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는 곳으로
바싹 마른 장작더미에 불쏘시개를 던져 활활 자연발화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나에게 살아가는 삶이란 하루 행위였고 살아 움직이는 로봇 같았다. 빛은 언제 어디서든 비춘다. 그러나 빛은 그 빛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글을 쓴다면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살아서 고달팠던 삶, 그 삶에 분투했던 가족의 눈물과 응어리가 고스란히 세월을 따라 나이를 먹고 있었다.
괜찮다고 느꼈던 유년 시절의 결핍은 큰 구멍에서 도사리는 슬픔을 껴안고 살았다. 하고 싶은 것도 꿈도 없었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아침이면 다가오는 하루를 끈질기게 살아내려 애썼던 시간이었다. 흠 없는 하루를 살기 위해 가끔은 시간의 노예처럼 모든 감각을 시계 초침에 맞춰 살았다. 어느 날 초등학교 딸아이가 5분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걸 보았다.
“엄마, 5분 후에 출발하자”
“엄마, 5분만 있다 할게.”
나의 강박은 시나브로 아이에게 이어졌고, 강박과 휑한 구멍 같은 삶의 정체가 궁금했다. 강했지만 외로웠고, 웃고 있지만 슬픔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눈물이 없던 아이가 스치는 바람 소리에 가슴 예리게 울고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아버지가 존재했고 내 마음속 눈물샘은 아버지에게서부터 나오는 질긴 인연의 흔적이었다.
줄곧 열심히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매 순간 최선이었지만, 허탈한 기분은 덤이었다.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나약함조차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랑받아 본 기억보다 오뚜기처럼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기억과 잡초처럼 질긴 생을 엮어가며 살고 있다는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 번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심지어 엄마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나는 늘 괜찮은 아이였다.
아버지와 보냈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여전히 혼자 알고 있는 과거 속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슬픔에 갇혀 잠식당하기 전 아버지를 애도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와의 시간을 회상하며 빛을 찾아주고 싶었다. 불행했던 기억보다 행복했던 기억이 더 선명했던 이유는 나는 아버지를 싫어하지 않았다.
조각난 기억 속에서 나는 괜찮았다고, 그래서 당신이 그립다고 위로를 전합니다.
“아부지 우리 배고픈디, 김치찌개잔 끓여주믄 안 된당가?”
친구 한 무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배짱이 좋았을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잡음 같은 속삭임이 싫었을까?
초라한 집에, 왜소한 아버지 모습을 마주하고 어색해하는 친구들과 달리 아버지는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먹음직스럽게 빨간 국물이 흘러내리는 김치를 꺼내 듬성듬성 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김치를 썰기로 결심한 사람 같은 아버지 모습에 침묵이 흘렀다.
떨리는 목소리에 힘들 주니 삑 하고 쇳소리가 났지만, 토방 건너편 마당에 핀 채송화를 가리키며 아버지를 향한 아이들 시선을 옮겼다.
“저그 보이제, 울 엄마가 키우는 꽃밭이여"
담벼락 밑으로 정갈하게 놓여있는 장독대 주위를 알록달록 수놓은 빨간 분홍 채송화, 화려한 웨딩드레스처럼 환하게 나풀거리는 접시꽃을 가리키며 뻔뻔스럽고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사이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상을 차렸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 옆에 밥공기를 몇 개 갖다 놓고서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노란 보리차 물이 담긴 물병과 컵을 챙겨 나오는 아버지 얼굴 사이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에게 아버지는 감추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으로 가득하지는 않았지만 여물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 안에 희망, 소망, 기쁨은 아버지 안에서 키워졌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소망과 아버지를 떠나지 않겠다는 희망과 아버지를 웃게 해주고 싶다는 기쁨으로 간직된 시간, 목까지 채워진 단추에 가슴이 조여오고 숨이 막혔지만, 단추를 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추를 하나씩 풀다 보면 아버지를 이해하는 날이 오려나요? 굳이 글을 써야 하나요?
목구멍에 채워진 단추를 푸는 방법은 모든 감정의 시작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글을 쓰면 쓸수록 목마름으로 다가왔다.
한 송이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쉽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 > 서정주
#아버지#슬픔#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