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축 글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제 네 물건은 다 가져가라"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닐뭉치를 엄마가 내놓으신다. 제발 열어보지도 말고 그대로 버리자는 남편의 말을 가뿐히 넘기고 비닐봉지를 기어코 끄른다.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의 일기장, 졸업앨범, 대학생 때 영미문학 자료들... 세월에 삭은 공책들이 곰팡이로 들러붙은 가운데 낡은 파일 케이스가 눈에 띈다. 케이스를 두른 고무줄은 탄성을 잃은 지 오래다. 구실만 갖춘 고무줄을 끄르고 케이스를 열자 꼬깃꼬깃 네모나게 접힌 기름종이가 툭, 떨어진다.
순 간
그것을 둘러싼 공기와 시간과 내가, 서로를 알아보고 피식 웃는다. 접힌 선을 따라 찬찬히 펼친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 이미라 작가님의 순정만화다. 30여 년 전 기름종이를 대고 정성껏 따라 그렸던 '이슬비와 시리우스'. 윤슬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머릿결, 섬세한 옷주름이 감탄을 자아내던 나의 주인공들이다.
올가 토카르축이 글을 쓰고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그린 [잃어버린 영혼]은 2018년 볼로냐 라가치 상을 받은 작품이다.
낡은 크래프트지 질감과 색감에 눈이 간다. 책 등을 보면 헌책을 샀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마치 오래된 내 일기장 같다. 표지엔 빈티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빈 의자가 놓여있고 검은 재킷이 걸쳐있다. 의자 안쪽에선 이파리가 무성하다.
의자는 왜 비어 있으며 이파리는 왜 무성한가. 검은 재킷은 누구 것이며 왜 벗어놨을까.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에 매료된 것과는 무관하게 그녀의 그림을 다 이해하진 못한다. 그녀의 세계는 범인凡人인 나로선 가늠할 수 없는 망망대해와 같다. 나는 겨우 반짝이는 어떤 것 하나, 무리 짓는 물고기 떼의 물살, 고래가 뿜어내는 물방울 분수만을 봤을 뿐이다. 겨우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그녀 앞에선 겨우가 된다. 비범한 그녀의 언어와 그림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잘 몰라도 느낄 순 있다.
눈 덮인 숲이 있다. 위에서 누군가 내려다본다. '얀'이라는 남자가 의사로부터 영혼을 잃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환자분은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그렇게 한다. 도시변두리에 작은 집을 구해 영혼을 기다린다. 잡목숲이 우거진 모습-색채가 없는데 오로지 명암만으로 생생히 구현한다-에 이어 어릴 적 기름종이라 불렀던 트레이싱지에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그 종이를 넘기면, 남자의 작은 집이 보인다. 마치 종이를 사이로 멀찍이 떨어진 누군가 남자를 지켜보는 듯하다.
콘세이요는 낡은 재생용지나 모눈종이 같은 빈티지한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을 안 팬들이 낡은 책과 종이들의 선물공세를 퍼부어 평생 쓰고 그릴 종이가 차고 넘치게 되었단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그림감성을 따르고 싶어 나도 아이보릿빛 작은 모눈들로 가득 찬 종이를 샀다. 아직 그 위에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유리로 꽃문양이 새겨진 빈티지 스타일 문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이 그림은 정말 감탄을 자아낸다. 유리 한 알 한 알을 연필로 묘사했다.
의자에 앉아 영혼을 기다리는 남자와 그를 찾아가는 어린 시절의 영혼이 조우할 때, 두 번째 트레이싱지가 등장한다. 트레이싱지 너머 무성하게 자란 이파리의 화분을 안고 한 남자가 앉아있다. 무성한 이파리는 환영의 의미일까, 시간의 흐름 혹은 마음의 여유일 수도 있겠다.
의미를 몰라도 괜찮다. 가슴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으로 차오르니까. 두 사람의 조우가 만들어낸 기쁨은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클라이맥스 된다. 작은 집은 수풀로 우거진다.
표지의 의자는 빈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짐가방을 내려놓고 재킷을 벗고 훌훌 자유롭게 살아 숨 쉬는 중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이파리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트레이싱지로 인해 '영혼'의 속성이 더 선명히 느껴진다. 중학생 시절 나를 웃고 울린 순정만화를 따라 그린 그 종이가 내 영혼을 소환한다. 감히 말하건대 요안나 콘세이요는 감성천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