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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르타의 벼랑 끝에 서

교차하지 않는다

by 노마드

오르세에서 본 코끼리를 닮은 바위는 어린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 그러했냐고 물은들 나도 모르겠다. 루브르에서 봤던 모나리자의 웃음도 기억나지 않는데. 기차역을 닮았고, 들어가는 줄이 길었던 그 박물관에서 스쳐 지나가며 본 절벽 그림 한 점이 왜 그리 오래도 기억에 남았을까.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 여름의 초입이었고, 우리는 파리로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A와 P는 어디를 갈지 한껏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A는 재잘거렸다. "파리 근교에는 지베르니(Giverny)라는 동화 같은 마을이 있대." P도 말을 이어받았다. "모네의 정원이 거기 있다는데, 가서 수련을 봐도 좋지 않을까? 너 모네 좋아하잖아." 이미 며칠 전부터 관련 게시물을 번갈아 가며 보내오던 둘이었다. 이른 아침 참새처럼 지저귀는 둘을 보며 나는 웃음 지었다.


< 클로드 모네, 해돋이 인상, 마르탱 모네 미술관 >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 보낸 하루가 인생 최고의 하루였다며 파리 여행을 제안해 고맙다던 그만큼 모네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짙은 음울을 모네만큼 흐릿하게 표현하는 화가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인상: 해돋이>와 같은. 검은색 하나 칠하지 않고 어둠을 담아내는 그의 우울이 좋았다.


< 클로드 모네, 르아브르 항구 >


< 6월 시카고에서 본 에트르타 >


'모네를 좋아하는 것도, 수련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하는 대신, 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댔다. "베르사유도 가고 싶고, 지베르니도 가고 싶으면 정작 파리에서 보낼 마지막 시간이 줄어드는데 괜찮겠어? 마지막 파리인데 쇼핑도 조금 해야지."



그렇게 우리는 파리로 떠났다. 하늘은 어김없이 흐렸고, 나는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철저히 여자 아이들의 요구에 맞춰 여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말은 많았지만 무리한 일정을 그간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었다. 혼자서라면 갈 일도 없는 카페에 가 1만 5천 원에 육박하는 핫초코 한 잔을 비우고, 근처의 셰익스피어 앤 컴패니를 지나쳤다. 샹젤리제의 세포라에서 화장품 발색을 확인해주기도 하고, 자라에서는 코트를 봐줬었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시간들이었음에도,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특별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누볐고, 나는 출렁이는 센 강을 바라보며 제대 후 첫 배낭여행을 떠올렸다.


3년 전, 고등학교 동창과 유럽으로 떠나보낸 마지막 밤,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 센 강변을 달렸다. '모든 게 파리에서 시작해 파리로 끝나고 있구나...'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그 후에는 친구와 함께, 십수 번도 찾았던 도시. 에펠탑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우리는 바게트와 와인을 사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고, 손을 흔든 후 헤어졌다. 당분간 못 볼 터였다.


A, P, 그리고 N은 짐을 챙기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출국할 예정이었고, 나는 다음날 에트르타와 르아브르를 찾은 후 아부다비를 통해 인천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폭풍우 치는 밤, 나는 외스타슈 성당을 찾아 '빛의 춤'이라 하는 공연을 보았고, 자기 전 휴대폰을 꺼내 에트르타에 대한 정보 이모저모를 찾아보았다. 열차는 파리 북역도 동역도 아닌 '생 라자르' 역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모네를 그리며 가는 하루의 시작은 처음부터 그의 작품과 맞닿아 있었다.


잠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글은 해변가 마을의 날씨를 논하고 있었다. "에트르타의 날씨는 70%는 흐리다. 그 남은 30%의 행운을 누려 다행이었다."라고...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심 흐렸으면 했다. 어색한 햇살로 그간의 여행을 마무리하기보다는 하늘이 흐린 편이 적당히 우울하고 좋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 기차는 파리 생 라자르 역을 출발해 노르망디로 떠났다. 르 아브르 역에 도착한 나는 2유로를 기사에게 건네고 다시 에트르타 행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도 하늘은 흐렸고, 비는 가끔 내렸다. 공용주차장에서 내려 마을을 돌아보았다. 어딘가 유리되어 버려진 듯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빵집에 들러 크루아상을 먹어도 입술에 부딪힌 채 튕겨나가는 듯했고,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를 집어 들어도, 투명한 막이 손가락을 덮은 듯했다. 계단을 올라도 발이 붕 뜬 것만 같았고, 가끔 내뱉는 혼잣말마저 붕 떠있었다. 아. 그건 바람이었다.


<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 >


해변으로 나아가니 파도가 쳤고, 언덕을 올라 성당을 지나치니,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던가. 모네, 모파상, 쿠르베, 마티스, 들라크루아.


바다가 땅을 삼키고 깎아낸 그곳에서 나는 길과 흙의 경계를 넘어, 잔디 너머, 바닷새의 둥지가 있는 곳으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어갔다. 벼랑의 끝으로. 걷고 또 걸었다. 바람이 절벽에 부딪혀 쇳소리를 냈고, 갈매기는 하늘을 곡예 비행했다. 나는 소리 질렀다. 갈매기는 무심히 날고, 바람은 여전히 불어왔다. 그러나 나의 절규는 바람에 묻혀 흩어졌고, 나는 거센 숨을 몰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얼굴을 적셨다.


에트르타의 벼랑 끝에 서 나는 생각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절벽에 서 뱃사람을 조금 더 오래 떠나보낼 수 있겠다고. 주저앉아 나는 불현듯 이 모든 행위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반문했다. 의미가 없어도 좋다는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았으니까.


< 성외스타슈 성당 >

나는 성외스타슈 성당을 찾는다. 밖에는 천둥이 치고 장화를 적시우는 장대비가 내린다. 성당 내부에는 주제 따위 알 길이 없는 쇼가 한창이다. 어둠에 잠긴 성당의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빛이 훑고 간다. 그리고 공연이 막을 내리면 이내 성당이 어둠에 잠긴다. 천둥은 여전히 파리의 밤을 지배한다.


그들은 다시 메쓰로 돌아간다. 파리에서 메쓰로 떠난 열차는 4시간을 달려 메쓰 중앙역에 도착하고, 그들은 사진 여러 장을 파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친구에게 보낸다. 기숙사 문을 닫고 잠을 청한다.


< 성요셉 성당 >

나는 르 아브르로 떠난다. 버스에서 잘못 내려 해변의 카이트 서퍼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몽돌 하나를 집어 들고 멀리 던져 버린다. 돌은 깨지지 않는다. 걸어 도착한 성 요셉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수천 개에 달하는 성 요셉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서늘한 빛이 찢어진다.


< 생 라자르 역 >

그들은 다시 메쓰를 떠난다. 마찬가지로 기차에 올라, 파리에 도착하나 교차하지 않는다. 샤를 드골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 영국 내셔널 갤러리, 클로드 모네, 생 라자르 역 >
< 파리 시립현대 미술관, 라울 뒤피, 전기의 요정 >


나 역시 파리, 생 라자르 역으로 떠난다. 오전에는 오랑주리 박물관을 찾아 수련 연작을 감상하고, 오후에는 시립현대미술관을 찾아 전기의 요정을 눈에 담는다.



마침, 미술관에서는 연주회가 한창인데, 라울 뒤피의 그림 아래로 펼쳐진 계단에서 듣던 곡의 마지막은 알 수 없는 불협화음들의 무더기라 나는 그만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선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기어코 신발을 완전히 적신다. 폭풍우는 잦아들었으나 이제는 기분 나쁘게 추적인다.


< 오랑주리 박물관, 모네 수련 연작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오르세 박물관을 찾는다. 네 번째로 찾는 박물관을 헤매는 이유는 단 하나. 에스컬레이터의 사람을 좌우로 밀어내며 홀린 듯이 최상층까지 뛰어 올라가 모네의 그림을 찾고는 연신 셔터를 찍어 눌러댄다. '거친 벨-일 해안의 암벽들'과 '폭풍우 치는 벨-일 연안', '에트르타 해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레 29에 전시된 '에트르타의 거대한 바다를.'


< 오르세, 쿠르베의 에트르타 >
< 오르세, 모네의 에트르타 >


그들의 비행기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떠나 애틀랜타 하치필드 잭슨 공항으로 이륙한다.


그리고, 나를 실은 비행기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떠나 아부다비 자이드 국제공항으로 이륙한다.


< 에트르타 절벽 끝에 서서, May 05, 2024 >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떠난다. 나 역시 떠나고 떠난다. 남겨지긴 싫어... 그렇게 떠난 들, 우리가 다시 영국에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그림 속 에트르타의 절벽에 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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