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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보이지 않아. 보이쟎아?!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by 그리다 살랑

요 며칠새 잔뜩 웅크린 하늘에선 비가 계속 내렸다. 도대체 햇살은 언제쯤 보일.


안 에르보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그중에서 이 책은 바람과 바람의 색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표지 한쪽엔 암호처럼 작은 구멍들이 규칙을 가지고 뚫려있다. '웬 구멍이지, 바람이 통하는 길인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로 "바람"이라 쓰여 있는 것이란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니까, 눈이 보이는 자나 보이지 않는 자나 볼 수 없는 건 매한가지인 거다. 아니 오히려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더 잘 볼 수 있을지도.



바람, 하면 '냄새'가 먼저 떠오른다. 바람을 타고 오는 냄새, 내음, 향기. 별히 한낮 오후의 바다내음. 그곳은 제주일 거. 지난 8월, 제주바다 내음이 그리웠다. 솔직히 말하면 거기서 먹었던 물회가 그리웠다. 방학이라 복닥거리는 열 살 아들과 급제주를 가고 싶었다. 가족여행을 이미 다녀왔기에 더 이상의 여행경비를 지출할 수는 없었다.


먹는 거 좋아하는 아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주도 물회 먹고 싶지 않니?"

"아! 그 식당, 보말 칼국수 진짜 맛있는데!"

"너.. 돈 있어?"

"어! 나 용돈 모은 거 30만 원 있어."

"우와, 엄청 많다."

"엄마! 우리 그거로 다녀오면 되겠다!"

"진짜? 써도 돼? 그럼 돈 없으니까 숙박 안 하고 당일치기하자.

차 렌트도 안 하고 버스 타고 물회랑 칼국수만 먹고 딱 오는 거야."

"좋아!!"

저는 질문만 했을 뿐 모든 것은 아이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애를 개고생 시킬 거냐는 남편의 경비지원으로 1박을 하긴 했다. 한적한 동네인 그 식당 근처에 숙소를 잡고 걸어서 왕복 40여분을 기쁘게 왕래했다. 오로지 우리의 목표였던 물회와 칼국수를 푸짐히 시키려는데, 2인분은 너무 많다고 주인아주머니가 만류하셨다. 처음엔 순종했으나 결국 추가를 거듭해 2인분 같은 물회와 칼국수 2인분에 죽 2인분까지 야무지게 끓여 먹고 아쉬워하며 나왔다. 원래는 다음 날 오전 그 식당엘 또 가려 했으나 아쉽게도 휴무였다. 갈치조림은 포장해 올 수밖에. 아침으로 먹을 것을 야참으로 먹고 싶은 유혹에 흔들릴 때 다행히 편의점 갈 일이 있었다. 갈치냄새를 박차고 아들과 뛰쳐나왔다. 바람에 휘잉휘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보이지 않지만 바람은 선명했다.

바람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색, 바다를 일렁이는 잔물결색


소년은 바람의 존재나 모양이 아니라 색을 궁금해했다. 보이지 않으니 온통 검은 세상일 거고, 색에는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색을 궁금해했다. 바람에 색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부터 신선했다. 늙은 개, 코끼리, 마을, 내리는 비 등등 차례로 만나며 바람의 색을 물었다. 만약 내게 묻는다면 '바람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색, 바다를 일렁이는 잔물결색'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바람 외에 존재하는 게 또 있었다. 햇살이다. 햇살은 경비절감을 위해 걷고 또 걸었던 내 아이의 뒷목과 등줄기에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여름, 한낮, 햇살, 그리고 바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 것들.


고지가 보인다... 버스정류장 & 우리가 가려는 식당

제주에서 만난 모든 것에 햇살이 있었고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이 마지막으로 만난 거인의 말이 가장 와닿는다.

바람은 이 색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 색이기도 하지.
바람은 모든 색이란다.
네가 이 책 속에서 만난 모든 색처럼.

거인의 말을 듣고 소년은 자신이 지나쳐온 책의 모든 장에서 바람을 느꼈다. 어떻게 느끼게 됐는지는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소년처럼 책에서 이는 바람을 느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식탁 위 복숭아에 어느덧 선선해진 늦여름 햇살이 드리워져 있었다. 색연필을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햇살을 그리고 싶었다.


이제 나는 언제든 햇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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