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로소의 분홍벽」 에쿠니 가오리 글 아라이 료지 그림
장마처럼 비가 내린다. 다행히 목적지에 도착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선다. 차 유리 앞뒤로 습기가 차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색연필 공모전에 그림을 출품하고 애써 잊은 척 한 달째, 드디어 발표날이다. 오전 8시 전부터 홈페이지를 들락거린다. 발표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좋으련만 날짜만 지정돼 있으니 속이 탄다. 9시가 넘자 홈페이지 서버가 다운된다. 이 정도였던가. 난 올해 처음 알았는데, 사람들은 어찌 다 알고 그전부터 해왔는지. 늘 나만 늦게 아는 것 같다.
홈페이지 새로고침을 반복한다. 낮 12시, 드디어 화면이 뜬다. 두근두근 명단을 클릭하고 재빨리 이름을 스캔한다. 김 OO 김 OO
.......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일 텐데, 어떻게 당선자 중 김 씨가 한 명도 없나. 고 씨 -> 공 씨 -> 그다음 이 씨로 넘어간다. 눈 씻고 찾아봐도 김 씨는 없구나. 어떻게 착각할 건덕지도 안주나.
「몬테로소의 분홍 벽」에는 하스카프라는 고양이가 나온다. 몬테로소, 하스카프 - 이국적인 이름이 괜스레 좋다. 게다가 표지의 분홍을 보라. 분홍러버라면 반할 수밖에 없는 색감이다. 옅지도 짙지도 탁하지도 않다. 밝은 크래프트지에 형광 분홍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사람들은 하스카프가 만날 잠만 자는 게으른 고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더 잘 살펴보라고 말한다. 하스카프는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눈을 뜨면 하스카프는 늘 생각했다. "아! 갈 거야, 난." 꿈에서 본 분홍 벽, 반드시 그곳에 가야 한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생각했다, 예술을 할 거 같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반지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화장실에 살면서도 나는, 꼭 예술을 하며 살 것 같았다. 그땐 내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제 보니 예술이었다.
"아! 예술가가 될 거야, 난."
무슨 예술가인지는 구체적으로 몰랐다. 살림을 하더라도, 요리를 하더라도 예술가이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느 것에도 손재주가 없었다. 이게 아닌데. 남들이 보기에 나는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도 해야 한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어.
나는 몰랐다. 무엇을 얻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하스카프는 분홍벽이 몬테로소에 있다는 걸 알고 바로 항구로 간다. 어디로 가야 할 줄을 아는 그대여.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이제야 안 것이 안타깝고, 드로잉이 좋다는 것을 마흔이 다 되어 알았다. 하지만 모지스 할머니를 보라. 그분은 일흔여섯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마흔에라도 진정 찾아가고픈 분홍 벽을 발견한 건 분명 행운일 게다.
하스카프도 몬테로소에 쉽게 간 건 아니다. 아무리 알아봐도 그곳으로 가는 배편을 구할 수가 없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내가 딱 그렇다. 쫒고 싶은 분홍 벽을 매일 보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물어물어 묻고 있다. 과연 갈 수 있을까, 분홍 벽은 정말 있을까, 확신이 없다. 그런데 기회는 꼭 그런 때 오는지, 하스카프의 귀에 몬테로소에 관한 대화가 들린다. 꿈을 포기 않고 그곳을 헤매다 보면 언젠가 소식이 들리고, 직항은 아니더라도 건너 건너 갈 방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나는 헤매고 있다. 가끔 몬테로소에 관한 대화도 들린다. 아직은 항구를 배회중이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몬테로소에 갈 거다.
호기롭게 색연필 공모에 도전했다가 비 오는 날 대차게 까였다. 힘이 쭉 빠진다. 꿈을 좇는다는 건 벽을 만나는 것과도 같다. 그 벽을 하스카프는 오히려 찾아 나선다, 그것도 행복하게.
나는 늘 벽을 느꼈다. 벽을 만나면 두려웠다. 글이든 그림이든 뭐라도 잘하고 싶은데 극복하고 넘어서기엔 높이가 아득했다.
분홍으로 칠해야겠다. 사랑스러운 벽으로 만들어야겠다. 벽에 녹아들어야겠다. 대차게 까인 공모전을 글감으로 써야겠다.
꿈을 좇는다는 것 자체로
이미 나는 예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