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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잔잔함

by 고스란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늘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를 권한다. 기회가 되면 미술 전시회나 연주회를 찾아서 최고의 예술가가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며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시간도 가지면 좋다. 혼자서 산행을 하며 자신을 만나는 훈련도 해야 된다. 고독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벗이다. 마흔부터 어느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잔잔함을 스스로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질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 유노북스, p.127




오늘도 절의 정진방과 같은 나만의 비밀서재에 있다. 책으로 둘러싸이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책 몇 권에 좋아하는 음료나 간식거리를 들고 가면 글쓰기에 딱 맞춤인 공간이다.

잠시 내가 멈추니 '한 권의 책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시간, 가을에 듣기 좋은 피아노 연주곡'의 피아노 소리, 에어컨 소리, 잠든 강아지의 콧소리가 어우러지듯 잔잔하게 들린다.

그 위에 연주하듯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만 불규칙하고 투박하다.


'내가 무슨 철학책을' 하며 여기저기 올라온 추천 도서 목록을 보고서도 외면했던 쇼펜하우어 책을 이제 읽으면서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한 밑줄에 깜짝 놀란다.

이 정도면 밑줄의 의미가 별로 없을 지경이다.

독서 모임 책이라 일주일에 한 '장'씩 읽고 있다. 일주일 중 하루 만에 다 읽는 건 아니지만 글을 써서 공유하기로 한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읽게 된다.

오늘은 벌써 일요일, 이미 다 읽고 글을 썼어야 하지만 다른 글을 쓸 것이 있어 조금 미뤘다.


읽을 양이 많지 않지만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하는 글귀로 한 번에 읽어내지 않았다.

수많은 밑줄 친 글 중 나의 요즘과 많이 닮아 있는 글을 발견해 반가운 마음에 글을 쓴다.






이번 여름 7월 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매주 금요일,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정기적으로 만나는 공부모임을 제외하곤 워크숍 하나, 시댁 방문, 친정 가족과의 식사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한 명과 두 번의 만남이 전부다.

써놓고 보니 마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거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마음 불편할 일은 없다.

만나면 반갑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즐겁다.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하게 누린다.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주로 낮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근황과 관심거리를 나눈다.

자주 만나는 게 아니라서 말할 거리는 다양하고 듣는 것마다 새롭다. 부정적인 대화가 오갈 일이 없다.

그러고 보면 가까이서 자주 만나야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함께 나의 생각이나 마음까지 나눌 수 있다.

그 시시콜콜함 속에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 부정적인 이야기가 양념처럼 들어간다.

너무 뜸하게 만나면 결과만 말할 수 있고 그 과정과 내막이나 감정의 변화 같은 건 생략된다. 말할 시간도 없고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만큼 만남의 빈도가 정해지는 듯하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먼 곳으로 갔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아직은 연결되어 있다. 먼저 연락하는 편은 아니지만 귀찮거나 불편함으로 그 연결을 끊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일었다. 오랜만이고 어색하다고 한 번 머뭇거리는 순간 그다음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연결은 더 희미해져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떠오르는 몇몇이 있다. 8월이 가기 전에 꼭 안부문자라도 보내야겠다. 대답이 없더라도 괜찮다. 내가 놓친 게 아니면 된다. 후회는 고스란히 내 몫이기에.




오랜만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 배경음악을 틀어 놓았다.

"엄마는 왜 음악을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하긴 요즘엔 음악 들을 시간에 다른 걸 들으니까 그렇지."

하루도 빠짐없이 노래를 부르는 아들의 입장에선 메마른 영혼이자 이해 못 할 부분일 수 있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할 땐 연주곡이나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틀어놓고 듣기도 했다.

언제부터 내가 음악을 끄기 시작한 걸까?

아마 유튜브를 보기 시작하고서부터인 거 같다. 남편 표현으로 볼 게 없다는 내 목록에는 온통 강연이나 마인드셋, 책과 관련된 것으로 꽉 차 있다. 한참을 켜 놓을 수 있는 운전 중이나, 집안일이나 산책할 때조차 그런 것을 들으니 음악을 틀어놓을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기만 하고 여유 없는 삶을 사나?

그런 것도 아니다. 책을 읽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때론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 모두 나의 여가 활동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작품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고뇌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낀다." - p.115


그럼에도 미술이나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은, 혹은 못한 부분은 인정한다.

잘 몰라서 재미가 없을 수도 있고 관심이 없으니 배우려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고뇌가 없어서 그런가? 마음공부를 한 이후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평온하게 산지 좀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여름에는 세 가지 경험을 통해 미술과 음악 모두 관심이 생겼다.


불안을 주제로 미술 수업을 듣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할 기회가 생겼다.

백지 공포에 가까운 마음에서 뭔가가 살짝 일어났다. 나만의 채색도구함이 생겼고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에 격려도 받으니 앞으로 글이 아닌 방법으로도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이라 하기엔 좀 더 묵직한 느낌을 주는 대중예술가들이 종국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던 중에 친한 친구 덕에 <미셀 들라크루아: 영원히, 화가> 전시를 봤다.

유난히 하늘을 좋아하는 내가 감탄하며 찍어둔 사진을 언젠가 내 손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던 파리를 애정으로 바라보며 아흔이 넘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는 다양한 하늘의 모습과 행복으로 가득한 일상이 담겨 있었다. 처음으로 사야 할 거 같아서가 아니라 사고 싶어서 작품에세이를 사 들고 나왔다.

구름 사진을 찍어 올리는 덕후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꾸준히 뭘 하지 않지만 거의 빠짐없이 하늘을 보며 감탄하고 행복을 느끼는 나도 언젠가 하늘, 구름을 표현하게 될 거라는 걸 막연하지만 알 수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꼭 그날이 올 거라는 확신이 든다.


'클래식으로 물드는 황홀한 6일간의 여정, 2025 예술의 전당 국제음악제가 한국해비타트 정기후원자님을 위한 특별 프로모션을 안내드립니다."

평소 같았으면 광고라고 여기고 무심하게 읽음 처리했을 텐데 해비타트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자세히 읽었다.

처음으로 마라톤을 한 날 너무 기뻐, 나 혼자 기쁘게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해비타트 기부를 시작했다.

이유가 좀 웃긴 거 같지만 복을 나 혼자 움켜쥐면 독이 되고 나눠야 비로소 온전하게 남는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에게 온 좋은 기회라 여기고 자세히 알아보았다. 선뜻 예매할 가격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왠지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챗GPT에게 그 공연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열과 번호를 대략 알려주며 이유를 그럴듯하게 말해준다. 덕분에 고민 없이 자리를 선택했다.

혼자서 평일 저녁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왔다. 이번 음악제 첫날 초청 공연으로 네덜란드 출신 로렌스 르네스가 지휘자로 나온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곡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듣고 있자니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지휘자의 몸짓과 연주자의 눈빛, 다양한 악기의 멜로디에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음악의 폭포 앞에 선 듯 온몸에 전해져 오는 전율로 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미술과 음악 문외한이지만 그냥 그대로 좋았다. 알고 보고 들으면 더 좋았겠지만 자연 풍경을 보듯 그렇게 작품을 만나니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어졌다.




이제 남은 건 혼자만의 산행인가.

산은 보는 것만 좋아한다. 꼭 높을 필요도 없고 그저 내 앞에 푸르름으로, 알록달록하게, 때론 눈부시게 하얀빛으로 존재하면 된다. 내 두 다리로 올라 높은 곳에서 펼쳐지는 시공간을 느껴본다면 내가 모르는 세상이 보일 수도 있겠다.

산행은 아니지만 바다로 향하는 산책은 자주 한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간에 강아지와 둘이 걷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까지 오롯이 걷다 보면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다. 물론 눈앞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이 나를 유혹하고 매일 모양을 바꾸는 달이 내 눈길을 빼앗지만 직선으로 펼쳐진 길을 수십 분 걷다 보면 온갖 리허설을 하고 상상을 펼친다. 온전하게 나를 만나는 시간이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시간이다.

좀 더 시원해지면 집 앞의 송산에 올라봐야겠다. 구불거리는 오르막과 내리막 길을 걸을 때는 어떤 생각이 나는지 높은 곳에서 하늘과 바다를 보며 어떤 상상을 하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바다가 보이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집 앞에 있는 호사를 누려봐야겠다.


고독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벗이라고 했다.

요즘 자주 나의 벗을 만난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좀 더 친해지고 싶다.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잔잔한 행복을 실컷 만끽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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