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와인과 스테이크, 그리고 은서

100일간의 무일푼 세계일주

by JAKE

2024년 12월 31일

세 번째 기록


내가 저번에 은서에 관해 일기에 썼던 것 같은데, 힌 기억하니?

은서는 내 오랜 친구인데 현재 사기업 볼리비아 지사에서 일하고 있어.


이 친구 덕분에 볼리비아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세계일주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던 거야.

나는 리마에 도착하고, 씻고 잠깐 잔 다음 12시까지 은서를 만나러 갔어.

은서는 원래 볼리비아에 있어야 하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휴가를 내고 일정을 맞춰 리마에 와 있거든.


내 숙소는 조그마한 아파트 3층에 위치해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항상 로비에는 예쁜 카운터 누나가 있어. 그 누나가 페루에 온 걸 환영한다며 페루 동전을 주셨어.

우리나라 동전같은 은색인데, 조금 더 가볍고 무광이라고 해야하나?

어쩜 이렇게 동전 하나에도 신기하고 흥분될 수 있지? 나는 내가 해외여행을 좋아할지 상상도 못 했는데.


아무튼, 우버를 부르자 차가 아파트 앞까지 와서 카운터 누나랑 헤어졌어.

근데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 우버를 타고 3분도 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경찰이 우릴 멈춰세운 거야.

아직 내 숙소에서 3~5 블록 떨어진 골목이라 도로변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나타난 경찰차인지.

난 시작부터 페루의 감옥에 갈까봐 너무 너무 무서웠어.

근데 경찰관은 우버 기사에게만 무슨 말을 계속 이어갔고, 우버 기사는 괜찮으니까 나는 내리라고 해서 내렸어. 언어가 통하질 않으니 도통 상황 이해를 못 하겠더라구.


그래도 나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다행이야. 하지만 단지 10분 거리의 해변가에 가는 데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다니.. 해외 살이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


지금 내가 일기를 쓰고 있는 이 미라 플로레스 해변은 리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지.

어때 기가 막히지?


나는 이곳에서 은서를 만났어. 2년 만에 만나는데.. 아니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는데

어떻게 이렇게 낯설지 않을 수가 있지??


아무래도 우리는 진짜 베프인가봐. 은서를 지구 반대편에서 보지만 마치 대학교 자취방 앞에서 보는 것 같아.

그래도 우리는 서로 끌어안았어. 은서는 계속 스페인어로 '페루에 온 걸 환영한다'고 했어.

은서는 볼리비아에서 근무하지만 페루에도 자주 놀러와서 이곳을 잘 안다고 했거든.


우리는 포옹을 네 번이나 한 뒤, 해변의 고급진 레스토랑 아무곳에 들어가 스테이크를 먹었어.

미라 플로레스 해변의 절벽에 위치한 이 쇼핑센터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은 정말 최고였어.

물론 내가 들어간 레스토랑은 최고급은 아니라서 해변이 바로 보이진 않았지만, 와인과 스테이크 그리고 은서

이 셋의 조합이면 나는 충분히 황홀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리는 고기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고기를 먹으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은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얉은 동그라미 안경은 어디갔는지 뿔테 안경을 끼고 있더라고.

물어보니 볼리비아에서 술취해서 잃어버려서 현지의 촌티나는 안경을 아무거나 사서 끼고 있다고 하더라고.


어쩐지 은서는 벌써 볼리비아에 완벽히 적응한 여전사 같았어.

뭐랄까 안경 때문만은 아니고, 피부도 조금 거칠어지고, 웨이터에게 메뉴 주문하는데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하는 모습 때문일까? 낯설면서도 듬직한 그런 느낌이었어.


은서는 내가 직장을 그만둔 얘기부터 시작해서 본론으로 들어가 방송 얘기를 해줬어.

볼리비아의 유명한 방송국이고, 이번에 한국인 참가자가 꼭 필요하다고.

사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걸 물었어. 볼리비아에도 너같은 한국인들이 많지 않냐고.


은서 말로는 PD가 여행 경험이 없어서 정말 온갖 고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고,

최소 세 달은 직업없이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

그게 나였던 거지, 거기에 은서의 인맥(?)까지.


우리는 이야기 하느라 스테이크 맛도 제대로 못 느낄 정도로 2년 간의 이야기를 모두 풀어냈단다.

힌, 너랑 다시 만난다면 같은 느낌일 거야. 분명 너도 이해할 거야, 이게 어떤 기분일지.


아,

은서는 방송에 출연하는 걸 축하해주면서도 자신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할 것 같아 미안해했어.

100일 동안 출발할 때 받는 지급금 빼고는 내가 자급자족 해서 세계일주를 마치는 컨셉인데,

자본주의 시대에 그걸 해내려면 내 능력에 달렸다고 말해주더라고.


나는 세계일주 달성을 하지 못 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만큼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어.

어차피 내가 홍보용 한국인으로 섭외됐으니, 꼭 1등으로 세계일주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필요했던 털 복실복실한 점퍼도 하나 산 후

노을이 지는 리마의 파도를 바라봤어.


이제 내일부터 정말 세계일주가 시작돼.

물론 방송 촬영 때문에 실질적인 시작은 1월 2일부터겠지만,

힌 아무튼 내 모험을 응원해줘.


무엇이 됐든,

나는 잘 할 자신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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