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소중한 주말 지켜내는법

by 린생

금요일 3시 게다가 내일은 내 35번째 생일이다.


이번주 산더미 같던 일들을 오늘을 위해 다 말끔히 해치우고 이제 조금 설레보려던 찰나

회사 직통전화기도 아닌 내 개인 핸드폰으로 내가 전에 책자 작업을 해줬던 업체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큰일났다는 말과 함께 다급한 소식을 내게 전했다.

우리회사에서 디자인까지만 해주고 다른 회사로 넘어갔던 그 책이 왜 다시 나를 다급하게 찾아와야만 했을까


지난주 금요일 퇴근무렵 팀장님께서 내게 책자 원본파일을 다른회사 메일로 보내주라는 지시가 있었다.

책자 수정을 해야하는데 그 회사에서 직접 수정을 한다고 파일을 요청했다고 했다.


뭔가 내가 피땀흘려 만든 작업물을 손쉽게 내어주는것 같아서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 일이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구나 후련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큰일났다는 그 일은 책자파일이 그 회사에서 열었을때 오류가 뜬다는 것이었고

해당 책자 수정이 오지게 들어왔는데 그 수정을 주말까지 해서 월요일에 제출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보고 알바로 그 수정일을 해달라고 했다.

돈은 그 회사에서 준다고 잔뜩 부르라고 했다.


순간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감히 내 주말을 건드리겠다는 건가?

그래서 알바비 얼마줄건데? 라는 생각


상황파악을 좀 해보려고 수정요청 파일을 열어보았다.

한글파일로 수정이 왔는데 스크롤을 내리니 스크롤 바가 점점 작아지더니

100페이지가 넘었다.


대대적인 대공사가 예견되었고 설상가상 내가 사용한 폰트도 무료폰트로 바꿔달라고 했다.


그 말은 한페이지 한페이지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전부 뜯어고쳐야 한다는 말이었고

내일이 돈벌고 싶어 죽겠는 약속하나 없는 주말이라고 해도

물리적으로 주말 내내 작업하면 겨우 될까 말까한 일이었다.


우선 알바는 하다 걸리면 괜히 푼돈벌다 회사에서 미운털 박힐것 같아 포기했고

나좀 구해달라고 팀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팀장님 언제오세요..? (울먹)


해당일을 설명드렸더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못한다고 하라고 했다.


원하던 대답이었다.

혹여나 자기일 아니라고 해주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너무나 다행이었다.


담당자에게 내부적으로 상의한 결과

연말이라 우리 회사도 일이 많이 몰려있고

우리 회사에서는 디자인까지 해주고 나머지는 다른 회사에서 작업하기로 한거라서

촉박한 일정으로 해줄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달했다.


내 거절을 계속해서 거절하던 그 담당자는 알겠다고 하더니

잠시후 전화를 해서는 사장님을 바꿔달라고 했다.


사장님을 왜 찾으시냐고 하니까 무튼 이 일 관련 제일 높은사람 바꿔달라 했다.


팀장님께 팀장님 번호 알려줘도 되냐고 물었고

그러라셨다.

내가 절대 못한다고 절대 된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알겠다셨다.


두세차례 팀장님께 전화해서 팀장님의 거절을 거절하는 통화소리가 들리더니

팀장님에게 더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뭐 다른거 물어보러 가는척 하면서 팀장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뭔가 이긴거 같은 마음이 의기양양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니 내 개인 전화로 그 담당자의 문자가 왔다.


진짜 개인적으로 해주면 안되겠다는 문자에

착하게 거절하는 말을 썼다 지웠다 하다가

단호하게 답장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개인 일정이 있어서요

존중 부탁드립니다

평일 업무시간에 요청해주세요


굉장히 MZ스럽고 평소 해본적 없는 말투였지만

이만하면 내 거절을 거절하지 않을만한 답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담당자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고

막판에 그 거래처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팀장님께 전화하는것 같긴 했는데

끝까지 거절하시는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감동이었다.)


무사히 칼퇴를 하고 집에 돌아올수 있었지만

마음은 무사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작업한 책인데 내가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다른 사람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했다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화도 났다.

애초에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면서 거절을 수용하지 않는것에 기분이 나빴고

회사 위계로 나를 어떻게든 일을 시켜려 한것도 괘씸했다.


그치만 내 안에 가장 간절하게 들었던 생각은

이 일로 더이상 내 주말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바램이었다.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무언가를 할수 없는 상태로 거실 쇼파에 누웠지만


무기력하게 유튜브만 보다 저녁을 버리고 싶지 않았고

귀찮음으로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싶지도 않았다.


무기력한 나에게 우선 밥을 먹이기로 했다.


국과 밥을 따뜻하게 데웠다.

솔직히 배달시켜 먹고싶었는데 생각보다 국이 맛있었다.


밥을 든든하게 먹고나니 몸을 일으켜보고 싶었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비웠다.

마음이 많이 개운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기까지 왔다.


오늘은 속상함보다는 대견한 마음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이제 내가 거절을 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구나.

이제 내가 나를 보살피는 법을 알아가고 있구나.


그리고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다.

나를 지켜주신 팀장님

내게 괜찮냐고 물어봐준 회사언니

그리고 퇴근후 문득 전화를 걸어준 친구까지


주말을 무사히 사수할수 있어서 다행이다.

감사한 주말을 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