탈의실 거울 앞에서, 완벽한 각도와 조명을 찾아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건져낸 자신의 상반신 셀카 몇 장을 덧붙였다. 인공적인 조명 아래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는 복근의 윤곽이, 그의 마지막 남은 허영의 보루였다. 그녀의 열광적인 반응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차가운 현실로 복귀했다. 출근. 그 단어는 그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낡고 작은, 그의 부풀려진 자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코딱지만 한 토요타. 그는 이 고물 자동차에 몸을 싣고, 매일 아침 의무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에 발목이 채인 채 회사로 향했다. 폴란드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청산하고 희망을 찾아 건너온 독일 땅. 그러나 반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는 낯선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이질감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졌고, 남은 것은 생계를 위한 지긋지긋한 노동과 깊어지는 고립감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두 개의 극단적인 욕망으로 들끓었다. 육체의 즉각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여자, 그리고 언젠가 자신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선사할지도 모르는 소설.
올해로 그의 나이 마흔. 세상의 지혜를 깨닫는다는 불혹(不惑)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그는 여전히 결혼이라는 안정된 항구를 거부하며 정처 없는 욕망의 바다를 표류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매혹적인 항구를 정복하기 전에는 결코 닻을 내리지 않으리라 맹세한 고대의 아르고 호 선원처럼. 그가 소설이라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망망대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순수한 예술적 열정이나 창작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순교자적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냉정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투자에 가까웠다. 언젠가 터질지도 모르는 문학적 대박이라는 로또를 통해, 이 반복되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풍요로운 노후를 보장받으려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야망의 발현이었다. 그의 글쓰기는 예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현실 도피를 위한 정교한 알리바이에 가까웠다.
2. 대화의 미궁, 독일의 짙은 안개, 그리고 열세 개의 그림자 (The Labyrinth of Conversation, Dense German Fog, and Thirteen Shadows)
며칠 후, 명석은 자신의 냉소적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독일 여성, 자신을 엘자라고 소개한 그녀로부터 장문의 답장이 도착한 것이다. 기계 번역 특유의 딱딱하고 어색한 문장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지만, 그 행간에는 명석의 짧은 단편 소설에 대한 놀랍도록 깊은 이해와 진심 어린 감탄이, 마치 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희미한 빛처럼 어려 있었다. 그녀는 그의 문체가 지닌 독특한 서정성,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포착하는 예리함,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독자의 허를 찌르는 서사의 대담함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고독과 소외감에 깊이 공감하며,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명석은 당혹스러움과 동시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간질거리며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저 조악한 번역 알고리즘이 이 정도의 섬세한 감정적 뉘앙스까지 포착해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 여인, 엘자는 한국 문학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할 줄 아는, 극히 드문 감식안을 가진 독일의 지식인이란 말인가?
엘자와의 대화는 마치 깊은 밤, 예기치 않게 발견한 비밀 통로처럼 빠르게, 그리고 매혹적으로 깊어졌다. 그녀는 화면 너머의 명석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그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예술가로서 겪는 고독한 투쟁,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의 냉소적인 시선 뒤에 숨겨진 여린 감수성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는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등장을 기다려왔다는 듯, 그의 숨겨진 문학적 재능이 만개할 수 있도록 자신이 헌신적인 후원자이자 뮤즈가 되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함께 살며, 세상의 모든 번잡함과 생활의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나 오직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너무나 달콤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파격적인 약속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관리하는, 예술을 사랑하는 익명의 후원자가 소유한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호숫가 저택을 언급하며, 그곳이야말로 명석의 영혼이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 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명석은 격렬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이것은 현실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몽상가의 순진한 치기일 수도, 혹은 그의 절박함과 외로움을 이용하려는 교묘하고 위험한 사기극의 정교한 서막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현재 삶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 쌓여가는 빚, 희미해져 가는 작가로서의 꿈. 더 이상 잃을 것이라고는 너덜너덜해진 자존심과 얼마 남지 않은 젊음뿐이었다. 무엇보다 '독일 여성과의 신비로운 만남', '예술가로서의 전적인 지원', '아름다운 호숫가 저택에서의 창작 생활'이라는 키워드는 그의 잠자고 있던 허영심과 현실 도피의 욕망을, 마치 마른 장작에 던져진 불씨처럼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는 결국, 엘자가 내민 달콤한 독배일지도 모르는 그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편도 항공권. 그것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돌아올 다리를 불태우는 것과 같은 비장한 결단이었다. 최소한의 짐, 그러나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무거운 불안과 기대를 안고 그는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익숙했던 도시의 불빛들이 점차 작아지며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는 이것이 과연 새로운 삶의 장으로 향하는 비상일지, 아니면 더 깊고 어두운 미궁 속으로의 추락일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의 선택은 이미 주사위처럼 던져졌다.
엘자가 알려준 주소는 독일 남부, 문명의 소음이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한적한 호숫가였다. 기차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엘자가 미리 보내준 검은색 세단을 타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한참 달려서야 도착한 곳은, 그의 메마른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동화 속 삽화처럼, 혹은 잘 그려진 풍경화처럼, 비현실적으로 푸르고 광활한 호수를 배경으로, 놀랍도록 똑같이 생긴 집 13채가 마치 거울에 비친 상처럼, 혹은 군인들처럼 정확한 간격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완벽하게 복제된 듯한 집들은 하나같이 두껍고 낡은 나무 차양(덧문)을 굳게 내려뜨리고 있었고, 살아있는 존재의 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고요, 완벽한 부재.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사는 성처럼, 혹은 저주에 걸린 유령 마을처럼, 아름답지만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몇몇 집의 고풍스러운 굴뚝에서는 가늘고 희미한 연기가 마치 비밀 신호처럼 꾸준히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온기인가, 아니면 아직 꺼지지 않은 비밀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인가. 집들을 제외하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침엽수들이 하늘을 향해 빽빽하게 솟아 있는 원시적인 숲과, 거친 풀들이 자라는 황량한 벌판, 그리고 거울처럼 하늘과 숲의 그림자를 담담하고 차갑게 비추고 있는 거대한 호수뿐이었다. 완벽한 고립. 명석은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장엄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위화감과 함께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곳은 천국인가, 아니면 정교하게 위장된 지옥의 입구인가.
엘자는 열세 개의 침묵하는 그림자 중 하나, 호수에서 정확히 세 번째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라인 프로필 사진 속의 인공적인 화려함 대신, 수수하지만 잘 재단된 옷차림에 어딘가 금욕적이기까지 한 단단함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그 깊은 곳에는 쉽게 읽히지 않는 강렬한 의지와 함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명석에게 다가와 부드럽지만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그녀는 명석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 굳게 닫힌 차양 뒤의 실내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넓고 고풍스러웠으며, 마치 박물관처럼 값비싼 가구와 예술품들로 채워져 있었고,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완벽함은 오히려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엘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미리 준비된 듯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집들과 주변의 광활한 토지 모두가 자신이 ‘가정부’로서 충실히 섬기고 있는, 매우 부유하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적인 예술 후원가의 소유이며, 자신은 그 주인의 각별한 신임과 배려 덕분에 이 아름다운 집들 중 하나에 거주하며, 이제 막 도착한 '특별한 손님', 즉 명석의 창작 활동을 전적으로 지원하고 돌볼 수 있게 되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지만, 어딘가 감정이 거세된 듯한, 연습된 듯한 매끄러움과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명석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려는 듯 집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3. 안락이라는 이름의 금빛 새장, 의심이라는 독초의 성장 (The Gilded Cage Named Comfort, The Growth of the Poisonous Weed of Doubt)
명석에게 독일에서의 새로운 삶은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해진, 길고 나른한 꿈결과 같았다. 매일 아침, 신경질적인 알람 소리에 쫓기듯 일어나 낡은 토요타의 차가운 핸들을 잡고 지옥 같은 출근길 정체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그는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아침 햇살의 속삭임과 함께, 혹은 호수 위를 감도는 물안개의 신비로운 손짓과 함께 눈을 떴다. 그의 침실 문 앞에는 어김없이 엘자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마치 최고급 호텔의 룸서비스를 연상시키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 신선한 과일의 상큼한 향기, 그리고 진한 커피의 깊은 아로마가 그의 감각을 부드럽게 깨웠다.
식사 후, 오전의 나른하고 충만한 시간 동안 그는 자유롭게 자신만의 리듬을 따랐다. 때로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호숫가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산책로를 천천히 거닐었고, 때로는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유일한 벗이 되어주는 깊은 숲길을 탐험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은 듯, 자연의 광활함 속에서 위안과 영감을 동시에 발견했다. 오후가 되면, 그는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과 벽면을 가득 채운 방대한 장서, 그리고 아늑한 벽난로가 갖춰진 서재에 틀어박혀 오롯이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했다. 그는 최고급 만년필로 사각거리며 노트를 채우거나, 최신형 노트북의 키보드를 경쾌하게 두드리거나, 혹은 그저 푹신한 가죽 안락의자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의 시시각각 변하는 호수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영감이라는 이름의 변덕스러운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엘자는 그의 일상에 놀라울 정도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그의 존재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하고 효율적인 유령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그의 창작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가 요구하기 전에 미리 알아채고 완벽하게 준비해 주었다. 최고급 필기구와 다양한 종류의 종이, 최신 사양의 노트북과 소프트웨어, 그가 필요로 할 만한 모든 종류의 참고 서적들 – 희귀한 고문서부터 최신 문학 이론서까지 – 심지어 그의 섬세한 취향에 맞는 클래식 음악 LP나 희귀 영화 DVD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명석은 이 넘치는 자유와 엘자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서, 오랫동안 그를 짓눌렀던 생활고와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치 세심하게 관리되는 온실 속의 희귀한 난초처럼, 외부 세계의 거친 비바람과 냉혹한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의 창작력은 이 비옥한 토양 위에서 다시금 움트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안락함이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담요 아래, 불안과 의심이라는 차가운 독초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평소보다 더 깊숙한 숲 속으로 발길을 옮겼던 명석은, 햇빛조차 희미하게 스며드는 숲의 가장자리에서 기이하고 음산한 풍경과 마주쳤다. 마치 잊혀진 역사의 경계선처럼, 일렬로 늘어선 낡고 이끼 낀 비석들이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공동묘지의 황량한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몇몇 비석은 놀라울 정도로 마모되지 않았고, 마치 비교적 최근에, 그것도 서둘러 세워진 것처럼 어색하고 깨끗했다. 더욱 기이하고 섬뜩한 것은, 비석 어디에도 망자의 이름이나 생몰 연대, 혹은 그들의 삶을 기리는 어떤 문구도 새겨져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대신, 마치 감옥의 죄수 번호나 실험체의 식별 코드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만이 희미하고 불규칙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비석들은 마치 침묵하는 감시자들처럼, 숲의 어두운 비밀을 영원히 지키고 있는 듯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그는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엘자에게 이 기묘한 비석들에 대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자는 잠시 포크를 멈추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평온했던 표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명석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완벽한 평정을 되찾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 그 돌들 말이군요. 오래전에 이 지역에 살았던 가난한 사람들의 흔적일 뿐이에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잊혀진 영혼들이죠. 슬픈 이야기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명석 씨."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를 서둘러 덮으려는 듯한, 혹은 그의 호기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듯한 미묘한 떨림과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또 다른 날, 그는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평소 다니던 호숫가 산책로를 벗어나, 굳게 닫힌 이웃집들 중 하나에 최대한 소리 없이 다가갔다. 두꺼운 나무 차양은 여전히 굳게 내려져 있었지만, 그는 미세한 창문 틈새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따뜻한 불빛과, 벽난로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매캐하고 달콤한 나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마치 꿈결처럼,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한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누군가 저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림자처럼 숨어 지내는 것일까? 그는 다시 한번 엘자에게 이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녀는 “주인님의 특별한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라, 극도로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하신다” 혹은 “매우 예민하고 내성적인 예술가들이라 외부와의 접촉을 꺼린다”는 식의, 매번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은 애매하고 설득력 없는 답변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숲의 더 깊은 곳,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한 구역을 탐험하던 중, 그는 녹슨 철판으로 만들어진 낡고 위협적인 경고판을 발견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굵은 독일어 문구는 ‘사유지 출입 금지 (Privatgrundstück - Betreten strengstens verboten!)’였고, 그 아래에는 무단 침입 시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으며, 발견 즉시 엄중히 처벌할 것이라는 냉혹한 경고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는 이 경고판에 대해 물었을 때, 엘자는 그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며, 마치 어린아이를 안심시키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저 낡은 경고판 때문에 놀라셨군요. 걱정 말아요, 명석 씨. 저건 호기심 많은 외부인들이나 사냥꾼들을 막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일 뿐이에요. 우리는 이 땅의 일부나 마찬가지인걸요. 말했잖아요, 저는 이 모든 것을 소유하신 관대하신 분을 위해 일하고 있고, 당신은 그분의 초대를 받은 소중한 손님이라고요. 우리는 이곳의 모든 것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누릴 권리가 있어요. 이 아름다운 자연 전체가 당신의 영감을 위한 정원인 셈이죠.” 그녀의 설명은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논리적이었고, 심지어 그의 자존심을 은근히 세워주는 달콤함마저 담고 있었다. 하지만 명석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된 거짓 아래 숨겨진 진실에 대한 의심이, 마치 독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나고 있었다. 왜 이토록 광활하고 아름다운 낙원 같은 땅이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야 하는가? 열두 채의 침묵하는 집들과 그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은밀한 연기, 이름 없는 비석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엘자의 완벽한 친절과 헌신적인 지원 뒤에는, 과연 어떤 거대하고 어두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 전체가, 어쩌면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무대 세트가 아닐까 하는 불길하고 섬뜩한 예감이, 차가운 안개처럼 그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금빛 새장 속에 갇힌 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4. 채찍질하는 뮤즈, 뒤틀린 창작의 고통, 그리고 불길한 걸작의 탄생 (The Whipping Muse, The Agony of Twisted Creation, and the Birth of an Ominous Masterpiece)
명석이 독일의 외딴 호숫가 저택에 정착한 지 계절이 서너 번 바뀌었을 무렵, 그와 엘자 사이에 흐르던 위태로운 평화의 막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숨 막히는 긴장과 미묘하지만 분명한 갈등의 기류가 감돌았다. 명석은 엘자가 제공한 완벽한 환경 속에서, 초기에는 마치 봉인되었던 창작의 샘이 다시 터진 듯 열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그의 하드 드라이브에는 수십 편의 단편과 몇 개의 장편 소설 줄거리, 그리고 무수한 아이디어의 편린들이 빼곡하게 저장되었다. 하지만 그가 생산해내는 결과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엘자의 표정은 초기의 순수한 감탄과 따뜻한 격려에서 점차 벗어나, 날카롭고 집요한 비평과 조급함이 뒤섞인 깊은 실망감으로 물들어갔다.
“명석 씨, 이 대목은 너무 감상적이고 예측 가능해요. 독자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더 차갑고 잔인한 현실 인식이 필요해요. 당신의 경험을 좀 더 날카롭게 투영해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마치 외과 의사의 메스처럼 차갑고 단호한 요구가 담겨 있었다.
“문장의 밀도가 부족해요. 단어 하나하나가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어야 하는데, 너무 평이하고 안전한 선택만 하는군요. 마치 절벽 끝에서 춤추는 것을 두려워하는 무용수 같아요. 더 과감해지세요!”
그녀의 비평은 놀랍도록 정확하고 예리했으며,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핵심을 찔렀다. 마치 수십 년간 최고의 문학 작품들만을 다뤄온 베테랑 편집자나 비평가처럼, 그녀는 명석의 글이 가진 구조적인 결함, 문체의 미숙함, 주제 의식의 빈약함을 귀신같이 간파해냈고, 때로는 명석 자신조차 희미하게만 인지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냉정하고 가차 없이 지적했다. 처음에는 그의 문학적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값진 조언이라 생각하며 겸허히 받아들였던 명석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태도에서 숨 막히는 압박감과 함께 불쾌한 모욕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요구는 점점 더 구체적이고 편집광적으로 변해갔으며, 그의 글이 그녀가 설정한 ‘어떤 보이지 않는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깊은 한숨과 함께 싸늘한 실망감을 표출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 따뜻한 지지자가 아니라, 냉혹한 심판관의 그것이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정녕 모르시나요, 명석 씨? 저는 당신의 그 희미한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어요. 그런데 당신은 고작 이런 안일하고 미숙한 수준의 글이나 끄적이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군요! 이게 당신 재능의 전부인가요?” 어느 날 저녁, 그녀는 마침내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히스테릭한 날카로움과 함께, 깊은 배신감과 분노마저 서려 있는 듯했다. "제발, 정신 차리고 분발하세요! 세상을 뒤흔들 만한,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강렬하고 독창적인 걸작을 써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의미가 없어져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위협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명석은 그녀의 격렬한 질책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일정 부분 고통스러운 사실이었다. 그는 엘자의 헌신적인 지원이라는 안락함에 길들여져 현실에 안주했고, 때로는 창작의 고통을 피해 게으름과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글은 아직 스스로에게조차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자의 끊임없는 채찍질과 거의 광기에 가까운 완벽주의적인 집착은, 그의 섬세하고 연약한 창작 의욕을 뿌리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글쓰기는 더 이상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는 즐거운 유희가 아니라, 엘자라는 엄격하고 변덕스러운 심사관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강제 노동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짜증과 싸늘하게 얼어붙은 실망의 눈빛을 피하기 위해, 영혼 없는 손가락으로 억지로 문장을 짜내고 비틀기 시작했다. 그는 밤에는 잠을 잊고 카페인의 힘을 빌려 쓰고, 낮에는 엘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수정 요구에 따라 기계적으로 고치고, 또 고쳤다. 그의 영혼은 마치 맷돌에 갈리듯 서서히 마모되어갔고, 그의 글에서는 초기 작품들이 가졌던 순수한 열정과 진솔함 대신, 계산되고 뒤틀린 기교와 강요된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숨 막히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도 명석과 엘자는 가끔씩 저녁 식사 후 서재의 벽난로 앞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갖곤 했다. 이상하게도 엘자가 고르는 영화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심연이나 뒤틀린 욕망, 존재의 부조리함을 파고드는 음산하고 난해한 분위기의 미스터리 스릴러거나, 극도의 폭력과 잔혹함,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가득한 고어 공포물, 혹은 실존 인물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영화가 끝나면 그들은 종종 와인잔을 기울이며 영화의 서사 구조, 상징적 장치, 인물의 심리 변화, 혹은 감독의 철학적 메시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엘자는 영화 속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 구조나 감독이 숨겨놓은 은유적 장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깊이 있고 예리한 분석을 내놓곤 했는데, 명석은 그녀의 방대한 지식과 지적인 면모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인간의 고통과 절망, 폭력과 죽음을 분석하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심지어 약간은 즐기는 듯한 시선에 어딘지 모를 섬뜩함과 깊은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그녀가 스크린 속의 비극을 통해 현실 세계의 어떤 어두운 진실을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개월에 걸친, 영혼을 깎아내고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고투 끝에, 명석은 마침내 그의 첫 장편 소설을 완성했다. 그것은 그가 이전에 썼던 어떤 글과도 다른, 어둡고 뒤틀린 욕망과 폭력,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를 다룬, 강렬하지만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작품이었다. 탈고의 순간, 그에게 찾아온 것은 성취의 기쁨이나 해방감보다는, 영혼까지 탈탈 털린 듯한 깊은 탈진과 공허함이었다. 엘자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제물을 검토하는 냉정한 사제처럼, 경건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두껍게 쌓인 원고 뭉치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꼬박 사흘 밤낮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그의 원고를 한 자 한 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녀는 깊은 만족감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명석을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았던, 그 어떤 감정도 읽기 힘들었던 가면 같은 표정 대신, 진실되고 깊은 만족감과 함께, 마치 어려운 퍼즐을 마침내 완성한 듯한 묘한 성취감과 승리감마저 떠올라 있었다.
“훌륭해요, 명석 씨. 정말… 경이롭군요. 드디어 당신 안에 잠들어 있던 진짜 괴물이, 어둠 속의 거인이 깨어난 것 같아요. 이 정도라면… 네, 이 정도라면 충분하고도 남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미세한 떨림과 함께, 그의 작품에 대한 순수한 감탄보다는, 어떤 거대한 계획의 중요한 단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듯한, 차갑고 계산적인 만족감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즉시 행동에 나섰다. 어디서 어떻게 연락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독일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실력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문 번역가를 수소문했고, 그의 소설을 문학적으로 완벽하고 예술적인 독일어로 옮기는 작업에 즉시 착수했다. 동시에 그녀는 독일의 유력한 메이저 출판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독일에서 먼저 출판하는 것이 당신의 문학적 명성을 위해 훨씬 유리할 거예요, 명석 씨.”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이 강렬하고 독창적인 문학 세계는, 섬세하고 지적인 안목을 가진 유럽 독자들에게 훨씬 더 깊은 충격과 울림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문학 시장은 너무 작고 편협하며, 당신의 이 대담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기에는 역부족일 거예요.” 그녀의 말은 마치 그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언하는 듯 단호했고, 명석은 이미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그녀가 짜놓은 거대한 계획의 일부가 되어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마치 꼭두각시처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엘자라는 이름의 교활한 마녀에게 저당 잡힌 상태였다.
5. 거짓된 평화의 이면, 깊어지는 권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길 (Behind the Facade of False Peace, Deepening Ennui, and the Unseen Gaze of Surveillance)
첫 장편 소설의 완성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은, 마치 격렬한 폭풍우가 지나간 후의 고요처럼, 명석과 엘자 사이에 잠시나마 위태롭고 불안정한 평화를 가져왔다. 엘자는 더 이상 그의 글쓰기 방식이나 내용에 대해 날카로운 채찍질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세심하게 그를 보살폈다. 그녀는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식단을 직접 요리해 주었고, 그의 지친 신경을 달래주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작곡가의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 LP를 틀어주거나, 함께 호숫가를 조용히 산책하기도 했다. 독일 출판 준비는 엘자의 주도하에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번역은 최고 수준의 전문가에 의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출판사 중 한 곳과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약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왔다. 엘자는 때때로 출판사 편집자의 극찬이 담긴 이메일 일부를 명석에게 보여주며 그의 자존심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듯한,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평화의 이면에서, 명석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권태와 불안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이 마치 늪의 수면 아래에서 자라나는 수초처럼, 끈질기고 음습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엘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싫증과 함께, 본능적인 혐오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 막힐 듯한 과도한 관심과 보이지 않는 철저한 통제는 이제 더 이상 헌신적인 지원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서서히 옥죄는 투명하지만 강철 같은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의 삶은 먹고, 자고, 글을 쓰는 모든 과정이 완벽하게 그녀의 시나리오 안에서,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는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그녀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 안락하지만 영혼 없는 금빛 새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을, 마치 만성적인 통증처럼 점점 더 자주 느끼게 되었다. 그는 평범한 일상, 익명의 자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마저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엘자는 “출판 준비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거나 “후원자이신 주인님의 사업이 잠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등의 애매한 이유를 대며, 집안에 놓여 있던 값비싼 가구와 희귀한 예술품, 심지어 명석이 개인적으로 아끼던 몇몇 물건들까지 하나둘씩 처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명석도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그녀가 파는 물건들의 목록이 점점 늘어나고, 그 빈자리들이 집안의 분위기를 눈에 띄게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만들자 깊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토록 엄청난 부를 소유했다던 익명의 집주인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그의 충실한 가정부가 집안 살림을 팔아서 소설 출판 비용을 충당해야 하는 것일까? 엘자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명석은 차마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어 그녀에게 직접 따져 묻지 못했다. 그녀의 평온한 표정 아래 숨겨진 차가운 분노를 감당할 용기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의 모든 생사여탈권이 그녀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엘자가 유독 병적으로 집착하며, 마치 자신의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며 절대 팔지 않고 지키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락방 가장 어둡고 깊숙한 구석, 두꺼운 먼지와 거미줄 아래 잊혀진 듯 숨겨져 있던 낡고 육중한 참나무 상자였다. 명석이 몇 번 그 상자의 정체에 대해 무심코 호기심을 보이자, 엘자는 평소의 부드럽고 우아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싸늘하고 날카로운, 거의 위협에 가까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저 상자에는 아주 오래되고 지극히 개인적인, 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있어요. 그러니 절대,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로 손대지 마세요. 명심하세요, 명석 씨. 만약 당신이 제 경고를 무시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겁니다.” 그녀의 눈빛은 그가 처음 보는 종류의, 차갑고 섬뜩한 경계심과 함께 광기마저 희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강력한 금기는 오히려 명석의 잠자고 있던 반항심과 묻혀 있던 호기심을 더욱 강력하게 자극했다. 그는 엘자가 정기적으로 장을 보러 인근 읍내로 나가는 수요일 오전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녀의 낡은 폭스바겐 엔진 소리가 자갈 깔린 진입로를 따라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그는 마치 금지된 성역에 발을 들여놓는 도둑처럼, 심장을 두근거리며 조심스럽게 다락방으로 향하는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계단을 올랐다. 다락방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퀴퀴하고 탁한 먼지 냄새와 희미한 좀약 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시간의 퇴적물이 뒤섞여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주머니 속 작은 랜턴 불빛에 의지해, 온갖 잡동사니와 버려진 가구들 사이를 헤치며 문제의 참나무 상자를 찾아냈다. 예상외로 상자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녹슨 경첩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뻑뻑하게 열리자, 그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그리고 그의 남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게 될 광경이 펼쳐졌다.
상자 안에는 최고급 가죽과 금박으로 호화롭고 아름답게 양장 제본된 수십 권의 책들이, 마치 고대의 비밀 문서처럼, 혹은 값비싼 보물처럼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책들의 표지에는 모두 동일한 제목과 저자 이름이 마치 낙인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미쉘 킹 컬렉션 (Michelle King Collection)’. 그리고 그 아래에는 ‘미쉘 킹 (Michelle King)’이라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름이 신비로운 아우라를 풍기며 찍혀 있었다. 명석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혹은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듯한 격렬한 충격과 함께 숨을 멈췄다. 미쉘 킹.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몇 년 전, 마치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하여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대중 양쪽 모두에게 엄청난 센세이션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불가사의한 천재 소설가.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채 극도의 은둔 생활을 하며, 오직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 그의 성별, 나이, 국적, 심지어 그의 실존 여부조차도 문학계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명석은 마치 신성 모독이라도 저지르는 듯, 떨리는 손으로 책 몇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 펼쳐보았다. 책들은 모두 유려하고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여 있었지만, 각 권의 내용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경악스러울 정도로 달랐다. 어떤 책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하고 잔인한 하드보일드 누아르 스릴러였고, 어떤 책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틱 판타지였으며, 또 다른 책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미래 사회의 암울한 전망에 대해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디스토피아 SF였다. 문체와 스타일, 주요 주제와 소재, 이야기 전개 방식과 속도, 심지어 문장 부호 사용의 미묘한 습관이나 선호하는 어휘까지. 도저히 한 사람의 정신과 손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각양각색의, 때로는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되기까지 하는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질적인 작품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독자를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는 악마적인 흡입력과, 감탄을 자아낼 만큼 깊고 풍부한 문학적 소양, 그리고 인간 존재의 가장 어둡고 깊은 심연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날카롭고 냉정한 통찰력이 번뜩이고 있었다.
왜 엘자가 이 전설적이고 신비로운 작가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듯한 방대한 컬렉션을, 그것도 이렇게 외딴 시골 저택의 어두운 다락방에, 마치 금지된 비밀처럼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열성 팬의 수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하고 비밀스러웠으며, 그 규모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이 미쉘 킹 컬렉션의 존재는, 그동안 명석의 머릿속을 안개처럼 떠돌던 수많은 의문점들 – 13채의 유령 같은 집, 숲 속의 이름 없는 비석들, 엘자의 편집광적인 문학적 집착과 그녀가 강요했던 특정 스타일의 글쓰기 – 과 과연 어떤 섬뜩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명석의 등줄기를 타고 차갑고 끈적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처럼, 거대하고 끔찍한 비밀의 껍질을 막 벗겨낸 듯한 불길하고 돌이킬 수 없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이 아름다운 호숫가가, 실은 거대한 거미줄의 중심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식할 것 같았다.
6. 감옥의 벽을 인식하다, 미쉘 킹이라는 이름의 허울 (Perceiving the Prison Walls, The Facade Named Michelle King)
다락방의 희미하고 먼지 자욱한 불빛 아래, 미쉘 킹 컬렉션의 책들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는 순간, 명석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흩어져 있던 혼란스럽고 불길한 퍼즐 조각들이 섬광처럼 제자리를 찾아가며 하나의 끔찍하고 명료한 그림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으로 늘어선 13채의 집들, 그 집들의 굳게 닫힌 차양 뒤에서 새어 나오던 은밀한 생명의 흔적들. 숲 속 깊은 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서 있던, 이름도 사연도 없이 번호만 새겨진 기이한 비석들. 광활한 사유지의 경계를 알리며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하던 녹슨 경고판. 문학에 대한 엘자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해박하고 편협한 지식과 그의 글쓰기에 가했던 편집광적인 집착과 방향 수정 요구. 그녀가 탐닉하던 어둡고 잔혹하며 뒤틀린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미스터리와 공포 영화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팔지 않고, 마치 신성한 유물처럼, 혹은 끔찍한 증거물처럼 숨겨두었던, 이 낡은 참나무 상자 속의 방대하고 이질적인 미쉘 킹 컬렉션.
깨달음은 마치 한겨울의 차가운 얼음물 세례처럼, 그의 혼란스러웠던 정신을 강타하며 모든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그는 이곳에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묘하게 유인되어, 이곳에 갇혀 있었다. 이곳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북돋아 주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안식처나 창작을 위한 이상적인 아틀리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그의 재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착취하기 위해 너무나도 정교하고 아름답게 설계된,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었다. 엘자는 다정하고 헌신적인 후원자나 충실한 가정부가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며 그의 정신을 조종하는 교활한 감시관이었으며, 어쩌면 그의 창작물을 가로채 ‘미쉘 킹’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는, 그의 영혼을 먹고 사는 포식자일지도 몰랐다. 그녀, 혹은 그녀의 배후에 존재하는 미지의 거대한 존재(아마도 그 ‘은둔적인 후원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은 자)가 필요했던 것은 천명석이라는 한 남자 개인의 육체나 영혼, 혹은 그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 ‘미쉘 킹’이라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가면 뒤에 숨어 발표될 새로운 작품을, 마치 공장의 생산 라인처럼 끊임없이,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로 생산해낼 수 있는, 재능 있고 순종적인 ‘작가’라는 이름의 부품이었다. 그는 엘자의 달콤한 속삭임과 안락한 환경이라는 미끼에 걸려든, 스스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원고료 없는 글 쓰는 노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그러나 굴뚝에서 희미하게 연기를 피워 올리던 다른 12채의 집들은? 그곳들에도 자신처럼 세상과 단절된 채, ‘미쉘 킹’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강요된 글쓰기를 하고 있는 또 다른 불행한 작가들이 감금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국적, 다양한 언어, 다양한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아니면, 이미 창작의 샘이 완전히 마르거나, 혹은 엘자나 그 배후 세력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불량품’으로 판정받아, 저 어둡고 축축한 숲 속의 이름 없는 비석 아래 차가운 흙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그의 등골을 타고 소름 끼치는 전율이, 마치 전류처럼 흘렀다. 미쉘 킹 컬렉션. 그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롭고 예측 불가능하며 실험적인 작품 세계는, 어쩌면 한 명의 신비로운 천재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과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재능과 개성, 그리고 꿈을 가졌던 여러 명의 작가들을 잔혹하게 착취하고 감금하여 얻어낸,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범죄의 결과물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는, 너무나 끔찍하지만 논리적인 추론에 이르렀다. 그 경이로운 다양성은 천재성의 증거가 아니라, 끔찍한 약탈과 살인의 증거였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극도의 공포로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가 피와 땀, 그리고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갈아 넣어 간신히 완성했던 첫 장편 소설. 그것은 이미 완벽하고 유려한 독일어로 번역되어, ‘미쉘 킹’이라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가면을 쓰고, 곧 세상에 나와 엄청난 찬사와 상업적 성공을 거둘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 작품이 성공한다면? 그는 다음 작품, 또 그다음 작품을, 그의 영혼이 완전히 고갈되어 재만 남을 때까지 끊임없이 강요당할 것이다. 그는 미쉘 킹이라는 이름의 살아있는 유령 작가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만약 그의 능력이 다하거나, 혹은 감히 저항하려 한다면…? 그는 차마 그 이후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숲 속에서 보았던, 차갑고 이름 없는 비석들이 그의 필연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거나 의심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생존하는 것을 넘어,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지켜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을, 이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은 낙원을, 이 정교하게 위장된 지옥을, 필사적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생존 본능이 마침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먹이가 아니라, 사냥꾼이 되어야 했다.
7. 불꽃 속에서 피어난 자유의 갈망, 필사의 도주극 (The Craving for Freedom Ignited in Flames, A Desperate Escape Drama)
자각의 순간부터, 명석의 모든 사고와 감각은 오직 ‘탈출’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극도로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는 마치 숙련된 배우처럼, 겉으로는 엘자에게 여전히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를 유지하며, 마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어리석은 예술가인 척 연기했다. 그는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그녀의 문학적 조언에 감사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장군처럼, 치밀하고 절박하며 냉정한 탈출 계획이 숨 가쁘게 세워지고 있었다. 그는 엘자의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 그녀가 집을 비우는 정확한 시간과 요일, 저택 주변의 복잡한 지형과 가능한 모든 도주 경로, 심지어 그녀가 자동차 키를 무심코 던져두는 핸드백의 종류와 위치까지, 마치 스파이처럼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억하며 머릿속 지도에 새겨 넣었다. 엘자는 어김없이 매주 수요일 오전, 읍내의 가장 큰 유기농 마트에서 일주일치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 오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가 그녀가 최소 두 시간에서 세 시간 가량 집을 비우는, 그에게 주어진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회의 창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호수와 끝없는 숲으로 완벽하게 고립된 이 저택의 지리적 위치였다. 가장 가까운 인가가 있는 마을까지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도 쉬지 않고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고, 그 길조차 험준한 산길과 미로 같은 숲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보 탈출은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차가 반드시 필요했다. 엘자의 낡았지만 튼튼해 보이는 폭스바겐 골프. 그녀는 항상 외출할 때 사용하는 값비싼 가죽 핸드백 안쪽의 비밀스러운 주머니에 차 키를 넣어 다녔다.
그는 계획 실행 며칠 전부터, 엘자가 깊은 잠에 빠진 한밤중을 이용해,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집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손의 감각에만 의지하여 비상용 랜턴과 다용도 스위스 군용 칼(그가 이곳에 올 때 가져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숲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비상식량(고열량 에너지 바 몇 개와 말린 과일, 견과류 한 봉지)과 깨끗한 물을 채운 물통을 찾아 자신의 방 옷장 가장 깊숙한 곳, 낡은 여행 가방 안에 숨겼다. 그리고 계획의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도구, 그는 창고 구석 먼지 쌓인 선반 위에서 찾아낸 오래된 등유 랜턴용 라이터 기름통과 성냥 몇 갑을 확보했다. 단순한 도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의 추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이 끔찍한 장소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혼란스러운 교란 작전, 즉 화재가 필요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붉고 격렬하며 정화하는 듯한 불꽃의 이미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운명의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하늘은 그의 절박한 심정과 무관하게, 아이러니할 정도로 눈부시게 맑고 푸르렀다. 엘자는 여느 때처럼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외출 준비를 했다. 그녀는 현관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듯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의 눈빛이 잠시 명석의 서재 창문을 향하는 것을 그는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현관문을 단단히 잠그고, 자갈 깔린 진입로를 따라 그녀의 낡은 차를 몰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엔진 소리가 숲의 침묵 속으로 완전히 잦아들자마자, 명석은 미리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각본대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의 손은 놀랍도록 침착하고 정확했다.
그는 먼저 엘자의 침실로 단숨에 달려가, 그녀가 침대 옆 협탁 위에 무심코 던져둔 고급 가죽 핸드백을 거칠게 뒤져 차 키를 찾아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그의 땀에 젖은 손바닥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음으로, 그는 미리 준비해둔 라이터 기름통을 들고 집안 곳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두꺼운 벨벳 커튼, 푹신한 소파와 양탄자, 엘자의 침대 매트리스, 그리고 무엇보다 서재의 벽면을 가득 채운 방대한 책들과 그가 썼던 원고 뭉치들 위에 아낌없이 기름을 뿌렸다. 매캐하고 역겨운 기름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모든 고통과 굴욕, 착취의 근원지였던 서재, 그가 영혼을 갈아 넣어 불길한 걸작을 탄생시켰던 바로 그곳에, 떨리는 손으로 성냥불을 그었다.
마른 종이와 기름, 그리고 묵은 원한이 만나 순식간에 격렬하고 탐욕스러운 불길이 포효하며 치솟아 올랐다. 검붉고 사악한 화염은 순식간에 서재 전체를 집어삼켰고, 뜨거운 열기에 창문 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며, 하늘을 향해 검고 불길한 연기 기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그 파괴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된 듯 멈춰 섰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련 없이 불타는 집을 등지고 뛰쳐나왔다. 엘자의 폭스바겐에 뛰어올라 시동을 걸자, 낡은 엔진이 힘겹게 기침하며 울부짖었다. 그는 백미러를 보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가, 혹은 자신이 될 뻔했던 끔찍한 미래가 불길 속에서 소멸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거의 바닥까지 밟았다. 속도계 바늘이 위험 수위까지 치솟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최대한 빠르고 멀리, 이 저주받은 호숫가 저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이전에 엘자와 함께 읍내에 나갔을 때 보았던 큰 도로 표지판만을 따라 무작정 차를 몰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많은 거리를 달렸을까, 등 뒤 저 멀리서,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점차 분명하게, 경찰차나 소방차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엘자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와 화재를 발견하고 신고했거나, 혹은 이 저택 단지 전체를 감시하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작동하여 그의 탈출을 감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포장된 도로를 따라 달리는 것이 극도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핸들을 거칠게 꺾어 인적이 드문 좁은 숲길로 차를 몰아 들어갔고, 수풀이 우거져 눈에 잘 띄지 않는 적당한 곳에 차를 버린 뒤, 엔진을 끄고 키를 뽑아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두 발과 희미한 생존 본능에 의지해, 어둡고 깊은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며칠 밤낮을 그는 길 잃은 짐승처럼, 혹은 쫓기는 도망자처럼 숲 속을 헤매며 걸었다. 굶주림과 갈증, 극심한 피로와 탈진, 그리고 언제 어디서 엘자나 그녀의 하수인들에게 잡힐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와 편집증 속에서 그의 의식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 발은 온통 피투성이 물집과 깊은 상처로 뒤덮였고, 온몸은 날카로운 가시덤불에 긁힌 붉은 생채기로 가득했으며, 옷은 흙과 땀으로 더럽게 찢겨나갔다.
그가 거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차가운 숲 바닥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려던 순간, 마치 신의 마지막 자비처럼, 혹은 잔인한 환상처럼, 저 멀리 언덕 너머로 작고 따뜻한 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의지와 힘을 짜내, 비틀거리며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는 작은 마을 어귀에 도착했고, 때마침 새벽 배송을 위해 지나가던 친절하고 무뚝뚝한 트럭 운전사의 도움으로 가장 가까운 대도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너덜너덜한 몰골과 공황 상태에 빠진 눈빛으로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의 행색은 너무나 남루했고,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그는 마치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환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서린 극도의 공포와 절박함, 그리고 심각한 영양실조와 탈수, 온몸에 가득한 상처들은, 그가 평범하지 않은, 끔찍하고 잔혹한 일을 겪었음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깊은 의구심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일단 그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와 의료 지원을 제공하고, 그의 충격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길고 험난한 여정의 첫 번째 막이 내리고 있었다.
8. 미쉘이라는 이름의 유령, 완벽하게 지워진 흔적들, 그리고 끝나지 않은 싸움 (The Ghost Named Michelle, Perfectly Erased Traces, and the Unending Battle)
대사관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과 지원, 그리고 복잡한 신원 확인 절차를 통해, 명석은 마침내 악몽 같았던 독일 땅을 벗어나,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러나 이제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독일 경찰과 한국 경찰 양측에 엘자라는 여성과 미쉘 킹이라는 이름, 그리고 13채의 호숫가 저택에 얽힌 끔찍하고 충격적인 비밀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상세하고 절박하게 진술하며 정식 수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수사는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지부진했고, 마치 거대하고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아무런 실질적인 성과 없이 곧 난관에 봉착했다.
독일 경찰이 명석의 진술과 그가 희미하게 기억하는 지도를 토대로 문제의 호숫가 저택 현장을 수색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그가 불태웠던 집의 잔해조차 깨끗하게 치워지고 새로운 흙으로 덮여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아무런 건물도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자연 상태로 위장되어 있었다. 나머지 12채의 집 역시 굳게 잠긴 채 텅 비어 있었고, 최근까지 누군가 거주하거나 활동했다는 어떠한 미세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엘자라는 여성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녀의 신원을 확인할 만한 어떤 단서도 – 지문, 머리카락, 혹은 그녀가 남긴 어떤 기록도 –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처럼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미쉘 킹’이라는 이름은, 문학계에 떠도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명성 외에는, 그 실체를 증명하거나 추적할 수 있는 어떤 법적, 행정적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명석이 보았던 숲 속의 이름 없는 비석들 역시, 마치 땅속으로 꺼지기라도 한 듯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모든 것이 거대한 연극이 막을 내린 후 하룻밤 사이에 철거된 정교한 무대 세트처럼, 신기루처럼 완벽하게,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결국, 명석의 충격적인 증언을 뒷받침할 어떠한 물리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수사는, 증거 불충분과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문 제기 속에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그의 주장은 결국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한 개인의 망상이나 과장된 환상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었다.
명석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독일의 그 안개 자욱하고 비밀스러운 호숫가에, 불타는 집의 잔해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는 밤마다 엘자의 차가운 눈빛과 불길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그것이 실제였는지 환상이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리고 이름 없는 비석들의 섬뜩한 이미지에 시달리며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아니, 쓸 수 없었다. 펜을 잡으면 손이 격렬하게 떨렸고, 눈앞의 하얀 원고 용지는 마치 엘자의 싸늘하고 비웃는 듯한 시선처럼 느껴져 그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그는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고,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과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익명의 존재로 작은 시골 마을로 내려가 폐인처럼 조용히 숨어 지냈다. 시간만이 그의 깊은 상처를 희미하게나마 아물게 해주고, 끔찍한 기억의 파편들을 망각의 강물 속으로 떠내려 보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몇 년이라는 시간이, 강물처럼 무심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그는 작은 동네 서점에서 소일거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고, 작가로서의 꿈은 이미 오래전에 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가을 오후, 새로 들어온 신간들을 정리하던 중, 그의 눈에 익숙하면서도 온몸의 피를 차갑게 식게 만드는 이름이 들어왔다. ‘미쉘 킹 컬렉션’의 최신작. 두껍고 고급스러운 양장본 표지에는 여전히 신비로운 아우라를 풍기는 ‘미쉘 킹’이라는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멈추는 듯했고,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의 떨리는 손은 이미 자석에 이끌리듯 책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호기심 반, 그리고 깊은 곳에서 스멀거리는 끔찍한 확인의 두려움 반으로 그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치 금지된 주문을 외우듯,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그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격렬한 충격과 함께, 영혼의 바닥까지 가라앉는 듯한 깊고 차가운 허무감에 휩싸였다.
그 책은, 단 한 글자도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자신이 독일의 그 외딴 감옥 같은 저택에서 피와 땀, 그리고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갈아 넣어 간신히 완성했던, 그의 첫 장편 소설이었다. 몇몇 문장과 이야기의 세부적인 설정, 등장인물의 이름, 그리고 특히 결말 부분이 그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더욱 어둡고 염세적으로, 교묘하고 세련되게 수정되어 있었지만,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와 핵심적인 플롯, 그리고 문장 곳곳에 숨길 수 없이 남아있는 그 특유의 문체와 리듬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책 표지에 박힌 저자의 이름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쉘 킹’일 것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혹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소리 없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의 가장 깊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태어난,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작품은, ‘미쉘 킹’이라는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익명의 제단에 바쳐진 또 하나의 이름 없는 제물이 된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서점 안은 평화로운 오후의 나른함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미쉘 킹이라는 이름에 열광하며 그의 ‘경이로운 천재성’과 ‘예측 불가능한 상상력’을 찬양하는 기사를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도 그 화려하고 신비로운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하고 잔혹한 진실, 그 이름 아래 묻혀버린 수많은 작가들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빼앗긴 꿈들을 알지 못했다. 명석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름 없는 비석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을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그는 아직 숨 쉬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증언할 수 있었다.
그는 서점을 나와, 차갑게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꺼져 있던, 재 속 깊이 묻혀 있던 작은 불씨가 다시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다시 글을 써야만 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노후 보장이나 세속적인 성공, 혹은 헛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빼앗긴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서. 미쉘 킹이라는 거대한 허상과 그 뒤에 숨은 잔혹한 시스템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혹은 미래에 나타날지도 모를, 자신과 같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위해서. 미쉘 킹, 혹은 그 시스템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 실체를 밝혀내는 것. 그것이 이제 그의 남은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그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의 진짜 싸움은, 어쩌면 홀로 감당해야 할 길고 외로운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거나 숨지 않을 것이다. 그의 펜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글쓰기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그리고 복수를 위한 날카로운 칼날이 될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비에 젖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