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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으로 가는 길

잔류사념

by 노마드

극복할 이별도 없는 주제에 감히 가을이라도 타는 걸까.

바빠 외로울 겨를도 없다고 되뇌다, 교정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고 그새 계절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바삐도 지나가는데 하늘만 무심히도 그대로였다.


한 주의 끝이면 맥주를 한 캔 따 발코니 난간에 기댔다. 아파트 앞 선로를 지나가는 기차의 경적 소리, 그리고 혼자 보는 새빨간 노을. 하늘이 어둠에 잠길 때까지 멍하니 맥주를 홀짝이다 보면 붉은 속도 모닥불 뒤 남은 재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턱을 괴고 구름이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다,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래전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혹은 그녀는 내게 물었다. "넌 외롭지 않아?"라고. 나는 뭐라고 답했던가. 고독을 즐긴다고, 한 번도 외로운 적이 없다고 둘러댔던가. 그에게 내 말은 항상 외롭다고 들리지 않았을까. 외로움이 죄라면 그간의 내 삶은 무기징역감이었다.

여행의 끝에는 고독이 있고, 그리고 그 고독의 끝에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떠나옴은 늘 돌아감을 내포해, 타인의 온기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다시금 떠나야만 했다.


사람이 고독을 만나면 나는 떠나고, 여행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온기를 느낄 때 즈음이면 다시 떠나간다. 따스함이 머지않아 식어버릴 것임을 예감하는 순간, 다음 행선지로의 티켓을 끊는 것만이 유일한 차악이었다.



작년 여름, 아테네의 어느 지로스 가게였다. 눈을 가리고 맥주 브랜드를 맞혀보라며 친구와 낄낄대다, 나온 지로스를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시큼한 요구르트 향 사이로 나는 다가올 끝을 예감했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을까. 다음 날 아침, 파르테논 신전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충동적으로 엘살바도르행 티켓을 구매했다.


54일간의 여정을 마치던 오슬로에서의 밤은 또 어떠했던가. 빗소리가 깔린 재즈 바에서 국적 모를 친구들과 와인 잔을 부딪치고, 취한 채로 비 내리는 거리를 쏘다니던 그 밤의 온기. 여행을 마치고 애틀랜타로 돌아와 나를 맞이한 건 서늘한 에어컨의 냉기뿐이었다. 그 온도 차에 기억마저 씻겨 내려갈까 두려워, 나는 서둘러 친구 사는 토론토행 티켓을 발권했다.


몽골에서 돌아온 밤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여행에 대해 재잘대던 친구들이 잠들고 자취방에 정적이 내려앉자, 나는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리마행 항공권의 구매 버튼을 눌렀다. 치첸이사의 피라미드 앞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쳤던 박수의 공명이 흩어질 때 즈음 내 마음은 이미 카리브해로 달아나 있었다.



그렇게 유럽을 돌고, 중미를 돌고, 남미를 돌고, 카리브해를 돌고, 한국까지 돌아갔다 왔는데도, 여전히 애틀랜타의 에어컨 바람은 차가웠다.


떠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는 것일까. 잃어버린 온기를 찾아 헤매는 일에 지칠 만도 한데, 나라는 사람이 끌어안은 외로움이 밑 빠진 독보다 깊은 것일까. 내일은 어제의 반복이었고, 표면만 겉햝는 관계들은 가늘고도 길게 늘어졌다. 마치 젖은 낙엽처럼 무겁게 땅에 들러붙어, 덜 마른 머리카락처럼 찝찝하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차라리 더 추운 곳으로 떠나면 어떨까. 어설픈 온기에 기대 식어가는 것들을 견디느니, 차라리 모든 것이 얼어있는 곳으로. 애매한 현실의 냉기보다, 확실한 빙점의 중심으로 떠난다면... 식어버린 그 희미한 온기를 되려 날카롭게 벼려 간직할 수 있을까. 나는 옷장 깊숙한 곳에서 두꺼운 패딩을 꺼내 캐리어 밖에 매달았다.


떠나기 2주 전부터 짐은 꾸려져 있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며칠 밤을 설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공항으로 향했다.



간만에 애틀랜타 공항이다. 보안검색대를 지나, 게이트 앞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멍하니, 한참을, 창밖을 바라본다. 어제저녁 코펜하겐 공항을 떠난 보잉 787 한 대가 게이트 앞에 멈춰 서고 사람들이 내린다.



노을이 진다. 가을 하늘 특유의 서글픈 붉음이다. 직원이 내 이름을 부른다. 9시간 후면 코펜하겐, 22시간 후면 오슬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35시간 후면 롱이어비엔. 북극.



고독은 언제나 출발의 다른 이름이었고, 떠남은 외로움을 가리는 가면이었다. 그간 내가 고독이라 그럴싸하게 포장해 온 것은, 어쩌면 사실 천천히 식어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의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온기를 얼려버릴 곳으로. 멀리. 또 멀리.


떠난다. 남은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세상에 가장 추운 곳으로. 다시. 북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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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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