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근길에 싸리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5년 첫눈이었는데, 싸리눈처럼 내리더니 금세 길가에 하얀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이리저리 바람결에 휘리리 춤을 추며 하얀 속살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 사이로 춤추는 싸리눈 사이로 고즈넉한 시골길 눈을 쓸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동네 초입 언덕 위에 대문 없는 작은 집이었다.
높은 언덕은 아니었지만, 눈이 쌓이면 제법 미끄러워 어린 나와 오빠는 비닐포대를 타며 놀았던 곳이다.
동장군이 예고 없이 찾아오면, 엄마는 새벽녘부터 분주했다. 아침밥이며 하루 동안 써야할 물을 길이 꽁꽁 얼기 전에 집에 있는 큰 다라이에 채워야 했었다. 그때 시골은 집마다 지하수를 파서 식수로 사용했지만, 우리 집은 언덕 아래 마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눈이 오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던 나는 엄마 걱정이 하나가 더 생겼다는 걸 몰랐다.
엄마가 새벽부터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가면 아버지는 조용히 눈 위에 포개진 엄마 발자국을 따라 눈을 쓸어내렸다. 하얀 눈사람 같은 아버지 모습보다 쌓였던 눈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더 컸던 나는 싸리 빗자루에 휘리릭 사라지는 하얀 눈이 아쉬울 뿐이었다.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다리보다 한얀 눈이 더 빨리 쌓여가는 동안, 엄마는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연신 빗자루로 땅에 내려앉은 눈 다발을 쓱쓱 쓸어 올렸다. 혹여 물동이 이고 올 엄마 걱정에 아버지는 싸리 눈이 내리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지팡이 대신 빗자루를 챙겨 나가셨다.
싸리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얀 꽃송이처럼 투명한 새벽 엄마 모습이 눈 속에 그려진다.
엄마는 시린 손으로 꽁꽁 언 얼음조각을 스르르 밀고 쨍그런 물 한 바가지 퍼 올린다.
투명한 물 한 바가지 물동이에 들어붓고 언덕을 오른다.
찰랑 차가운 물이 철썩 엄마 등에 달라붙는다.
쓱싹쓱싹 아버지 한숨으로 내리던 눈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아버지 시린 눈물이 철썩 물 주기와 마주한다.
싸리눈이 내리면 아이는 신이 나고, 엄마는 물동이를 아버지는 싸리 빗자리로,
싸리눈이 내리면 엄마 그림자에 아빠 발자국이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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