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중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한국에 가게 되면 도착 당일이나 바로 다음날 꼭 하는 일이 있다. 동네 목욕탕에 가서 세신사의 서비스를 받는 일이다. 이번에도 역시 도착 당일 저녁에 엄마와 함께 동네 여성 전용 사우나에 갔다. 엄마와 나란히 누워 세신 서비스를 받았다. 나의 세신을 담당하신 분은 60이 훨씬 넘으신 분이었는데 나의 때를 조금 밀어보시더니 "미국에서 와서 때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아주 잘 나오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더니 갑자기 필을 받으시는 듯 매우 경쾌한 흥으로 내 온몸의 때를 싹싹 밀어주셨다. 무려 두 번을 그렇게 밀어주시고 비누 마사지까지 해 주셨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딸을 위해 전신 세신에 오이마사지까지 추가한 엄마 덕분에 오이 마사지까지 받고 나오니 얼굴에 반짝반짝 광택이 났다. 내 몸의 아주 아주 바깥 일부만을 싹싹 닦아냈을 뿐인데 매우 상쾌하고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고 가을바람 막으려 코트까지 챙겨 입고 나오는데 아. 온몸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졌을까. 이것은 가을밤의 서늘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온몸의 피부를 뚫고 스며들어오는 그 으스스한 바람. 그것은 사라진 나의 때 때문이었다. 때가 없으니 어찌나 춥던지 다 밀어버린 때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도 없고 그때 본의 아니게 때를 그리워했다.
때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나는 어릴 적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엄마와 엄마 친구와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엄마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는지 엄마 친구가 나의 때 밀어주는 것을 담당하셨다. 다른 부분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그분이 때수건을 갖고 내 얼굴을 미셨고 그 이후에 볼에 전체적으로 아주 얇게 상처가 생기면서 한동안 볼을 매우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에게는 엄마 친구가 나의 얼굴을 밀어서 너무 아팠다고 투덜거렸고 그 후에는 단 한 번도 얼굴에 때수건을 쓴 적이 없다.
역행자의 저자 그 잘난 자청도 자신이 매우 게으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책에서도 많이 언급하였는데 나 역시 매우 게으른 까닭에 한 번도 나 자신의 때를 내가 밀어본 적이 없다. 특히나 다 자라고 나서는 목욕제품에 들어있는 케미컬에 대한 잡다한 지식 때문에 바디제품조차도 쓰는 것을 거부하고 물로만 샤워를 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내 전신의 때를 밀어본 것은 결혼을 하러 한국에 왔다가 엄마의 권유로 세신 서비스를 받았을 때였다. 아주머니는 아프지 않게 아주 노련한 솜씨로 나의 피부를 부드럽고 보송보송하게 만들어주셨다. 그때 세신의 위력을 처음으로 느낀 듯하다. 그 이후로는 한국에 올 때마다 세신을 받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세신을 받게 된 것이 엄마의 권유 덕분이었는데 엄마는 목욕을 매우 좋아하시고 세신 및 마사지를 무척 좋아하신다. 사실 엄마 엄마 하면서 30년을 넘게 불렀어도 내가 36살이 되어 첫 아이를 낳고 산바라지를 하러 미국에 오신 엄마를 보면서 '나의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 참으로 몰랐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엄마가 그토록 깔끔하고 완벽에 가까운 정리주의자인 것을 몰랐고 목욕을 할 때는 꼭 바디 샴푸를 쓰시는 분인 줄 몰랐다. 인공향료에서 나오는 호르몬계 교란 물질에 대한 지나친 편견에 빠져있었던 나는 바디샴푸는 쳐다도 보지 않았었는데 엄마는 우연히 구입해 드린 멜론과 오이향이 나는 바디샴푸를 써 보시고는 향이 정말로 좋다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엄마는 매일 아침 아기 침대의 침대보를 하나의 주름도 없이 가지런히 피시고 아기를 새로이 눕혀 주셨다. 신생아 속싸개를 싸는 것은 완벽 그 자체였다. 무지했던 나는 엄마에게 왜 아기에게 팔과 다리를 못 움직이게 꽁꽁 싸냐고 불평했지만 엄마의 속싸개로 부드럽지만 쌈박하게 싸인 아기는 오랫동안 곤하게 잘 잠을 잤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아빠 넥타이를 매어주셨을 때나 나의 한복 저고리 매듭을 매어 주실 때 또는 나의 스카프를 정리할 때의 그 손이 떠올랐다.
나의 엄마는 작가다. 오십이 넘은 늦깎이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대학교에서 강의도 여러 해 한 이유로 교수라고 직함으로 더 자주 불리셨지만 누가 나에게 나의 엄마의 하는 일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응, 우리 엄마는 작가야". "아 네, 저희 엄마는 작가랍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그 곱고 꼼꼼한 손으로 글을 쓰신다. 지금도 좋아하는 작가지만 한때는 깊이 전념했던 박완서 작가, 권남희 작가 등을 보면서 엄마에게 투덜대기도 했다. "엄마, 글을 자꾸 써야 작가지. 엄마 책은 언제 또 나와?" 하며 다작을 촉구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느긋이 "다작을 하는 작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단다. 나도 일 년에 한 두 편 정도는 꾸준히 발표하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엄마가 오늘 왼쪽 어금니 네 개를 발치하시고 그곳에 임플란트를 심는 시술을 받으셨다. 아빠의 넥타이를 매어주고 손녀의 속싸개를 싸던 그 꼼꼼한 손으로 왼쪽 턱을 잡고 계셨다. 시술 후 피가 잘 멈추지 않아 지혈을 위해 오랫동안 잡고 있어야 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하시고 눈을 살짝 감고 계셨다. 고등학생 때부터 치아가 좋지 않아 항상 치통으로 고생하셨다던 엄마는 장년기에 접어드시면서 치주염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다. 예전 같으면 치아를 거의 다 발치하고 틀니를 해야 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발전된 치과 기술 덕분에 임플란트로 외관 및 치아 기능을 회복할 수 있어 매우 감사한 상황이다.
엄마는 어릴 적 시골마을인 문경 광산 동네에 살았다가 고등학교 때 서울 고모댁에서 지내면서 학교를 다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난 나를 보며 엄마는 자기를 꼭 닮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이가 어렸을 때나 공부를 하며 자랄 때, 그리고 내 인생에 바빴던 대학교 때는 엄마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45세가 된 지금은 16살 고등학생이었던 엄마. 외할머니 품을 떠나 서울에 와서 지내면서 치통에 시달리며 작은 손으로 턱을 부여잡고 공부를 했던 엄마를 떠올린다. 항상 밝게 웃는 귀염상인 엄마의 모습에서는 치통에 시달리는 짜증 난 주름이 묻어난 얼굴은 없다. 나의 시어머니도 인정을 하셨든 엄마는 정말로 귀여운 분이다.
내 몸의 가장 바깥 부분의 때가 없어져도 이렇게 추운데 내 인생에 엄마가 없다면 나는 추워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의 엄마가 건강히 살아계심이 무척이나 감사한 새벽이다.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신 엄마가 잘 회복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