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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별 Mar 01. 2023

따뜻한 날에는 나를 더 아끼자.

나의 소중한 공간에서


 처음 이 집을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 넓은 창은 막힌 곳 없이 뻥 뚫려있었고, 동쪽으로 살짝 기운 남향의 거실은 아침에 뜨는 해가 들기 시작해 오후까지 밝았다. (사실 남서향을 애타게 찾았지만 결국 타협했다.) 이사 초반엔 눈이 일찍 떠져서 아침 해와 함께 모닝커피도 즐겼다. 아담한 주방과 거실, 작은 방이 두 개, 좁은 베란다가 하나. 온통 취향의 것들로 채운 오롯이 내가 지내는 집.


 사실 2년의 전세 계약이 끝날 때쯤에는 결혼을 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는데, 재계약을 앞두고도 여전히 그럴 계획이 없다. 최근에는 대출 이자도 많이 오르고 주변 시세도 낮아져 집주인에게 전세금 하향 조절을 요청하고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이 집에서 2년을 더 지내기로 했다.


 이 집의 주인아저씨는 처음 봤을 때부터 별로 나와 잘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잘 협조해 주었고, 지난 2년간 아무런 트러블 없이, 무소식이 희소식처럼 지냈다. 게다가 전세금을 낮춰달라는 다소 무리한 요청에도 응해주니 새로 계약서를 쓰러 만나는 길에는 조금 더 살갑게 인사를 나눌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집주인은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대화를 정리하자면.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뭔지. 그게 돈이 되는지.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서 공무원 해라.

자기 카메라 자랑하고 내 카메라 무시하기.

결혼은 왜 아직 안 했는지.

교회를 다니는지. + 왜 다녀야 하는지.

나를 위한 기도. (함께 한 마디씩 읊기)


 은행 홈페이지를 켜고 환불액 입금을 준비하는 집주인 옆에서 나는 을의 자세로 꼼짝없이 앉아 듣고 있었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아온 사람이라 그 자부심이 엄청났다. 이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려니. 나오는 길에는 성경책 한 권도 받았다. 모든 종교인을 존중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혹스럽다. 좋게 생각하자면 모두 나 잘 되라는 내용의 기도였으니 그건 감사히 받겠다. 내 인생 마치 시트콤 같네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문제는 집에 돌아온 이후에 발생했다.

 이걸 시발점으로.


 늦은 밤, 가만히 거실에 앉아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곱씹을수록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거지?’로 시작해 ‘내가 오늘 무슨 봉변을 당한 거지?’까지 발전했다. 왜 타인에게 내 직업을 돈도 못 버는 일이라 무시하고 그런 말을 듣는 중에도 아무 대꾸 못하고 돌아온 걸까. 왜 나는 그 자리에서 그렇지 않다는 말 한마디를 못한 걸까. 내가 얼마나 착실하게 잘 해내고 있는지 말했어야 했다. 등신. 답답이. 한번 울적한 생각을 시작하니 결국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진다. 얼마 전부터 벌이가 썩 좋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인 건 맞기 때문에 더 기분이 상한다. 내 인생 진짜 좀 잘못된 건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까지 넘치자 눈물이 펑펑 나기 시작했다. 결국 베개맡에 눈물범벅을 하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돌아보니 어지간히 이상한 밤이었다.


 겨울은 언제나 무겁다. 마음을 잔뜩 찌푸리고 지냈는데 그마저도 수년 반복하니 익숙해져서 금세 빠져나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르는 틈에 속이 얼마나 지치고 풀이 죽었는지, 간밤에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에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진정시키는 대신 서러운 건 다 풀자고 그냥 실컷 울기로 했다. 덕분에 아침은 개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웃음이 나서 피식피식 웃었다. 이렇게 시원하게 운 일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긴 겨울을 나느라 올해도 고생했어. 자기 자신을 높게 치켜세우고 남을 폄하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소모하지 말자. 따뜻한 날에는 나를 더 아끼자. 봄에는 더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릴 거야. 그리고 앞으로 2년 더, 나의 소중한 집에서 행복하자. 


 마침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3월. 그리고 새로운 계절도 시작되었다. 이른 봄의 첫날. 겨울과 헤어지기에 적당히 어울리는 엔딩이다. 


이사 첫날, 정리할게 산더미지만 새로 들어온 가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처음으로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는 일이 즐거워졌다.
지금이랑은 아주 많이 달라진, 첫 작은방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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