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다니카와 순타로 글 와다 마코토 그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험,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순수한 몰입,
외부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삽질의 조건이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中 무루
이거다. 내가 원하던 삽질.
늘 삽질이 하고 싶었다. 꼭 뭔가 결과를 내야 할까? 그냥 재밌어서만 하면 왜 안될까? 철없는 생각일 수 있다. 실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기도 했다. 성과를 내라고 한 사람도 없었는데 스스로 눌렸다. 내가 무엇을 재밌어하는지도 파악 못했다. 결국 2-30대의 많은 시간을 우울과 무기력으로 보냈다.
아무 결과를 내지 못한 삽질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또 돈만 썼다는 생각. 외부의 반응이 두려워 제대로 삽질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일들과 시간이 지나고 마흔이 된 요즈음 영육이 건강해진 것을 느낀다. 용기가 생겼다.
난 요즘, 삽질하고 있다.
다니카와 슌타로가 글을 쓰고 와다 마코토가 그림을 그린 「구덩이」라는 책이 있다.
일요일 아침, 아무 할 일이 없어서 히로는 구덩이를 파기로 한다.
아무 할 일이 없는데 당당하다. 게다가 구덩이 파는 일이 그리 거창한 일도 아닌데 뭔가 비장해 보인다.
엄마가 왔다. "뭐 해?"
히로가 대답했다. "구덩이 파."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를 팠다.
엄마가 묻는 "뭐 해?"를 "너 또 공부 안 하고 왜 쓸데없는 짓 해?"라고 꼬아 듣지 않는다. (나만 꼬아 듣는다) 그리고 뚝심 있게 계속 판다. 구덩이를 파서 뭐 할 건지 쓸모를 묻는 친구에게 긴 설명도 않는다. 그냥 "글쎄". 왜냐, 자기도 모르거든.
재밌는 것은 히로가 구덩이를 파는 동안 저쪽 구석에서 애벌레가 꼬물꼬물 길을 내며 오고 있다는 것이다. 히로가 "안녕" 인사하지만 애벌레는 시큰둥하다. 애벌레가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했는데, 그 작은 존재는 어떤 교훈이나 조언도 주지 않고 그냥 되돌아간다. 뭐지?
구덩이를 파서 뭔가를 이룬 것도 아니고 유익한 결과를 초래한 것도 아니다. 애벌레와 친구가 된 것도 아니고, 애벌레가 만든 길과 히로의 구덩이 간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손바닥에 물집만 남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에너지만 소비했다. 하지만 애벌레의 방문으로 히로는 갑자기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진다. 파는 일을 그만두고 쪼그려 앉는다.
구덩이 안은 조용했다. 흙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히로는 구덩이 벽에 생긴 삽 자국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이건 내 구덩이야.' 히로는 생각했다.
이 부분이 내겐 클라이맥스다. 구덩이 안의 고요함. 왜 나는 이 공간 이 감정 이 촉감을 알 것 같은가. 언젠가 나도 꼭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앉았던 것처럼 어쩐지 생생하다. 어느새 나는 히로hero가 아닌 히로인heroine이 되어 흙을 매만진다. 축축한 음의 기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땅의 울림, 미지의 atmosphere.
히로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구덩이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파랗고 훨씬 높아 보였다.
그 하늘을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가로질러 날아갔다.
구덩이를 파고 히로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저 그곳에 앉아 하늘을 본 것뿐이다. 파랗디 파랗고 높디높은 하늘을. 그리고 나비 - 이 나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던 나는 완전 까막눈이다!
축축한 흙 속의 히로는 팔랑거리며 하늘을 누빈다. 끝없이 파랗고 끝없이 높은 하늘과 그 속에서 한낱 미물일 뿐인 나. 드넓은 하늘에 대한 경외감, 난다는 황홀감, 축축한 흙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냄새, 오로지 이곳에서 나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제 유일한 창작의 목표는 기쁨입니다.
저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이 색을 칠해보고 싶어!' '이렇게 그려보고 싶어!'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中 키티 크라우더
구덩이를 파고 있다.
그림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