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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의 남자

by 남킹


카페 Laetitia

바다는 창밖에서 은빛 비늘을 뒤집으며 넘실거렸다. 오후의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해, 유리창 너머 수평선에 금빛 가루를 흩뿌렸다.

“늦었네.” 미자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질책보다는 익숙한 체념이 배어 있었다. 그녀 앞에 놓인 분홍색 일회용 커피잔에는 ‘Laetitia’라는 글씨가 하얗게, 마치 부서지기 쉬운 설탕 장식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하늘을 닮은 바다를 담는다’는 문구는 이제 막 퇴색하기 시작한 꿈처럼 아련했다. 잔 가장자리에는 그녀의 뭉툭하고 진한 루주 자국이, 마치 봉인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번데기를 닮은 입술 자국.

“시간이 갑자기 빨리 가더라고.” 나는 무심하게 둘러댔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실은 볕이 잘 드는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워, 벽 틈으로 스미는 외풍의 서늘함을 즐기며 무의미하게 뒹굴었다. 먼지 쌓인 문갑 위, 오래전 멈춰버린 탁상시계는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증언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 자체가 내 방 안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한 듯했다. 누에고치처럼 푹신하지만 어딘가 형태가 무너진 베개에 엉덩이를 기댄 채, 방구석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히며 탈출을 시도하는 파리의 절망적인 날갯짓을 보고 있었다. 유리에 비친 것은 파리의 사투였지만, 어른거리는 것은 꾀죄죄하고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었다.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여기 분위기, 네 취향이잖아.” 그녀는 까맣고 못생긴 재떨이를 가리켰다. 이미 담배꽁초 네 개가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는 아직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보다 먼저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는 증거. 레너드 코헨의 <Boogie Street>가 낮은 볼륨으로, 그러나 공간 전체를 감싸듯 흐르고 있었다.

‘o my love, I still recall / The pleasures that we knew’

“아침은 먹었고?” 그녀가 지나치게 크고 둥근, 잠자리 눈 같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드러난 눈은 화장기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 아침 식사를 묻는 것은 그녀 나름의 비꼼일까, 아니면 진정한 관심일까. 홀 안에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썰물처럼 빠져나간 관광객들의 부산함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디귿 자로 툭 튀어나온 벽에는 세로로 길쭉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와트만지에 템페라 물감으로 그린 듯, 표면은 거칠고 색감은 낯설었다. 꿈속 풍경처럼 몽환적이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샌드위치로 때웠지.”

“그건 간식이지, 밥이 아니고.” 그녀가 거의 팔짝 뛰듯 몸을 일으키며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 눈부시게 하얀, 거대한 접시 위에 놓인,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화려한 요리 사진이었다. 섬세하게 쌓아 올린 채소와 소스, 금가루라도 뿌린 듯 반짝이는 장식. 사치스러움이 액정 너머로 흘러내리는 듯했다. 포크나 수저로 저 예술적인 장식을 부수어 입에 넣는 행위 자체가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꽤 비쌌겠는데?”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위장이 허기보다는 위축감으로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반은 낼게.” 그녀는 앙상하게 드러난 어깨에 걸친 민소매 블라우스 끈을 매만지며 말했다. 블라우스는 마치 그녀의 지친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새로운 제안을 던지고, 나는 그 제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며 목적지를 검색하고, 나는 그 결과를 묵묵히 지켜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선택하고, 나는 그 선택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세상에는 아직도 탐험해야 할 미지의 영역과 맛보아야 할 새로운 경험들이 넘쳐나는 듯했다. 반면, 나의 세상은 설득당하고 따라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커피, 마셔야지?” 나는 물었다. 그녀의 입꼬리에 살짝 번진 루주를 손가락으로 닦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언제나 화장을 과하게 했다. 마치 맨얼굴을 감추려는 듯, 혹은 또 다른 자신을 덧씌우려는 듯. 창밖에서는 갑자기 거세진 바닷바람에 행인들이 옷깃을 여미며 멈칫거렸다. 카페 앞 줄지어 선 워싱턴야자 잎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듯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바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망찰 서성거렸다. 나는 유리 너머로 펼쳐진 이 요란하고 생생한 풍경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1층 주문대로 향했다.

“내 것도.”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따라왔다. 그녀의 메뉴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메리카노.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마치 생명수처럼 달고 살았다. 집에서도 물 대신 마셨고, 때로는 물을 지나치게 많이 부어 숭늉처럼 희석해서 마시기도 했다. 그 묽은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은 온통 커피 사진과 카페 방문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커피를 맛보고 모든 카페를 순례하겠다는 서원이라도 세운 사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순례'가 그녀가 쉬는 일주일에 단 하루로 제한된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녀가 주 5일 근무자였다면, 내 타임라인은 지금보다 두 배는 많은 커피 사진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휴대폰 액정과 카페의 네온사인. 그것이 미자가 구축한 세계의 전부처럼 보였다. 아, 어쩌면 이것이 비단 미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요즈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뤼자님이 모닉끌라스 카페에서 인증샷 올렸어.” 그녀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뤼자. 그녀를 추종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제자 중 하나였다.

“거긴 어떻데?” 나는 그녀 앞에 길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섬세한 유리잔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카페 스피커에서는 게리 B.B. 콜먼의 <The Sky is Crying>이 블루스 특유의 느른하고 흐물거리는 리듬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Can't you see the tears roll down the street’

창밖의 바다는 햇빛에 따갑게 빛났고,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짙은 선글라스는 검은 안개처럼 그녀의 표정을 가렸고, 앙상한 팔다리만이 희미한 형체로 다가왔다. ‘더럽게 눈부신 하늘이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매번 똑같아. 감탄사뿐이야.”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댓글 창을 채우는 추종자들은 ‘우와!’, ‘대박!’, ‘너무 예뻐요!’ 같은 감탄사 외에는 다른 표현을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온라인상의 선지자였고, 추종자들은 그녀가 남긴 <쿠오바디스>의 흔적을 따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들은 미자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거 아냐. 커피 맛이라든지.”

미자는 입술을 뭉툭하게 모으고 눈동자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옆 테이블, 투명한 유리 벽으로 분리된 흡연석에 앉은 중년 커플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부는 막혀 있었지만 외부는 베란다로 열려 있는 구조였다. 열린 공간을 통해 들어오는 거친 바닷바람 소리가 쇳소리처럼 날카롭게 들렸다.

“플래버(Flavor)가 좀 약하데. 와이니(Winey)함도 거의 못 느끼겠다고 하고. 아무래도 한파 때문인 것 같아.”

여자는 요즘 ‘와이니’함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좋은 커피를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정작 와인은 좋아하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커피에서는 와인 같은 시큼함과 복합적인 향미를 집요하게 찾아 헤맸다. 흡연석은 어느새 구수한 담배 연기로 자욱해졌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젊은 남자 세 명이 꽁초를 허공으로 튕겨 버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미자를 노골적이고 끈적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는 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자석과 같았다. 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파가 왜 커피 맛에 영향을 주는데?”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브라질에 엄청난 한파가 두 번이나 들이닥쳤다고 뉴스에 나왔잖아.”

“브라질 한파랑 와이니함이랑 무슨 상관인데? 와이니는 블루마운틴에 많다고 네가 그랬잖아.” 참고로 블루마운틴은 자메이카 산이다. 내 지적에 여자의 미간에 선명한 세로줄이 잡혔다. 팽팽하던 이마가 순간적으로 쪼그라들었다. 짙은 화장이 가면처럼 금이 가며 툭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바보 아냐! 너 경제학과 나왔다는 거 진짜 맞아?”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기력도, 의지도 없었다.

“내가 전에 뭐랬어? 커피는 결국 배합(Blending)이 중요하다고 했지!”

“???”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에 대해 쏟아내는 수많은 정보들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생각 좀 해봐!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인 브라질에 한파가 오면? 생산량이 줄지. 생산량이 줄면? 가격이 오르지. 가격이 오르면? 비싼 아라비카 원두 대신 값싼 로부스타 원두를 더 많이 섞게 되겠지. 그럼 당연히 배합 비율이 달라지고, 그 과정에서 가장 비싼 원두 중 하나인 블루마운틴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 이 바보야!” 그녀는 마치 경제학 원론 강의라도 하듯 열변을 토했다. 실로 대단한 <나비 효과> 이론이었다. 브라질에서의 나비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 대신, 브라질에서의 약간 쌀쌀한 날씨(그곳의 한파가 우리네 엄동설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지만)가 지구 반대편, 제주도의 한 카페에 앉은 여자의 도도하고 섬세한 커피 취미 생활에 이렇게 즉각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가?

나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E = mc²> 공식을 떠올렸다.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는 그 놀라운 통찰. 그렇다면 나 역시 거대한 잠재 에너지를 가진 존재가 아닌가. 만약 내 몸의 질량이 온전히 에너지로 변환된다면, 아마 지구를 수십 번이라도 산산조각 낼 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터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그저 이론 물리학자였을 뿐, 그 공식을 직접 증명하지는 못했다. “내 생전에 이것이 증명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던가. 웬걸. 그가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인류는 그 공식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끔찍한 시제품까지 만들어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그 덕분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불안감을 떠안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가 이 세상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명백한 가능성.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한 위대한 과학자의 지적인 날갯짓이,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이토록 깊은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는가?

“지금 내 말 비웃는 거야?” 미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상대방의 얼굴에 찰나처럼 스치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다만, 그 의미를 제멋대로, 혹은 자신의 불안에 기초하여 엉뚱하게 해석할 뿐이다.

“아니, 아니야. 잠시 다른 생각 좀 했어.”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무슨 생각?” 그녀가 입술을 엷게 펴며 추궁하듯 물었다. 요즘 그녀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짓는, 똑같은 입술 모양이었다. 모든 사진 속에서 그녀는 같은 표정, 같은 입술 모양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멸망한 지구에 대해서.”

“또! 또 그놈의 영화 봤구나!” 그녀는 즉각 단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커피나무가 전부 사라져 버린 브라질을 상상하다 보니까…” 나의 어설픈 거짓말은 이어졌다.

“제발, 그런 황당무계한 SF 영화 좀 그만 봐! 현실 감각 좀 키우라고!” 그녀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인간은 타인을 자신이 축적한 경험과 편견을 통해 정의하고, 그렇게 정의된 상대방의 이미지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간직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나’는 실제의 내가 아니다. 나는 종종 나에 대해 심하게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지인들을 만나곤 한다. 그리고 그 왜곡된 시선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깊은 고통을 느낀다. 그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벌어지곤 한다. 물론, 미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존재다. 조금 별스러울 정도로 진한 화장을 하고, 계절에 맞지 않게 무척 짧고 얇은 옷을 즐겨 입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아, 예, 예, 예… 네, 제가 잠시 제주도에 내려와 있습니다. 네, 네, 네, 뭐 별일은 아니고요… 예, 그렇죠. 네, 네, 네, 골프 좀 치려고 했는데… 근데 바람이 너무 세서… 네, 네, 네, 맞습니다. 여기는 오면 절반은 바람 때문에 못 치고 그냥 갑니다, 허허….” 흡연석의 중년 아저씨가 온 카페가 떠나가라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방구석에서 발버둥 치던 파리는 아직도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뒤에 열린 베란다 공간이 있는데도, 녀석은 투명하게 막힌 유리 벽에 온 힘을 다해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애석하지만,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신의 마음일까. 개입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것.

“알잖아. 내가 예전에 쓰려고 했던 거. 지구 멸망 후의 세상 이야기…” 나는 웹소설 작가를 잠시 꿈꿨었다. 직업이라고 하기엔 민망하고, 부업이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엄밀히 말하면 취미였지만, 그걸로 단 한 푼도 벌지 못했으니 취미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아마도 빈약한 상상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닥치는 대로 SF 영화와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봤었다.

“그거 쓰다가 중간에 관뒀잖아?” 그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웹소설 연재는 총 18화에서 멈췄다. 누적 관심 독자 2명. 댓글 0개. 회당 평균 조회수 10회 미만. 그나마 18화까지 꾸역꾸역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익명의 독자가 남긴 단 한 줄의 댓글 덕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하게 묘사된 인간 군상의 우울한 미래.’ 그 한 줄이 잠시나마 나에게 희망을 불어넣었었다.

“네, 네, 네, 아이고, 그건 좀 곤란하고요… 예, 다음에 제가 다시 한번….” 중년 아저씨의 통화는 계속되었고, 옆에 앉은 여자가 남자의 담배를 대신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래서 말이야… 좀 더 사실적인 걸 써볼까 했지.”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넷플릭스 앱을 띄워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최근 시청 목록이 화면을 채웠다.

“뭐야, 이건 또. 전부 사형수 관련 다큐잖아.”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순간의 실수, 혹은 어리석은 판단, 또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인생이 송두리째 꼬여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다 우연히 발견된 DNA 증거 같은 첨단 과학 기술 덕분에 극적으로 풀려나게 되는, 그런 할리우드식의 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쓰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진짜 살인을 저지른 그들, 그 범죄자들의 뇌 속에 깊숙이 잠재된 폭력성의 근원을 파헤치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유추하며, 그것을 잘게 쪼개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지난 2주 동안 관련 다큐멘터리와 영화 36편을 섭렵한 후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글쓰기 포기. 나의 과대망상적인 에너지는 때때로 나의 실제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명백한 능력 미달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포기했어.” 나는 덧붙였다.

“왜?”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당연하지! 누가 그런 칙칙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겠어? 제발, 알콩달콩 달달한 사랑 이야기 좀 써 봐!”

“맘마미아 같은 거?” 미자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그녀는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지독했던 왕따의 기억으로 점철된 우울한 사춘기를 마감했다고 했다. 영화 속 로맨스와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 뜨거운 태양, 신나는 아바의 음악과 춤에 흠뻑 빠져들면서 마음속 깊이 응어리져 있던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캔버스 삼아 변화를 시도했다. 귀밑과 손등에 작은 문신을 새기고, 귓불에는 일곱 개의 귀걸이를 달았으며, 하얀 이어폰으로 세상의 소음을 차단했다. 몸을 가리기 위한 보온용 옷들은 최소한의 가림막 역할만 하는 짧고 얇은 옷들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신발 굽은 점점 높아졌고, 머리카락은 수시로 색깔을 바꿨다. 테크노 음악에 심취했고, 바에 가면 호세 쿠엘보 테킬라를 주문해 손등에 바른 소금을 핥아 먹으며 원샷을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작년 이맘때쯤, 우리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였다.

“하하하하….” 옆 테이블 중년 남자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입을 벌릴 때마다 그의 금니가 조명에 반짝였다. 미자는 그 소리가 거슬리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반면 함께 있는 여자는 흐뭇한 미소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재떨이에서는 꺼진 줄 알았던 담배꽁초에서 마지막인 듯 푸른 연기 한 줄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남자의 배는 보기 좋게 지방으로 충만했고, 턱선은 풍요로움으로 무너져 있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꼰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의 코는, 누가 봐도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친 듯 부자연스럽게 뾰족했다. 여자가 남자의 머리에 묻은 무언가를 부드럽게 털어주었다. 헤어젤이 과하게 발라져 있어 번들거리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 새로운 흡연자 두 쌍이 시끄럽게 웃으며 흡연석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자리를 잡자마자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며 허공에 희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곧이어 은밀한 쑥덕공론이 이어졌다. 그중 한 명, 섬뜩할 정도로 깡마른 몸매의 여인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커다란 유방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후, 또다시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는 것보다 턱을 더 요란하게 까불리며 웃었다. 단추를 하나씩 엇갈리게 채운 듯 불안정해 보이는 또 다른 여인은 갑자기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런 로맨스 소설, 네가 쓸 수 있겠어?” 미자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의심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물론, 나는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 당연하지.” 나는 허세를 부렸다.

“그럼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한번 써봐. 대신 비련의 여주인공은 절대 말고.” 그녀는 속삭이듯 말하며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 볼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에 가는 듯했다.

‘I got a bad feeling, my baby don't love me no more.

Now the sky's been crying, the tears rolling down my door’

게리 B.B. 콜먼의 노래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유리창에 붙어 사투를 벌이던 파리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린 듯했다. 더 이상 날갯짓도 하지 않고, 그저 투명한 벽의 일부인 양 공간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마지막 발악처럼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몸을 떨며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나는 미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테이블 위의 냅킨으로 그 가엾은 녀석을 망설임 없이 잡아 눌러 죽였다. 나는 선량한 마음으로 녀석의 고통을 끝내주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할리우드의 멍청한 영웅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수많은 악당들을 죽여 없앴다. 하지만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즉, 고통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진정한 정의는, 그들이 살아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흉악범들에게 진정한 형벌은, 그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성심성의껏 잘 돌보며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독방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시간의 속도는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아, 그렇지, 아인슈타인. 시간이 느리게 가는 만큼, 고통의 총량은 늘어날 것이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36편의 사형수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그저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 <더럽게 느리다>.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간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미자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제외하면 말이다.

흡연자들이 테이블 위에 흘리고 간 과자 부스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베란다 창문 틈으로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비둘기들은 세찬 바람에 호르르 부풀려진 가슴 털을 비실거리며 바닥을 부지런히 쪼아대기 시작했다.

하미자

‘하미자’는 내가 그녀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그녀의 본명은 김인자. 미국 이름은 <엘리자베스 킴 하일>이었다. 중학생 때 어머니의 재혼으로 계부를 따라 미국 미시간주의 작은 도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니다 중퇴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재작년 시월의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자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녀의 방, 투박하고 수수하기 짝이 없는 책상 위에 놓인 손바닥만 한 투명 아크릴 액자 속에 그들이 있었다. 사진 속 미자는 지금처럼 활짝, 어쩌면 조금은 과장되게 헤벌쭉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보다 키가 한 뼘은 족히 더 커 보이는 여동생이 우아하고 차분한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다지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나의 가벼운 농담에 그녀는 금방 정색을 했다.

“사진이 그냥 그렇게 나왔을 뿐이야. 잘 봐봐. 키 빼고는 나랑 완전 판박이니까.” 그녀는 우겼지만,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직 미시간주에 살고 있다고 했다. 오래전에 이혼한 생부에 대해서는 기억이 거의 없다고, 그저 희미한 그림자 같다고 말했다.

“이혼 후에 한 번도 만난 적은 없고?”

“음… 없어.”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짧은 망설임 속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살아 계신지 어떤지도 모르고?”

“중국 어디에 있다는 얘기만 얼핏 들었어. 그것도 아주 먼 친척한테서.” 그녀는 작고 까만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말했다. 그 눈동자에는 슬픔이나 그리움보다는 무관심에 가까운 감정이 어려 있는 듯했다.

미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다분히 극적이라고 해야 할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안개처럼 가랑비가 흩뿌리며 온종일 축축하고 습한 기운이 실내 구석구석까지 스며들던 날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연주하던 지하 락 카페, 희미한 조명과 담배 연기가 뒤섞인 중앙 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맞은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보았다. 짙은 화장, 가슴이 깊게 파인 도발적인 의상, 그리고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주변의 시선을 즐기는 듯 연신 밝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삶에는 어떤 내막이나 그늘도 한순간도 감추어져 있지 않은 듯, 거침없이 쾌활해 보였다. 이런 여인은 쉽게 잊기 어렵다. 더욱이, 그날 밤 나의 짧은 연주가 끝나고 카페를 나섰을 때 이미 사라져 버렸던 그녀를, 다음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 번화한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연히 다시 발견하게 된다면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무심한 하늘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길바닥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광경은, 누구나 그렇듯이, 흔히 마주치는 일상의 풍경은 아니다. 그녀 옆에는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데, 한 손으로 그녀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고 호흡을 확인하는 듯했지만, 주변을 에워싼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행해지는 그 행위의 쑥스러움이 그의 행동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서투른 행동이 자칫 구경꾼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러므로 그는 차라리 천천히 뒤로 물러나 익명의 인파 속으로 흡수될 수 있는 상황, 예를 들어 구급차가 도착한다거나 하는, 그런 계기가 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는 듯 어정쩡한 자세로 주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발치께에는 허리를 반쯤 구부린 채 서 있는 또 다른 남자, 아마도 그녀의 동료인 듯한, 사람이 마치 죄수처럼 홀로 서서, 흐르는 인파가 잠시 멈추어 선 도심의 섬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초롱초롱하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구경꾼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 보였다.

나의 행동 역시 평소의 나와는 좀 달랐다. 예전의 나였다면 틀림없이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구경꾼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애써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도 아닐뿐더러, 종교적 신념에 심취하여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도우라는 선지자의 말씀을 따르는 그런 인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요즘 시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태도로 떠오른 방관자적 무심함, 혹은 무관심의 소유자.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회색분자. 세상 모든 귀찮은 일에는 신경 끄고 사는 편이 속 편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하지만 나는 쓰러진 그녀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긴,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본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나치게 짙은 화장, 몸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짧고 현란한 옷, 손목과 발목의 문신, 귓불을 따라 촘촘히 박힌 여러 개의 귀걸이, 그리고 강렬하게 붉은 립스틱. 나는 나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재빠른 솜씨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 뺨을 그녀의 입과 코 근처에 바짝 가져다 댔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얕은 숨결이 느껴졌다. ‘살아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축구 선수를 동료가 응급조치하는 장면을 TV에서 본 기억을 떠올리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당겨 이마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목 뒤에 넣어 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기도 확보.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쉿’하는 가느다란 쇳소리 같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 울퉁불퉁했고, 락 카페에서 보았던 그 화사하고 깔깔거리던 모습은 도저히 연상되지 않았다.

“땅콩 알레르기가 심하게 있어요.” 그녀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다. 다음 날 저녁, 내가 연주하는 락 카페 입구, 지하로 이어지는 어둡고 지저분한 계단 앞에서였다. 그녀는 아직 붓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얼굴로, 어딘가 어색하고 미안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약 370미터 거리의 응급실까지 자신을 업고 뛰어간 은인에 대한 감사의 미소였을 것이다. 비대칭으로 갈라지는 입술 사이로 고르지 못한 치열이 살짝 엿보였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요.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네, 정말 덕분에요. 가끔 재료 속이고 아몬드 대신 값싼 땅콩을 몰래 넣는 식당들이 있거든요. 어제 그 식당처럼.”

“아, 그… 인도 전통 커리 전문점이라고 간판 걸었던 곳?”

“네. 심할 때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에 마비가 오기도 해요. 어제처럼요.” 그녀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 공연 스케줄 좀 적어 주실 수 있어요? 시간 되면 자주 보러 올게요.” 그녀가 수첩과 펜을 내밀며 말했다. 이런! 스케줄 표라니! 그런 사치스러운 것이 나에게 있을 리가 있나! 어쩌다 아는 형의 부탁으로 대타 연주를 잠시 한 것뿐인데. 그것도 손님이 거의 없는 한가한 이른 저녁 시간에 말이다.

“저는… 정해진 공연 스케줄은 없고요, 주로 길에서 연주합니다. 어제 쓰러지셨던 곳, 바로 그 근처에서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 Dionysus

“그 주소 근처에 파킹하고 한 1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된대. 사진빨이 완전 죽여준다는 거야.” 그녀가 또 다른 커피 블로거, <까페꾼08>님의 포스팅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의 지침에 따라 우리는 차를 몰았다.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고 높았으며, 바람은 여전히 세차게 불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한적하고 꾸불꾸불한 시골길. 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과 무성한 잡초, 그리고 거친 바람 소리뿐이었다. 나무와 바람, 그리고 내 옆자리의 여자. 어쩌면 이것이 내가 제주도에 내려와서 바랐던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도로 도망치듯 오기 전,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었다. 나의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여자를 갈망하고, 나의 어설픈 철학에 따라 녹색 잎사귀와 푸른 하늘,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가겠다고.

모든 것은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라고.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캔자스의 노래 가사처럼.

“근데 거기가 사유지라서 잘못하면 주인한테 쫓겨날 수도 있다는 댓글도 있더라… 뭔가 좀 스릴 있지 않아? 누군가가 애지중지 가꿔놓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몰래 훔쳐본다는 거.” 그녀는 오히려 그 점이 더 매력적이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마침내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지점 근처, 좁은 길 옆으로 차 두어 대 정도를 간신히 세울 수 있는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리자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고독한 정원 가꾸기를 즐기는 까칠한 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저기 위에 보니까 카페에 꽤 넓은 주차장도 있던데, 굳이 위험하게 여기에 차를 대고 걸어가야 해?” 내가 물었다.

“바보야! 그래야 사진빨이 제대로 산다고 했잖아!”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펼쳐 놓은 이 기이한 현대인의 여가 생활 양식. Behaviors Of the Photo, By the Photo, For the Photo. 사진의, 사진에 의한, 사진을 위한 행위들. 모든 경험은 결국 한 장의 완벽한 사진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한 것인가.

“게다가 이 비밀의 정원도 곧 폐쇄될지도 모른대. 주인이 엄청 까칠한 사람인가 봐.” 그녀가 덧붙였다. 당연한 일이다. 나만을 위한 소중한 공간에 불쑥불쑥 낯선 이들이 침범하여 발자국을 남기고 사진을 찍어댄다면, 나라도 당장 높은 담장을 세우고 철조망을 두를 것이다. 우리는 마치 금단의 구역으로 들어가는 듯, 개찰구처럼 좁게 난 길을 따라 울창한 관목 숲 사이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예상보다 몹시 가팔랐다. 이끼 낀 돌담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무덤 몇 기를 지났다. 바짓가랑이에 쐐기풀 잎사귀가 사각거리며 스쳤다. 길가 바위틈 한편을 가득 메운 백리향의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축축한 흙과 이끼가 뿜어내는 신선하고 달콤한 냄새도 코끝을 간질였다. 마침내 시야가 트이면서, 아담하지만 위태로운 모습의 폐허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붕 서까래는 이미 주저앉았고, 벽체의 일부는 허물어져 금방이라도 폭삭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넘어질까 봐 미자의 가늘고 차가운 손을 꼭 잡고,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천천히 헤치며 나아갔다.

“오, 예스!” 폐허 옆,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든 작은 뜰 앞에 이르자 미자는 탄성을 터뜨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흰색과 보라색, 연분홍색, 그리고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색감의 수국들이 탐스럽게 여러 덩이로 피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가녀린 줄기 끝에 붉은 실핏줄이 선명하게 비치는 노란 달맞이꽃들도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익숙하게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휴대폰을 가로 혹은 세로로 바꿔가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파인더 속에서 다채로운 꽃들을 배경으로 시시각각 표정과 자세를 바꾸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찍은 사진들을 빠른 손놀림으로 넘겨보며 확인했다.

“우이씨, 너무 밝게 나왔잖아.” 그녀는 즉시 사진 편집 앱을 실행시키고, 능숙하고 재빠른 솜씨로 밝기와 색감, 대비 등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히 사진 보정술의 대가였다. 10초도 채 안 되어, 평범했던 사진은 마치 전문 포토그래퍼가 찍은 듯 그럴싸한 작품으로 탈바꿈했다. 그녀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자는 이제 완성된 작품을 자신의 SNS에 잽싸게 업로드했다. 캡션은 간결했다. ‘카페 Dionysus 근처에서 발견한 나만의 비밀의 정원. #제주여행 #숨겨진명소 #꽃스타그램’

미자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봄날 분홍빛 철쭉이 온 오름을 뒤덮은 세상을 배경으로 마치 허수아비처럼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에서부터, 가을날 은빛 억새의 꽃송이가 하얗게 핀 언덕에 파묻혀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입술을 쭉 내민 모습까지, 그녀의 지나온 시간과 감정들이 담긴 총 2,798개의 사진들이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속에는 아주 가치 있고 아름다운 순간들과 더불어, 때로는 전혀 소용없고 무의미해 보이는 찰나들이 혼재했다. 마치 삶 그 자체처럼.

나는 그녀 곁에 서서, 따스한 봄날 오후의 공기 속에 녹아든 다채로운 꽃향기에 취해 잠시 눈을 감았다. 모든 사유는 이 낙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잠시 멈추었고, 마치 조각칼로 깎아 하늘에 박아놓은 듯 선명한 흰 구름 조각들은 태평성대를 속삭이는 듯했다. 어느새 그녀와 깍지 끼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카페 디오니소스는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벽면에는 피카소나 브라크의 작품을 모방한 듯한 큐비즘 스타일의 복제화들이 각 벽마다 적어도 두 점 이상씩 걸려 있었다. 그리고 메뉴판의 모든 메뉴는 놀랄 만큼 비쌌다. 바닥에는 마치 의도적으로 깨뜨려 흩뿌려 놓은 듯, 조그마한 사금파리 조각들이 흐드러지게 널려 있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짝이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흡연석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는 창가, 오후의 햇빛이 가느다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자리에 앉았다. 나의 맞은편으로는 작은 인공 연못인지 호수인지 모를 녹색 수면이 내다보였다. 연못가에는 월계수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잎사귀들이 실내조명을 받아 탐스럽게 익은 듯 반짝였다.

“어? 여기 커피 향, 꽤 괜찮은데?” 미자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 내게 묻는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모호한 말투였다.

“예전에 뉴욕에서 딱 한 번 맡아본 그런 향이야.” 역시 혼잣말이었다. 여자는 뉴욕에서 딱 한 달을 살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에서 추방당하기 직전, 지난 3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금씩 저축했던 돈 전부를 그 한 달 동안의 뉴욕 생활에 쏟아붓고 돌아왔다고 했다. 물론 큰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국 도시에서 한 달 동안 그럭저럭 풍족하다고 느낄 만큼 살 수 있는 정도의 돈. 적당한 쇼핑과 괜찮은 숙소, 그리고 매일 마시는 여러 잔의 커피값 정도였을 것이다.

그녀의 지난했던 미국에서의 3년이라는 시간은, 오롯이 그 한 달간의 뉴욕 경험으로 압축되어 기억되는 듯했다. 우리의 세 번째 데이트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녀는 뉴욕에서 보낸 그 한 달이 마치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고 상세하게 묘사하곤 했다. 그 외의 모든 미국에서의 기억들은 마치 뿌연 안갯속에 가려져 있거나 깊은 그림자 속에 봉인된 듯 어슴푸레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이민자로서의 고된 일상이 너무나 단조롭고 똑같아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이 없었던 걸까? 매일 반복되는 출근, 퇴근,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의 연속. 또다시 출근, 퇴근, 먹고 자고 배설하고… 그녀의 현재 한국에서의 일상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다. 식당 주방 보조로서의 고된 노동. 일주일에 단 하루 주어지는, 오늘 같은 휴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일주일은 결국 이 하루, 오늘 같은 날로 응축되어 기억될 것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얇은 봄 코트의 무게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듯,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벗으려 했고, 나는 그와 동시에 주문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케이크도 한 조각 시켜줘!” 그녀가 덧붙였다. 그것이 그녀의 저녁 식사가 될 터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고약한 거식증의 잔재. 한때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며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다가 거식증에 걸렸고, 그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도 했다고 했다. 마치 소라 껍데기 속처럼 답답하고 폐쇄적인 병실에 갇혀, 정체 모를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종일 손바닥만 한 창밖 풍경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기도 했다고.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손톱만 한 빵 조각 하나로 하루를 버티던 시절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 보였다. 나는 그녀의 앙상하다 못해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을 볼 때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곤 했다. 그냥, 그랬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살 수 있다. 절망하였으므로.’ 아니, ‘나는 절망했으므로, 살아야만 한다’ 였던가? 기억은 희미했다. 나는 그녀의 최소한의 비타민 C 섭취라도 돕기 위해, 메뉴판에서 가장 신선해 보이는 샐러드를 하나 추가했다.

“천일홍의 꽃말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래.” 나는 그녀 앞에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하얀 커피 컵과 예쁘게 장식된 케이크 조각, 그리고 신선한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테이블 위 작은 화병에 꽂힌, 통통하고 짙은 보라색의 천일홍 꽃송이가 눈에 설었다. 벽걸이 액자 속에는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힘없이 팔랑이는 코스모스 그림이 애처롭게 걸려 있었다. 카페 안에는 <Cigarettes After Sex>의 <Apocalypse>가 나른하게 흘렀다. 지나치게 달콤하고 몽환적인 멜로디와 속삭이는 듯한 보컬. 베이스 기타의 낮은 강약에 따라 테이블과 의자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Got the music in you baby, / Tell me why / You’ve been locked in here forever & you just can’t say goodbye

미자는 어딘가 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특정 종교를 믿거나 하느님의 존재를 신봉하지 않으면서도, 나쁜 짓을 하면 언젠가 신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숫자 4나 13 같은 특정 숫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미신을 믿었고, 놀랍게도 가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그들의 두루뭉술하고 거짓된 예언을 진지하게 귀담아듣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모순적인 면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그런 점 때문에 그녀를 더 좋아했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거나, 사려 깊고, 점잖고, 완벽해 보이는 인간은 함께 있기에 어딘가 불편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인간적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 속에는 타인에 대한 따스한 연민과 공감 능력과 동시에, 약간의 비합리성, 불완전함, 그리고 단순함 같은 것들도 함께 깃들어 있기 마련이니까.

“너 정말 그런 꽃말 같은 거 믿어?” 나는 게시판 한구석에 붙어 있다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달싹거리는 메모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창밖 마을에는 복사꽃이 저녁노을처럼 붉게 퍼져 있었다. 여자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조심스럽게 입에 넣고 잠시 음미하듯 웅얼거렸다. 마치 전문 바리스타가 커피를 테이스팅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꿀꺽 삼키고 나서, 나를 뚫어질 듯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문득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 유지태가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순진한 질문일 것이다. 나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 라고.

“야, 근데 여기 커피 진짜 맛있다! 완전 내 스타일이야!” 여자는 갑자기 흥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는 정신없이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수많은 팔로워들을 위한 친절하고 신속한 정보 업데이트. 그녀는 벅찬 감동을 담아 마침표를 찍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삶은 축제와 같았다. 나는 그녀의 행복에 전염된 듯, 눈을 감고 솜털처럼 부드럽고 하얀 눈송이들이 이 하얀 카페 홀 안에 가득 내리는 상상을 했다.

그때,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 하자, 함께 있던 여자가 다급하게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나지막하지만 격앙된 실랑이가 벌어졌다. 남자는 결국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출입구를 향해 한달음에 걸어가 쿵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순간적으로 쏠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케이크도 완전 맛있는데? 너도 한 번 먹어봐.” 미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짙은 색 루주가 묻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살짝 밀어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로 몸을 기대왔다. 마치 내 턱 아래를 받치기라도 할 듯이 얼굴을 바싹 다가와서, 아주 은밀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다음 주에 파리 가는 비행기 예약할 거야.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파리? 그럼… 파리에서도 또 한 달 살기라도 할 셈이야?” 내 입에서 가시가 돋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엇에 씐 것처럼, 통제되지 않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말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어렵게 모았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파리에서 펑펑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뉴욕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내 말에 대답 대신, 조각난 샐러리 조각을 포크로 찍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들고 있는 꽃무늬 사기 포크가 유난히 예뻐 보였다.

“그럼… 네가 날 행복하게 해주든가.” 그녀가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만 휘몰아쳤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의 비루한 신세. 나는 너무나 미천했다. 감히 이 불안정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내 곁에 묶어 둘 능력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나는 그 냉혹한 사실을 이미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뼈저리게 깨달았었다. 일 년 사이에 무려 세 개의 회사를 전전하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이곳 제주도로 내려왔다. 음악이나 소설 따위는 그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본질적으로 게으르고 무능력했다. 주방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짙은 붉은색 벨벳 커튼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나는 진작에 깨달아 버렸다. 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 같은 가난하고 평범한 인간들이, 보통은 삶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그 허무한 진실을 말이다.

왜 나는 서울을 떠나 이곳 제주도로 도망치듯 내려왔는가? 왜 이곳을 세상의 ‘밖’ 어딘가로 여기고 있는가? 나의 의지는 너무나 미약했고, 그만큼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외부를 향한 불안한 탈출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곤 했다. 내가 물리적으로 어디에 머물든, 그 장소의 가치에 내 존재의 중심을 두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변방이었고, 내가 변방에 있다고 해서 그 변방이 외부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언제나 슬픔과 무기력,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뿌리 깊은 고정관념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상태로 이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결국에는… 서로를 옭아매게 될 거야. 우리가 계속 이렇게 만난다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회오리치던 불안감이 마침내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나는 자켓 안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담배를 더듬어 꺼냈다. 필터 끝이 지저분하게 너덜너덜해진 담배였다. 조심스럽게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자 니코틴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며 잠시나마 위안을 주는 듯했다. 여자의 하얀 앞니 사이에 가느다란 아스파라거스 조각이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뱉은 말에 대한 체념이, 어지간히 익어버린 과일처럼 물컹하게 다가왔다.

나는 체념한다. 고로 존재한다. I give up, therefore I am. 데카르트의 명제를 이렇게 비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겠지?” 놀랍게도 여자의 음성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살짝 들떠 있었다. 아담한 입술을 가진, 그러나 그 입술이 때로는 섬뜩할 정도로 아리따워 보이는 여인. 순간 이런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결국, 나는 언젠가 미자가 거쳐 간 수많은 과거의 흔적들 중 하나로, 그녀의 기억 속 아주 잠시 머물렀던 희미한 추억 속의 인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해맑은 얼굴을 한 젊은 여자 셋이 깔깔거리며 우리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저들처럼, 혹은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수많은 현대인들처럼, 야심이 끓어오르는 그런 인간이 되지 못한 걸까?

마젠타 입술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닌, 애정이나 열정을 가지고 매달렸던 모든 종류의 일에는, 어느 순간 반드시 그런 때가 찾아온다. 즉,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이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무의미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엄습하는 순간 말이다. 나의 하루는 대부분 길 위에서 흘러간다. 이 섬에서 가장 번화하고 젊음이 넘쳐나는 곳. 온갖 종류의 젊은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몰려드는, 채 500미터도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거리의 한 귀퉁이. 그곳에 앉아 나는 기타를 친다. 그들이 무심하게 던져놓고 가는 동전들은 내게는 일종의 감사 헌금과 같다. 오늘 하루를 더 살아낼 수 있게 해준 대가. 그 대가는 때로는 꽤 쏠쏠하기도 하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나는 종종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어차피 모든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 테니까.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낡은 기타가 만들어내는 서툴고 조악한 음색의 향연에 스스로 도취되어, 내 안의 복잡한 감정의 골짜기 속을 그저 정처 없이 헤매듯 취해 있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오줌 냄새와 곰팡내가 뒤섞여 찌든 지하 라이브 클럽의 텅 빈 홀이든,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관객 두어 명이 빈정거리는 무대 위든, 혹은 주말 오후의 한적한 공원 모퉁이 광장에서 코흘리개 어린이 몇몇을 앉혀놓고 서툰 코믹 연주를 하는 상황이든, 그 어떤 장소나 상황도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저 연주하는 행위 자체만이 중요할 뿐.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모든 예술 작품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다 사라지고 만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행위들, 열정, 사랑, 집착, 성취, 그 모든 것은 언젠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다.

아주 가끔, 감상에 젖거나 혹은 술에 취한 멍청한 젊은 녀석들이 내 기타 케이스 안에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툭 던져주고 가곤 한다. 전혀 정돈되지 않고, 때로는 추하고 불안정하며, 아름다운 멜로디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나의 연주를, 마치 무슨 심오한 예술 작품이라도 감상한 듯 경건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던져준 돈의 액수만큼의 충분한 보상을 즉각적으로 받는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감동이나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가 없이 기부하거나 베푼다는 그 선량한 마음. 설령 그가 평소에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거나 이기적인 악행을 일삼는 인간일지라도, 길거리 악사에게 돈을 툭 던져주는 그 행위를 하는 아주 짧은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선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자기 만족감은 항상 달콤하고 즐겁기 마련이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어둑해진 골목길 옆, 좁고 울퉁불퉁한 땅 위에 방치된 작은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 놀이터의 경계를 따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던 아름드리 마로니에 나무는 작년에 구청 직원들에 의해 베어지고 이제는 흉터 같은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가을이면 탐스럽게 열리던 마로니에 열매를 밤으로 착각하고 주워 먹었다가 응급실에 실려 가는 아이들이 해마다 발생하자, 민원이 빗발쳤고 결국 어느 날 구청 직원이 전기톱을 들고 와서 무참히 잘라버렸다. 이제 해마다 봄이면 세상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그 풍성하고 탐스러운 꽃들은, 오직 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나의 한 손에는 미자의 부드럽지만 차가운 오른손이 잡혀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저녁거리로 사 온 라면과 달걀 몇 알, 시든 파 한 단과 값싼 캔 햄이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통장의 잔액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때, 나는 비로소 온갖 종류의 어정쩡한 아이템 구매욕과 불필요한 소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냉담하고 초연해질 수 있었다. 꾀죄죄하고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제멋대로 삐쭉하게 들어선, 가파르고 낮은 언덕을 오르며, 나는 텅 빈 하늘에서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하루 중 가장 가늘어진 마지막 햇빛 줄기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며칠간 기승을 부리던 지독한 황사가 물러가자, 때 이른 더위가 성큼 찾아왔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헐떡거리는 목덜미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여러 번 빨아 색이 바래고 목이 늘어난 얇고 헐렁한 겨자색 반소매 셔츠에서는 퀴퀴한 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 진짜! 제발 우리 이 집 좀 옮기면 안 될까?” 미자가 숨을 헐떡거리며 불평했다. 그녀의 이마와 콧잔등에도 굵은 땀방울이 파다하게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없는 동안 이 방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을 리 만무했다. 낡고 때가 낀 하얀 커튼이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 들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힘없이 펄럭거렸고, 그 사이로 마지막 남은 오후의 빛줄기가 바닥 위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함께 춤추는 것은 미자가 내뿜는 가느다란 담배 연기였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서서, 아주 가느다란 종류의 담배 끝을 위태롭게 두 손가락으로 잡고, 폐 속 깊이 빨아들였던 연기를 창밖 어둠 속으로 길게 훅 내뿜었다. 몽글몽글한 회색 구름 같은 연기가 삐죽하게 열린 창틀에 부딪혀 흩어졌다. 늙고 지친 오후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에 그림자처럼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밤새 뒤척이며 구겨놓은 이불을 대충 개어 방구석 한쪽 끝으로 밀어놓자, 그녀는 창문을 닫았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힐끗 쳐다보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녁을 라면으로 때울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노란색 바탕에 작은 하트 무늬가 새겨진 그녀의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젖꼭지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여자는 책상 구석, 먼지 쌓인 채 놓여 있던 영양제 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짙은 갈색의 유리병을 들어 올려 남은 양을 확인하듯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세상에, 그동안 내가 사준 오메가3 하나도 안 먹었네. 어휴! 내가 이렇게 챙겨줘도 소용없다니까 정말!” 그것은 지난번 그녀가 내 건강을 염려하며 선물로 사다 준 것이었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병뚜껑을 열고, 길쭉하고 두툼한 연질 캡슐 두 개를 손가락으로 꺼내 물도 없이 꿀꺽 삼켰다. 그리고 옆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나라도 챙겨 먹어야지, 원.” 여자는 이상하게도 약을 좋아했다. 비타민이든 영양제든, 혹은 감기약이든, 무엇이든 눈에 보이면 일단 삼키고 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핸드백에서 작은 스프레이 형태의 구강청정제를 꺼내 입 속에 두어 번 칙칙 뿌리고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만 뜬 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아마도 그녀에게서 나는 듯한,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그 정체 모를 향기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다. 그녀의 체취와 담배 냄새, 그리고 방금 뿌린 구강청정제의 인공적인 향이 뒤섞인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에 취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나의 오랜 답변.

“내가 이 거지 같은 방구석 탈출해서 번듯한 원룸으로 옮길 때까지.”

“뭐라고?” 그녀가 되물었다.

“아, 내 말은… 라면 말이야. 그때까진 계속 라면 먹을 거라고.” 나는 얼버무렸다.

“너… 그사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그녀가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미자는 이렇게 가끔, 내가 가진 비루하고 미천한 현실과는 별개로, 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며 관심을 기울여 주곤 했다. 그것이 한 달 만에 만나는 것이든, 혹은 계절이 바뀐 뒤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든, 그녀는 내 얼굴에 시간과 고단함이 남겨놓은 흔적들 - 피곤함으로 충혈된 눈의 핏발, 잠자리에서 막 일어나 부스스하게 엉클어진 머리카락, 눈가에 말라붙은 눈곱, 코 밖으로 삐져나온 코털, 며칠 전 짰던 여드름의 붉은 자국, 햇볕에 까맣게 탄 이마, 살짝 비뚤어진 앞니 같은 것들 - 에 유독 시선을 집중하곤 했다.

“제발 영양가 있는 것도 좀 한 번씩 사 먹고 그래. 응?”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내 눈가에 붙은 눈곱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주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몸을 숙이자 입에서 희미하게 생선 비린내가 났다. 아마도 점심으로 생선 요리를 먹었을 것이다. 반면, 나의 후각은 이미 라면과 달걀, 파와 햄 냄새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져 있었다. 그 외의 모든 음식 냄새, 즉 내 입이 보내는 생존에 필요한 영양 공급 신호에 대해 나의 뇌는 시큰둥하게 ‘음식’이라는 건조한 정의를 내릴 뿐, 별다른 감흥이나 식욕을 느끼지 못하곤 했다.

나의 원초적인 본능은 지금, 그녀의 마젠타 빛깔 입술을 찾고 있었다. 커피 향, 그녀가 점심에 먹었을 고등어구이 냄새, 그녀의 침 냄새, 그리고 짙게 바른 루주 향이 뒤섞인 독특한 향기가, 그녀가 내쉬는 새큰거리는 콧바람을 타고 나를 아찔하게 수식했다. 미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나 자체로서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이빨이 딱 하고 부딪힐 정도로 감정이 격앙되었다. 미자는 달랐다. 그녀는 내가 처한 절망적인 경제적 상황이나, 나 자신조차 거의 개의치 않는 가난과 빈곤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을 써주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고통은, 대부분의 평범한 세상 사람들처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심함은 이미 전염병처럼 널리 퍼져 있었다. 사람들이 타인의 불행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찰나와도 같은 내면의 불편함을,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써 부풀리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축소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 자고 갈 거지?”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뛰듯이 일어나더니 자신의 핸드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짜잔!” 그녀는 양손에 아직 뜯지 않은 콘돔 상자 두 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싸구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알록달록한 포장 상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드디어… 마침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응! 마침내!” 그녀는 힘주어 대답했다.

이제 상황은 명백했다. 곧이어 우리는 끈적하고 원초적인 육체적 본능의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이성이 마비되고 오직 감각만이 남는 상태.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듯,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빠져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절정을 향한 격렬하고 본능적인 몸의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예로부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간의 죄스러움과 성스러움이 교차하는 신비로운 지점이라는 것이고, 오늘날 유별나게 개방되고 때로는 상업적으로 소비되기까지 하는 이 육체적 사랑이라는 행위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조차, 그 본질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숭고함의 확장을 통해 삶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단순하고도 필사적인 논리에 불과할 뿐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부끄러우며, 또 무엇을 그토록 숨겨야만 하는가? 모든 종류의 섹스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성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네 노래는… 너무 외설적이긴 한데, 이상하게 감정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그녀는 딱 한 번, 나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우리가 둘 다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독한 술을 마신 날이었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눈물 자국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지어내는 슬픔에 찬 고통스러운 표정마저도 내 눈에는 이상하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그런 밤이었다. 나는 마치 기타 줄을 끊어버릴 듯이 격렬하게 할퀴며 연주했고,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노래를 불렀다. 내 음악은 나 자신만큼이나 어중간하다. 깊이 있는 철학이나 메시지를 담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없이 가볍고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을 만큼 세련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극소수의 마니아를 열광시킬 만한 독창성이나 특별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사운드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갑자기 폭발하듯 치솟다가도 어느새 힘없이 꺼져 버리고, 음정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목소리는 답답하게 막혀 있다. 나는 항상 내가 녹음한 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치 전혀 다른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낯선 느낌을 받는다. 녹음된 나의 목소리는 실제보다 훨씬 더 소심하고 위축되어 들린다.

나는 그저 내 삶을, 그리고 내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 음악은 창작이라는 이름의 거창한 괴로움과 고통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나만의 소일거리, 혹은 용도에 더 적합하다.

“외설적이라는 표현, 그거 아주 멋있는데!” 그녀는 술기운에 내 등에 장난스럽게 찰싹 올라타며 깔깔거렸다. 그녀의 빈약한 가슴이 등에 와 닿았지만, 그 따스함과 부드러움은 물컹거리는 감촉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음번엔 홀딱 벗고 발가벗은 채로 연주해 볼까?”

“푸하하! 그건 외설이 아니라 그냥 공해지, 공해!” 미자는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 젖혔다. 여자의 솜털처럼 뽀송뽀송하고 꼬불꼬불한 체모가 내 살갗에 닿아 간지러웠다. 털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젖가슴. 두 사람의 숨 가쁜 신음과 살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열린 여자의 입. 나의 콧구멍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거친 호흡. 미끈하고 뜨거운 액체가 사타구니를 타고 허벅지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땀에 흠뻑 젖은 수건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쾌락은 끔찍할 정도로 짧다. 길고 지루한 불행과 권태 속에서, 아주 가끔, 단 한 순간 찾아오는 살아있음의 강렬한 기쁨. 그것은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더욱 허무하다. 헐떡거리며 내 가슴팍에 엎드린 미자의 배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지린내가 올라왔다.

“우리… 라면 끓여 먹자!”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 여자는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해 지나치게 초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래도 뭐라도 먹여야 했다. 특히 이런 격렬한 행위 후에는. 나는 섹스 후의 나른함으로 무겁게 늘어진 육체를 침대에서 질질 끌다시피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냄비에 찬물을 붓고, 수건으로 성기와 이마에 흐른 땀과 액체를 대충 닦아냈다. 낡은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리고 불을 켰다. 딱, 딱, 딱, 딱. 가스가 점화되는 소리. 검은 비닐봉지 밖으로 푸른 파 대가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봉지 안에서는 달걀 두 개가 서로 몸을 부딪치며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듯했다. 캔 햄의 따개를 힘겹게 따고, 냉장고 문을 열어 우리 집의 유일한 반찬인 신 김치를 꺼냈다. 냉장고 안은 텅 빈 흰색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차갑고 시큼한 쉰내가 풍겨 나왔다.

여자는 완성된 라면을 겨우 두 젓가락 뜨고는, 이내 숟가락으로 시뻘건 김칫국물만 홀짝거렸다. 나는 남은 라면 면발과 국물까지 남김없이 그릇을 들고 쭉 들이켰다.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파 조각 하나까지 손가락으로 긁어 입 안에 쏙 넣었다. 강렬했던 성욕과 방금 채워진 식욕.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본능, 수면욕뿐이었다. 나는 줄담배를 피워 물었고, 토렌트 사이트에서 미리 내려받아 놓은 영화 목록을 여자가 스크롤하며 골랐다.

“어휴, 이것 봐. 전부 깐느 영화제 출품작들뿐이네.” 미자는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지루하거나 비딱해 보이는 영화들은 전부 <깐느 영화>로 규정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그녀가 고른 것은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였다. 이미 세 번도 더 넘게 같이 본 영화였다. 여자는 이 영화의 느리고 감각적인 분위기와 아름다운 미장센, 특히 여주인공 장만옥이 입고 나오는 현란하고 우아한 치파오 의상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나 이거 조금만 보다 잘 거야. 너무 피곤해.” 여자는 핸드백에서 일회용 커피 캡슐 하나를 꺼내 머신에 집어넣고 작은 컵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낡은 커피 머신이 위잉- 하고 몸을 떠는 소리를 토해내더니, 이내 거품이 섞인 진한 갈색 액체를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쏟아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에스프레소였다. 여자는 다른 종류의 캡슐을 꺼내 이번에는 큰 컵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 그녀 자신을 위한 아메리카노였다.

재떨이에는 꽁초 세 개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시계는 밤 12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가 먼저 잠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는 애잔하고 관능적인 <Yumeji’s Theme>가 흐르고 있었다. 국수 통을 든 치파오 차림의 장만옥이 비좁은 골목길을 특유의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걷는 장면에서, 나는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여자의 숨소리를 듣고 그녀가 잠든 것을 깨달았다.

새벽녘, 창문을 때리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5시 10분이었다. 그녀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까지 이제 겨우 50분 남짓 남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오늘의 총 수면 시간. 언제나 그렇듯, 턱없이 부족한 잠이었다. 아침은 언제나 더럽게 짧게 느껴진다. 어쩌면 인생 전체가 찰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짙은 구름이 끼어 있는지 칠흑같이 새까만 하늘이었다. 나는 그녀를 깨우기가 정말 싫었다. 이대로 그냥 시간이 멈춰, 그녀와 함께 다시 깊은 잠 속으로 까무룩 빠져들고 싶었다. 그녀의 매끈한 이마를 덮은 앞머리 사이로, 수국 꽃잎처럼 붉게 곪아 오른 작은 여드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삶 곳곳에 숨겨진 아픔의 기슭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기슭들 사이를 위태롭게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그녀의 영혼. 때때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주체할 수 없는 불쌍함과 연민이 가슴속에서 벌컥벌컥 새어 나왔다. 여자는 미국에서 절도와 같은 몇 차례의 가벼운 경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결국 강제 추방을 당해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잠바를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마당을 비추는 희미한 전구 불빛 아래, 어둑한 마당 한가운데를 작은 게 한 마리가 옆으로 서성거리며 걷고 있었다. 나의 인기척에 놀란 듯, 녀석은 재빨리 마당 구석에 놓인 파란색 나일론 방수 덮개 밑으로 몸을 숨겼다. 동쪽 하늘 귀퉁이가 마치 상처에서 피가 번지듯,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섯 시를 넘기고 정확히 1분이 지난 즈음,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거세게 다잡고 잠든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세 번쯤 흔들었을까, 그녀가 부스스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단정하게 정면을 향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은 놀랄 만큼 창백했다. 여자는 이제 앞으로 꼬박 6일 동안, 이 맨얼굴로 지내게 될 것이다. 때가 누렇게 밴 하얀색 주방 유니폼과 연푸른색 앞치마, 그리고 머리카락을 완전히 감싸는 연녹색 두건을 쓰고, 뜨거운 주방과 시끄러운 홀, 그리고 더러운 화장실 사이를 오가며, 얼굴에는 늘 변함없는 미소를 띤 채 손님들을 맞이할 것이다.

오후 5시가 되면, 나는 어김없이 그녀가 일하는 식당으로 향할 것이다. 거친 파도 소리와 해풍을 맞으며 자라 구부정한 소나무들이 늘어선 좁은 해안도로를 굽이굽이 한참 동안 자전거를 타고 돌면 나타나는, 외벽을 온통 하얗게 치장한 아담한 레스토랑. 하루 중 가장 손님이 없어 한가한 그 시간. 나는 창가 구석진 식탁에 앉아 그녀가 홀에 나오기를 기다리며 눈으로 그녀를 찾고,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그녀의 일하는 모습을 훔쳐볼 것이다. 짙은 마젠타 빛깔 입술과 두꺼운 아이라인이 사라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양순하고, 야리야리하며, 고분고분해 보인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입가에는 늘 습관적인 미소가 떠나지 않고, 손님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 나에게 그녀는 이렇듯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따스하고, 까끌까끌하게 날이 서 있으면서도 더없이 부드러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다.

언젠가 미자와 낡은 모텔 방에서 사흘 밤낮을 내리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나의 은행 잔고가 마침내 정확히 0원으로 떨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우리는 사흘 동안 단 한 걸음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면 늘 똑같은 동네 중화 반점에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값싼 짜장면이나 짬뽕은 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비싼 요리 메뉴만 골라서 시켰다. 마파두부, 깐풍기, 라조기, 난젠완쯔, 고추잡채, 유산슬, 팔보채, 깐쇼새우, 심지어 전가복과 유린기, 양장피까지. 우리는 온갖 종류의 중국 요리들을 섭렵했다. 물론 음식의 대부분은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는 내가 거의 다 해치웠다. 그리고 그녀는 매번 요리와 함께 고량주 한 병을 잊지 않고 주문했다. 즉, 우리는 매 끼니마다 독한 고량주 한 병을 나눠 마셨던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사흘 동안 거의 내내 술에 취해 헤롱헤롱한 상태로 지냈다. 그런 흐릿한 정신 상태에서 우리는 어설프게 섹스를 했고, 그러다가 욕실 변기에 함께 토악질을 하기도 했으며, 서로에게 기댄 채 샤워기 아래 주저앉아 뜨거운 물을 맞기도 했다. 샤워기를 마이크 삼아 목이 터져라 함께 노래를 불렀고,くだらない TV 채널을 무엇을 볼지를 두고 유치하게 다투기도 하였으며, 버튼을 누르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싸구려 물침대 위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리며 함께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길고 짧았던 주말이, 아니 사흘이 지나갔다. 그것이 그녀와 내가 함께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사치였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나름의 가난하고 서글픈 신혼여행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후, 여자는 지금의 식당에 주방 보조로 일자리를 구했고, 나는 다시 무거운 기타를 메고 길거리로 나섰다.

아직 새벽 공기가 쌀쌀한 아침. 여자가 옷을 입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는 언제나 약간의 고역이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손바닥만 한 작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옆으로 돌려보며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여자는 내게 다가와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방문을 열었다. 어느새 동쪽 하늘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고, 방 안을 채우고 있던 흐릿한 그림자들이 마당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냥… 우리 여기서 계속 같이 살까?” 마당으로 나서려던 여자가 갑자기 휙 돌아서며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아리송했다. 그녀는 잠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대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약간 까무잡잡한 다갈색 뺨을 비스듬히 비추며 반짝였다.

“다음 주에는 약속 꼭 지켜! 좀 더 일찍 와! 나 진짜 이번에 유럽 가면 다시는 안 돌아올지도 몰라. 알았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동쪽에서 떠오른 붉은 아침 햇살이 자꾸만 눈을 성가시게 찔러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사라진 골목길 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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