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아름다운 계절, 그 가을에 나는 김치 담그기에 미쳤었다. 3 주일 내 내 주말을 전후하여 김치를 담갔으니 어찌 미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 여기서 말하는 '미쳤다'라는 것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지나치게 심하거나 열중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우리 집은 가을이 오면 연례행사처럼 김장에 대해 고민한다. 사 먹자는 남편, 그럴 수 없다는 나. 두 사람의 날 선 의견은 죄 없는 무와 배추를 수없이 난도질하며 양보할 기색이 전혀 없다. 급기야 당신은 사드시오! 나는 담글 것이오! 펀치를 날렸다. 나의 완승 갔지만 전혀 아니다. 김치를 담그는 내내 내 귓바퀴 언저리를 떠나지 않는 불평불만의 목소리를 견뎌야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0월 말경부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11월 초에 미리 당겨서 하는 남편 칠순 잔치를 위해 아들, 딸과 합심하여, 한 달 전부터 음식점을 예약하고, 모바일 청첩장, 플래카드와 꽃바구니, 답례 떡을 맞추느라 경황이 없었다. 아무리 간소하게 한다 해도 50여 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초대하자니 신경이 쓰였다.
남편 생일은 시어머니 생일과 불과 5일 차이다. 더구나 생일 전날이 시작은 아버지 기일이니 따로 음식을 만들 시간도 없고 하여 조촐하게 미역국만 끓여 주곤 했다. 일생에 한 번뿐인 환갑도 시어머니 구순 잔치와 겹치면서 여행으로 대신했다. 물론 지난봄에 스페인으로 부부 동반 칠순 여행도 다녀오긴 했지만, 식구들을 초대한 적은 없다. 그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다. 이번만큼은 오직 남편 몫으로만 가족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차려주고 싶었다. 남편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했지만, 내 뜻대로 호텔 뷔페를 예약하고 조카들까지 모두 초대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보낸 가을날이다.
칠 남매의 장남으로 70년을 무겁게 살아온 당신. 극구 사양하던 것과 달리 축하 속에서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며 애잔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고, 제사 준비에 돌입했다. 시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니 시아버지 기일은 7남매의 가족들이 모여 집에서 지내고 있다. 아무리 조금만 준비한다고 해도 입이 한둘이 아니니 반찬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주일 전부터 파김치와 오이김치, 총각김치를 담갔다.
몇 날 며칠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이며 준비했다. 통 도라지를 사다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쪼개고, 마른 고사리를 불려 삶고서야 알았다. 0 마트의 김장 대전 특별 할인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침 일찍 일어나 오픈런을 했다. 뽀글뽀글 흰 파마머리의 어르신들이 내 앞에 30명이나 서 있었다. 남편의 볼멘소리가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거 얼마 아끼자고 누가 아침부터 줄을 서겠느냐며 극구 반대하던 그였다. 김장 자체를 반대하니 못 들은 척했다. 내 뒤로도 줄이 2배도 넘게 섰지만 모두 반값으로 필요한 양만큼 구매하여 흡족한 표정으로 마트를 나섰다. 나 역시 제사를 하루 앞두고 배추 9포기와 무 25개, 쪽파 2단, 갓 2단, 미나리 등을 사서 집 앞에 쌓아두었다. 무리한 일이란 것은 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반값으로 김장한다는 나의 얄팍한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했다.
마침 딱 맞게 잘 익은 파김치와 오이김치, 총각김치는 고기반찬보다도 인기가 좋았다. 지금까지 먹은 김치는 김치가 아니었다나 뭐라나. 큰엄마 김치는 진정 예술이라는 말에 내 어깨가 한 뼘쯤은 올라갔다. 온 가족이 아버님을 추억하며 제사를 끝내고 정리를 하는 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자정까지 생강과 마늘을 깠다. 다음 날 아침 온몸이 천근만근 끝없이 추락했지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 동치미 무를 절이고 들어갈 재료를 모두 손질했다.
점심을 먹고 주중의 일정대로 길 건너에 있는 딸 집으로 건너가 집 안 정리를 하고, 손주들 저녁까지 먹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절인 무를 씻어서 애정하는 30리터 통에 동치미를 담갔다.
그게 끝이 아니다. 다음날 배추김치를 담그기 위해 찹쌀 풀을 쑤고 멸치. 북어, 새우, 다시마 등을 넣고 육수를 끓였다. 눈이 감겨 온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배추김치를 담그느라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은 후 비타민과 홍삼진액으로 기력을 보충하고, 마늘을 다지며 김장 속 재료를 준비했다. 남편은 가을인데 단풍 구경 한 번 못 가고 사서 고생한다며 입이 한 자는 나와 계시다. 바로 배추를 절이려던 계획을 미루었다. 함께 외출하여 점심을 먹으며 다독이고 돌아와 저녁 무렵에 배추를 절였다.
예전에 3~40포기씩 하던 거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일어나자마자 절인 배추를 씻어서 물을 빼며 여유 있게 김치 속 재료를 버무려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또 아까운 파, 갓등 김치 속 재료가 남았다.
주문한 절임 배추는 금요일에 오는데 그때까지 물러버리게 둘 수는 없다. 다음날 무와 총각무 3단을 또 사 왔다. 섞박지 1통과 총각김치 1통을 담갔다.
드디어 미리 주문했던 절임 배추 20킬로가 도착했다. 작년처럼 40킬로를 하려고 했지만, 옆에서 거들어 주는 것도 힘들었는지 극구 반대했다. 할 수 없이 양보하여 20킬로를 주문하는 대신에 9포기를 미리 사다 담근 것이다. 배송된 배추를 헹구어 물을 뺀 뒤 정성껏 속을 채웠다. 드디어 2025년 김장인지 김치인지 끝.
남편이 왜 기를 쓰고 반대하는지 잘 안다. 약골에 빌빌거리는 내가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아니 안쓰러웠으면). 그래도 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 내 몸이 버티는 한 '희야 표 김치'를 먹고 싶다. 성화에 못 이겨 주문해서도 먹어 보았지만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가을 단풍보다 더 곱게 채워진 김치통을 아주 그냥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친 짓은 인제 그만. 늦었지만 낙엽이 수북이 쌓여가는 숲길을 두 손 꼭 잡고 걷자고 하면 풀리려나. 윤달 때문에 올해는 생일도 없는 당신, 미리 축하하고 투덜거리면서도 내 뜻을 따라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