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지금 티비에서 들리는 저 목소리를. 2년 넘게 나를 괴롭혀왔던 저 목소리를.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이 집에 이사 오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곗바늘이 오후 두 시를 향하자 어떤 남자의 발성 연습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점점 피치를 높여가며 고음으로 내달리는 목소리. 한참 동안 계속되던 발성 연습이 끝나자 대학 시절 남자 동기들이 노래방에서 불렀을 법한 락발라드가 시작되었다.
머리카락이 길고 높은음을 쥐어 짜내는 남자가수들의 노래. 가수가 부를 땐 괜찮지만 다른 이들이 부르면 듣는 이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바로 그런 노래 말이다. 노래를 듣고 있자니 잠시 엣 추억에 젖기도 했지만 역시나 귀가 따갑고 머리가 아팠다. 귀를 닫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낮잠을 청했다. 두 시부터 대략 다섯 시까지. 그 날이후로 이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도 있었지만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남자였다.
집에서 글을 쓰는 나는 매일 두시가 되는 게 두려웠다. 글을 쓰는 시간엔 음악을 듣지 않는다. 노래가 귀에 파고들면 생각이 저만치 달아나고 어느새 노래에 빨려 들어간다. 어떤 작가는 음악을 듣거나 어느 정도의 백색소음이 도움이 된다던데 나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무언가를 들으면 내 안의 목소리와 멜로디가 합쳐져 머릿속이 사물놀이처럼 시끄러웠다. 이런 상황을 나 스스로 의식하기 시작하자 두 시가 되면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의 발성연습과 노래는 계속되었다.
도대체 몇 살이나 된 남자일까. 몇 호에 사는 걸까. 이렇게 가까이 들리는 걸로 봐서는 아랫집이나 윗집, 또는 대각선 상에 사는 게 틀림없다. 궁금하다가도 화가 났다. 그렇다고 노래 부르는 집을 찾아가서 무턱대고 벨을 누르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매일 같은 노래를 연습하는 걸로 봐서는 분명 오디션이라도 있는 게 분명하다. 실용음악과라도 준비하는 중인가? 그러기엔 노래가 좀 오래되었는데. 실기곡을 바꾸는 건 어떨까. 얼굴도 모르는 그를 떠올리며 괜한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다. 고음이 막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리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너도 힘들구나. 나도 힘든데. 그래도 이렇게 매일 피아노를 치며 연습을 하다니, 넌 뭐가 돼도 될 거야. 그의 노래를 들으며 오히려 나태한 나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시끄러워 투덜대는 마음과 그를 향한 애처로운 마음이 어느새 내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부르는 레퍼토리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잔잔한 발라드 곡이 되어 그럭저럭 견딜만하게 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빌리조엘의 피아노맨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곡은 특히 비가 오는 날 듣기가 좋았다. 피아노 반주와 노래가 시작되면 나는 글을 쓰다가도 어김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렸고 제대로 된 가사를 보기 위해 유튜브를 열었다. 가끔 그의 노래를 들으면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노래에 스며들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노래를 그를 통해 듣게 되었다. 빌리조엘이 나와 전생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 이런 정도의 노래라면 견딜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년이란 시간은 사람을 서서히 바꿔 놓았다.
그는 누구일까. 목소리만으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20대 남자? 그러기엔 노래가 너무 옛날 노래다. 그렇다면 30대 남자? 만약 그렇다면 이 시간에 일도 안하고 매일 노래를 하는 건 무리다. 그것도 아니면 10대 후반의 고등학생? 혹시 가수가 꿈인 지망생인가? 관련 학과를 준비하하느라 시험곡을 정해서 주야장천 그 노래 하나만을 연습하는 중인 것인가.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마지막 10대 후반의 고등학생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래가 너무 옛날 노래다. 조금 더 임팩트 있는 노래였으면 좋을 텐데.
매일 계속되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글을 썼다. 여전히 글을 쓸 때 아무런 노래도 듣지 않았지만 그의 노래는 내가 말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노래는 그의 꿈이니까. 마치 내가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글을 쓸 테니 너는 노래를 불러라. 어느새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를 떠올릴 때면 묘한 동지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글이 안 풀리는 날, 같은 노래를 한 시간씩 듣고 있으면 내 머릿속으로 맹렬한 장어 한 마리가 들어와 꼭 어느 한 부분을 톡 건드려 흙탕물을 만들어 놓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면 이내 글을 쓰던 손이 멈춰버렸다.
그런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2년 넘게 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 것에 화가 났다.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갑자기 그를 향해 큰 소리를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가 있더라. 너에게 들릴만한 노래가. '너도 내 노래 좀 들어봐라' 하는 심정이 되어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아주 큰 소리로 불렀다. 소리를 질러서 그런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순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내 노래를 듣고 놀랬는지 그도 잠깐 노래를 멈추었다. 그도 내 노래를 듣은 게 분명했다. 이상한 쾌감이 밀려왔다. '너도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어느 들판에 나가 원 없이 소리 지른 느낌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시원한 외침말이다.
그날 나는 나의 존재를 그에게 비로소 알린 것이다. 너의 노래를 듣는 내가 있다. 그것도 너의 가까이에 내가 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나의 노래를 들려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 의기양양해하고 있는데 다음 날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시가 다 된 시각. 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빌리조엘의 피아노맨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제 내가 부른 헨델의 '울게 하소서'였다. 그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른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 아리아를 종종 불렀다. 나를 생각하며 부르는 것일까. 보고 부르는 것인지 이태리어로 된 가사까지도 완벽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가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하면 누가 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잠시 뒤 내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와 함께 이중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얼굴도 모른 채 이런 생활을 2년 넘게 계속해오고 있었다. 가끔은 그가 미친 듯이 궁금했지만 단 한 번도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는 2층에 살고 있다. 내 예상으로 그는 1층에 살고 있다. 그것도 내 방 바로 아래가 그의 방이다.(거의 99% 확신한다) 노래를 하다 말고 가끔은 담배를 피우는지 담배 연기가 내 방으로 스며든다. 그 냄새가 그의 노래처럼 내 방을 지나 거실까지 퍼져 나간다. 그의 목소리와 담배 연기는 어디서나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새 나에게 깊게 배어있다.
그런 그의 목소리를 방금 전 티비에서 들은 것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노래를 부를 시간이 아닌데도 아래층에서 노래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래층이 아니었다. 분명 티브이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곡명은 빌리조엘의 피아노맨.
"오늘 밤 드디어 1위 수상자가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회자와 처음 보는 그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분명 그였다) 그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일 연습을 할 때마다 제 노래를 들어주셨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층간소음으로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 한 번도 항의하지 않으시고 제 노래를 들어주신 그분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죄송했습니다!"
"하하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다시 한번 1위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그도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고 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2년 넘게 그랬듯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드디어 그가 바라는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어보니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택배를 시킨 적이 없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엔 이런 메모가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차 한잔 하실래요? 저 누군지 아시죠? 메모를 떼어내니 거기엔 빌리조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2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빌리조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