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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의 추억

by 희야

외출을 하기 위해 봄부터 나의 계절을 함께 해온 청바지를 입었다. 비 오는 스페인의 거리에서 나의 체온을 데워주고, 가을의 스산함이 스미는 오늘도 자연스레 손길이 다. 지난 4월 말 경에 스페인을 다녀왔다. 여행사에서 우리나라 날씨보다 덥다고 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툼한 청바지 두 벌과 얇은 옷들만 싸들고 떠났다. 하지만 여행사의 예상과 달리 덥기는커녕 계속 비가 오고 추웠다. 오랜만에 여행 간다고 큰맘 먹고 사들고 간 얇은 바지들은 꺼내지도 못하고 거의 청바지만 입고 다녔다.


돌아보니 여행의 길 위에서, 나의 시간과 풍경 속에 남겨진 사진 속에서 늘 함께 했던 청바지다. 내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한복판을 휩쓸고 다니며 자유롭게 웃을 수 있도록 내 몸을 지켜줬던 청바지. 문득 청바지를 처음 입었던 날이 떠오른다. 옷이 귀하던 시절, 작아져서 못 입는 오빠의 낡은 청바지를 입었다. 5남매나 되는 자식들에게 계절 따라 옷을 사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물려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디 감히 계집애가 장손의 앞길을 막느냐며 당장 벗으라고 하셨다. 여자아이가 입으면 부정을 타서 오빠가 출세를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빠보다 공부를 더 잘해서도 안되고, 겨우 두 살 차이지만 오빠가 하는 말이라면 이유불문 복종하고, 심지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빠 밥까지 차려줬던 기억이 난다. 청바지뿐만 아니라 여자는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고, 지아비를 하늘같이 대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말씀하시곤 했던 할머니.


나는 성인이 되어서 여자는 집에서도 긴치마를 입고 다소곳해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씀대로 바지를 입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등산을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때만 해도 등산복이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청계천에서 처음으로 질기고 튼튼한 청바지를 샀다. 평소에 출퇴근복으로 무릎기장의 치마만 입던 나였기에 매우 어색했지만, 그 청바지를 입고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설악산 대청봉을 올랐다. 20대 초반의 연약한 나였기에 누구도 그 험한 산을 올라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편한 청바지 덕분인지 거침없이 오르며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이야 다양한 등산복들이 나와 등산전용 바지를 입지만, 그때부터 나의 가장 편안한 옷이 된 청바지는 늘 여행가방의 한자리를 채우고, 외출하는 날이면 새우깡도 아닌데 손이 먼저 간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이기에 스페인에서도 그랬다. 얇은 겉옷을 겹겹이 껴입고 청바지로 버티며 스페인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더구나 청바지 입은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기라도 하는 날이면 더 우쭐하여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짓곤 한다.


봄부터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모든 계절을 함께 하며 내 인생의 이야기들을 간직해 온 청바지. 오빠는 할머니의 바람대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사업에 성공하여 형제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든든한 장손이 되었다. 역시 고비마다 할머니의 그 말씀을 떠올리며 남편을 이해하고 존중하려 노력한 덕분인지 별 탈 없이 잘 살아왔다. 오늘도 청바지를 입고 그날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어떤 이야기들을 만나게 될지 설렘으로 가득 차 오르는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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